여러분이 계시는 까닭에 부처님은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그러니까 여러분이 모두 ‘불교가 그런 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절간에만 불교가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침 먹고 저녁 먹고 잠자고 똥 누고 이러는 자체가 그대로 불교입니다. 그런데 모두 40분이고 한 시간이고 앉아서 좌선을 하려고 생각들을 하거든요. 좌선하는 게 참선인 줄 알아요. 왜 참선이 못 되느냐 하면 앉았다 일어나면 참선하는 게 끊어질 거 아닙니까? 그래서 앉는 거, 서는 거, 자는 거, 일하는 거, 즉 말하자면 좌선, 입선, 와선, 행선 이것이 몽땅 다 참선입니다. 스스로 자유롭게 시간이 나면 좀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고 일하기도 하고 그냥 눕기도 하고, 이러는 게 그대로 참선이에요. 그러니까 참선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겁니다. 앉았다 눕고, 눕다가 앉았고, 서다가 일하고 이러는 게 다 참선이니 그냥 일상생활이죠. 일상생활이 그냥 참선이죠. 마음은 꽁지에 꽁지를 물고 들떠서 망상에 훌떡 그냥 넘어가는데 몸만 앉혀 놓으면 뭘 합니까? 마음이 안정돼야 그게 좌선입니다, 네? 서나 앉으나 일하나 마음이 안정된다면 그것이 바로 좌선이며 참선입니다.

팔자 운명을 누가 갖다 주고 뺏어 가는 게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하고 그 자리에서 입력이 돼서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 생활이 종교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없다면 무효입니다. 부처가 어디 있고 중생이 어딨습니까? 미생물에서 나왔다는 증거가 여러분 오장육부의 세포 하나하나 속에 있지 않습니까. 증명하느라고 벌써 그렇게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미생물에서부터 인연에 따라서 형성돼 가지고 이렇게 사람으로까지 등장을 하게 된 것은 자꾸자꾸 화해서 나투면서 진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도 있죠. 짐승으로 화해서 쫓기다가 내리막을 내려가는데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기니까 도무지 내려갈 수가 없더랍니다. ‘아, 이거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기니까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선 그냥 잡아먹혔죠. 그래서 그다음에 태어날 때는 앞다리와 뒷다리가 거반거반 같게 나왔더랍니다. 이게 마음의 진화입니다!

임신을 했을 때 태교를 중요시하는 것도 그런 탓입니다. ‘이미 낳았는데 그러면 어떡하지?’ 이렇게 하지 마세요.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전력이 전달되듯이, 이미 낳은 어린애하고도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거든요. 이 방에 전구가 이렇게 많고 모습은 다 각각이지만 전력은 다 똑같으니까 여기서 스위치를 올리면 저기까지도 다 불이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그와 똑같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식구 중에 한 사람이 병이 들었다거나 친구가 병이 들었다 하더라도, 실험을 하는 공부니까 거기다 마음을 주든가 내 마음에다가 넣든가 해서 맡겨 놓고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실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공부를 해 나가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바로 ‘아, 전력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내 안의 스위치를 누르니까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이 다 들어오는구나. 그러니까 다 밝게 살 수 있구나!’ 이러는 거를 여러분이 느끼고 알고 그래야지 말로 해서 그게 알아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자장면에 비유한다면, 여직껏 자장면을 보지도 못했고 맛도 이름도 모르는데 자장면을 찾고 어쩌고 할 길이 없는 거죠. 아주 모르니까요. 이름도 맛도, 또 보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먹어 보지 않은 거는 찾아지지도 않죠? 먹어 봐서 그게 맛있다 하는 생각이 있으면 “아, 우리 그것 좀 또 해 먹어!” 그러든가 “우리 그것 좀 먹으러 가자!” 이러지만 먹어 보지 않은 거는 찾아지지도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실험을 해서 체험을 하셔야죠. 모두가 여러분이 생활하는 그 속에 있으니까요. 이게 바로 어마어마한 창조력을 기르는 것이요, 창조를 해내는 법을 아는 것이요, 생활이 그냥 과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면 오늘 진주에서는 처음 개원식을 하는 거니까 우리가 꼭 알아 둬야 할 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오신통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내가 육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심안으로 볼 줄 아는 거, 심안으로 들을 줄 아는 거, 심안으로 과거에 어떻게 왔는가 아는 거, 심안으로 남의 속을 다 아는 거,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거, 이런 거를 오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오신통을 다 해도 도가 아니라 그랬어요. 그건 왜냐하면 숙명통을 지금 현실의 컴퓨터라고 한다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다 돼 있거든요. 그러면 현실에 나오는데 그것을 다 거기다가 일임하고 맡겨야 다시 입력이 됨으로써 앞서의 입력된 거는 없어지죠? 그렇죠? 그거는 아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업보로 인해서, 유전성으로 인해서, 영계성으로 인해서, 세균성으로 인해서 오는 그 애고를 다 무너지게 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건 왜? 거기다 입력을 다시 해 버리니까요. 나오는 데다가 되맡겨 놓으니까, 입력이 되니까 앞서 입력이 없어지죠. 없어지니까 내 마음이 편안하고, 속에 들어 있는 의식들이 다 편안해지니까 내 마음도 편안하고, 내 마음이 편안하니까 가정도 화목해지고, 가정이 화목하니까 생활이 잘되고, 생활이 잘되니까 사회도 마음이 건전하게 돌아가죠. 허허허…,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 좋은 겁니다.

그러니 숙명통을 지금 말로 심성 컴퓨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 자동적인 컴퓨터입니다. 지금 그 컴퓨터를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자동적으로 되는 거죠. 정말입니다. 거짓말 안 합니다. 그러니까 팔자 운명을 누가 갖다 주고 뺏어 가는 게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하고 그 자리에서 입력이 돼서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모르고 어떻게 그냥 가겠습니까? 이걸 어떻게 방치하겠습니까? 이렇게 부처님이 가르치신 건데 지금은 전부 기복으로다가 가르치고 있으니 자기 속에서, 이게 오신통이거든요. 어떻게 오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신통을 안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물컵을 들어 보이시며) 지금 이거를 목마른 사람에게 주기도 하고 내가 목마르면 먹을 수도 있어야만이 바로 누진통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오신통 그릇 안에서, 항아리 안에서 딱 벗어나서 보면 자유스럽게 항아리를 굴릴 수가 있죠. 항아리 속에서는 항아리를 굴릴 수가 없어요. 그러니 내 속에서 내가 벗어나야 여기 앉아서도 어디든지 갔다 올 수 있죠. 한 가지 가르쳐 드릴까요? 여기 앉으셔서 집에 좀 갔다 온다 해도 한 찰나에 갔다 오실 수 있지요? 지금 집에 갔다가 오실 수 있겠죠? 허허허…. 그렇게 마음이 지구 바깥에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구라는 것이 버스라면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서 버스가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사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지금 몸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도 여러분이 마음을 그렇게 내서 공부하지 않는다면 오장육부의 모든 중생들이 지금 여러분이 부산을 가는지 진주에 왔는지 그거 모를 겁니다. 이게 참 아주 묘한 도리죠. 여러분이 움직이고 다니게끔 속에서 모두 작용은 해 주지마는 자기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그걸 몰라요. 지구에 붙어서 살면서도 지금 지구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우리 중생들은 몰라요. 지금 인간에게 붙어서 사는 것인데도 인간이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또 몰라요.

그러니 모두가, 삼합이, 사부주가 맞아야 같이 혼합해서 돌아가는 걸 알게 되죠. ‘이런 것이 시공을 초월했다는 것이구나. 이런 것이 백 개라도 하나로 할 수도 있고, 천 개라도 하나로 할 수가 있다는 거구나. 그래서 바로 평등공법이며 활궁공법이며 수레공법이구나.’ 이런 도리를 진주 여러분이 모두 공부를 해서 하나하나 내 몸으로부터, 내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체험을 하고 아신다면, 핼리 혜성이 어떠한 문제로 인해서 우리 지구 동네에 와서 해를 입힌다 하더라도 내가 그 핼리 혜성이 될 줄 알 겁니다.

구렁이가 사람들 못 다니게 길을 가로질러 걸쳐져 있으니까 달마 대사가 구렁이 속으로 들어가서 구렁이를 끌어다가 딴 데 갖다 놓고 다시 오듯이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얼마나 현명한 도리입니까? 그러니 이 세상을 다 주고도 살 수 없는 이 도리를 여러분은 꼭 배우셔야 될 겁니다. 이런 인연 만나기도 참 쉽지 않습니다. 천 년 만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렵다는 공부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마음의 구조도 바꿀 수 있고 체질도 바꿀 수 있고,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자유자재권을 가지고 있고 정신계의 대권, 자유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질문을 좀 해 보시죠. 이해가 안 가시는 점도 많겠습니다마는 처음부터 배부르지 않습니다. 내가 한 숟가락 한 숟가락 떠 넣고 그래서 한 밥그릇이 다 비워져야만이 배가 부른 것을 알게 되죠. 질문하실 분 없습니까?

 

질문자1(여) 스님, 전생에 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저희들이 전생을 알 수 있다면 좀 더 어리석음을 짓지 않을 것이고 깨달음도 빠를 것인데, 저희들은 어째서 깨닫기 전에는 전생을 모르는지요? 부딪치게 될 때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아, 조금 아까도 전생인데요. 하하하…. 한 시간 전의 전생에서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현생에 닥치죠. 그리고 오늘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내일 닥쳐오죠. 그러니까 전생이다 후생이다 할 것이 없습니다. 알고 보면 시공을 초월해서 만 년 전이라도 오늘이 됩니다. 그 도리를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삼정례를 하다가도 바쁠 때는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 한데 합쳐서 일심으로 일정례를 해도 된다.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며 뛰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발전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한생각에 일정례로 만 번의 절을 할 수가 있고, 삼정례로 삼만 번, 삼십만 번의 절을 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아주 여유가 있고 ‘내가 절을 좀 하고 싶다’ 이럴 때 그냥 절을 하는 것이 진짜고, 내가 절을 하고 싶지도 않고 바쁜데 ‘이걸 꼭 해야겠다’ 하고 하는 거는 진짜가 아닙니다. 삼십만 번을 해도 진짜가 아닙니다.

목에다 염주를 걸고 다니죠? 이거는 그냥 세상 우주를 짊어지고 다니는 겁니다. 찰나찰나 돌아가는 것을 염주로다가 해 놓은 거거든요. 그리고 백팔 번뇌를 그걸로 비유를 해 놨는데, 그걸 백팔 번뇌라고 하면 안 되죠. 우리가 생각을 하지 못하면 목석이죠? 육체가 없으면 무효죠? 생명이 없어도 무효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 생각 나는 것을 망상이라고만 밀어붙이겠습니까? 생각 생각 나는 것이 바로 나를 성장시키는 재료라고 봐야죠.

팥죽을 끓이는데, 익으려고 그러면 팥죽 방울이 수없이 올라오죠? 그럼 그거를 망상이라고 하겠습니까? 팥죽 방울이 그렇게 많이 올라오는데 말입니다. 팥죽이 익으려고 팥죽 방울이 끓죠? 하하하…. 그러니까 팥죽 솥에 팥죽 방울 일어나듯이 망상이 일어납니다. 그 망상은 망상이 아닙니다. 그거는 바로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재료입니다. 팥죽을 익히기 위해서 팥죽이 끓는 거와 같이 그건 성장력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망상이 아니고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이런 마음이 자꾸 일어나게 하는 것이니까 감사하게 거기다가 일임해서 놔야죠. 그걸 망상이라고 그러면서 온통 백팔배를 하고 천배를 하고 아무리 몸뚱이로 그래 봤자 몸뚱이 떨어지면 입도 떨어지고 입 떨어지면 말도 떨어지는데, 뭐 남는 게 있겠어요? 공덕이 될 거는 하나도 없어요. 달마 대사가 양 무제더러 말했듯이 말이죠.

여러분! 옛날에 누가 묻기에 내가 대답을 그렇게 했지만 말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으로 아촉도 되셨다가 아미타도 되셨다가 관세음도 되셨다가 지장도 되셨다가, 칠성도 됐다가 산신도 됐다가 용신도 됐다가 지신도 됐다가 또는 문수도 됐다가 보현도 됐다가 하면서 이렇게 마음으로다가 하시는데 여러분은 그게 따로따로 있는 줄 알죠? 그럼 여러분 가정에서 한번 알아볼까요? 금방 아버지가 됐다가 금방 남편이 됐다가 금방 할아버지가 됐다가 금방 형님이 됐다가 금방 아우가 됐다가 금방 사위가 됐다가…. 하! 이렇게 하고 돌아가는 건 어떡합니까? 허허허…. 아니, 그렇게 이름이 많지 않습니까? 가지각색의 이름이 그렇게 많고, 행하는 게 그렇게 많고, 가고 오는 게 그렇게 많아도 가고 옴이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진주의 여러분이 이 도리를 확실히 아셨으면 합니다. 저 부산에서나 울산에서나 마산에서나 또는 광주에서나 대구에서나 눈이 그냥 샛별같이 청정하게 지금 공부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부하시는 것이 바로, 아래로는 썩은 뿌리를 끊어 주고 새 뿌리를 나게 하는 것이요, 위로는 이파리와 가지를 싱싱하게 만드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전부 고마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내 육신을 낳아서 키워서 보낸 그 은혜도 이 도리를 공부하면 다 갚게 됩니다. 지수화풍의 은혜도 둘이 아닌 까닭에, 전체가 둘이 아닌 까닭에 갚았다 안 갚았다도 없이 그냥 갚아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업보가 무너지고 유전성이 무너지고 영계성이 무너지고 세균성이 무너지고 이렇게 되니까, 그렇게 모진 병고에 휘달리지도 않을 겁니다.

현명하게 사십시오. 아주 현명하게 말입니다.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고 실험하고 체험하면서, 이렇게 해도 그건 아주 빠르게 돌아갑니다. 여러분이 편리하게 사시도록 하는 방법을 부처님께서 49년을 설해서 가르치셨다고 봅니다. 그런데 삼천 년 전에만 부처님이 계신 게 아니라 여러분이 계시는 까닭에 부처님은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풀 한 포기만 살았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계신 겁니다. 그러니 또 질문 있으면 하세요.

 

질문자2(여) 스님께서는 항상 모든 것을 주인공에게 맡기고 돌려서 생각을 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제 자신 스스로가 깨달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게 잘 안됩니다. 이렇게 큰스님을 뵈었을 때 주인공에게 되돌려서 생각하는, 맡기고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 도움을 받았으면 합니다.

큰스님 이거 보세요. 깨닫는다는 말조차도, 이름조차도 생각하지 마세요. 깨닫는다 하면 깨닫지 못하는 게 뒤따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합니다. 아시겠어요? 또 내 마음 자체가 전부 용광로라고만 생각하세요. 재생돼서 자동적으로 나가게 하려면 용광로에다 모든 거를 맡겨 놔야 스스로 녹아서 그냥 재생이 돼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불바퀴요, 용광로요, 바로 자가발전소입니다. 자가발전소도 되고 용광로도 되고 바로 불바퀴도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의심치 말고 거기다 맡겨 놓고 잘 지켜보십시오. 그러면 그 도리를 알게 될 겁니다.

‘난 깨달아야겠다!’ 이러고 안간힘을 쓰면 더 깨달아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깨닫는다 안 깨닫는다 그것이 없이 그대로 내가 있기 때문에 내 주인공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러니 안 되는 것도 되는 것도 그 모두가 주인공에서 하는 것이니 마음으로 잘 굴려서 거기 맡겨 놓으세요. 이런 게 있죠. 하인을 뒀다 하더라도 “너 이렇게 이렇게 심부름을 해 가지고 오너라!” 이렇게 해야 해 가지고 오지 “너 알아서 해라!” 이러면 어떻게 심부름을 합니까? 아, 생각해 보세요, 글쎄! 비유를 해서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주인공, 해 주시오!’ 해도 안 됩니다. 둘로 되기 때문에요. ‘네 몸뚱이 네가 건강하게 해서 끌고 가야 네 심부름을 하잖아?’ 하든지 ‘너한테서 나온 거니까 네가 해결을 해야잖아!’ 하고 어떤 용도든지 그렇게 나가야지, ‘주인공, 이거를 해 주시오!’ 이런다면 관세음보살을 바깥으로 찾는 거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둘로 보지 말고 꼭 그렇게 하세요. 질문하실 것 또 없습니까?

 

질문자3(남) 큰스님 말씀에, 되지도 않는 질문도 하면 되는 법이 있다 해서 제가….

큰스님 하하하…. 그래요!

질문자3(남) 저희 중생들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시행착오가 있고 또 실수가 있는 법인데, 제가 꼭 여쭈어 볼 것은, 깨달은 분은 실수가 있는지요, 없는지요? 그것을 꼭 답변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아무리 실수가 많아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마음이라는 건 체가 없는 겁니다. 지금 시공이 없이 돌아가고, 즉 말하자면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듯 돌아가는 겁니다. 그게 한창 돌아갈 때는 보이지도 않죠? 프로펠러가 보이지 않죠? 지금 돌아가긴 돌아가는데 보이지 않는 겁니다. 우리 돌아가는 게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딱 걸렸을 때에 내 마음이 걸린 거지 그 프로펠러가 걸린 게 아니죠? 그러니 실수를 해서 마음에 걸렸다 하더라도 마음을 빨리 돌려서 ‘어! 이렇게 안 돌아가게 한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돌아가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거기다 딱 놨을 때에 제창 그냥 다시 돌아가는 거죠. 다시가 아니라 마음에 걸렸던 게 풀어지면서 그냥 돌아가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빨리 바꿔 놓는 것이 활궁공법이에요. 그래서 지혜 있게 돌아가게 하는 것은 바로 수레공법이라고 하죠. 또 가만히 있으면 부처다 하는 건 평등공법이죠. 하하하…. 이 모두를 여러분 자체가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다 할 수 있는데 지금 먹어 보지를 못해서 맛도 모르고, 어떻게 해 먹는 것도 모르고, 어떻게 생긴 것도 못 보고 그랬으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뜻은 기복이 아니고, 모두 각자 자기네들이 자기네들을 깨달아서, 즉 말하자면 어린애를 낳아서 키워서 사회에 내보내고 자유스럽게 살라 하는 걸 가르쳐 준 거와 같습니다. 나를 깨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갓 나온 어린애와 같은 거니까요. 두 번째, 깨치는 거는 둘이 아닌 까닭을 알아야만 되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둘이 아니게 나투는 까닭을 알아야 구경경지에 이르러 열반계로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4(여) 그럼 답답한 마음도 용광로에 놔야 됩니까?

큰스님 그렇죠! 답답한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서 물리가 터지고 거기서 알아야만 되는 거지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길을 가다가도 엎드러지면 길을 딛고 일어나야지 딴 데다가, 허공을 허우적거려서 답답한 걸 호소를 할 겁니까? 그러니까 답답한 것이 나온 자리에다 되놓고 ‘답답한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답답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도 거기 아니야?’ 하고 거기다 맡겨 놓으면 가고 오는지도 모르게 해결이 나는 겁니다. 물질로써 하는 게 아니니까 참 그게…. 그러니까 묘법이라고 하는 거죠. 여러분이 자유스럽게 살려면 이 도리를 꼭 아셔야 합니다. 그냥 갈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럼 또 누가 질문하시겠습니까?

 

질문자5(남) 멀리서 왔습니다. 오늘 꼭 한 가지를 여쭤 볼까 하고요. 놓는 것이 공부하는 방법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만 잘 놓는 건지요? 그리고 금강경도 읽고 싶고 육조단경도 읽고 싶고…, 지금 법어집이 여러 가지로 많습니다. 스님 법어집은 몇 번 읽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안 되는지요?

큰스님 책을 읽더라도 책이 선생님을 보지 않고 선생님이 책을 보지 않는다면, 그 글자와 백지를 같이 보는 게 돼서 보지 않고도 볼 수 있는 거죠. 그러나 선생님이 책을 본다 하고 보고, 또는 책이 선생님을 본다면 그거는 안 되는 법이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기 걸어오실 때에 한 발 딛고 한 발 놓고, 한 발 딛고 한 발 놓고 그러고 올라오셨지 걸머지고 오셨습니까? 네?

질문자5(남) 아니지요. 그러면 그걸 읽어도 마음에 간직하지 말고 다 놓으라 이런 말입니까?

큰스님 놓고, 이 몸뚱이가 텔레비전이라면 텔레비전 속에 들어 있는 그 화면을 나오게 하는 근본이 바로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마음 하자는 대로 육체는 하거든요. 그런 거와 같이 모든 거를 거기다가 맡겨 놓고 ‘너만이 나를 보게 하기도 하고 듣게 하기도 하고, 가게 하기도 하고 오게 하기도 하고, 싸우게도 하고 화나게도 하고 이러는 거니까 네가 다 하는 거다!’ 하고선 보는 겁니다. 말로만 그렇게 해선 또 안 됩니다. 진짜로 안 되는 것도 되는 것도 바로 그놈이 하는 거라고 생각을 할 때에 믿음이 갑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거기다 놓으시고 한번 체험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 얘기할 거는, 여기에서 일요일마다 비디오 법회가 있을 겁니다. 그거를 열심히 들으시고 책도 보시고 차에 카세트테이프도 넣고 다니시면서 들으시고 이렇게 열심히 하세요. 몸 떨어지면 공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 몸 떨어지기 전에 공부들 열심히 하십시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2년 11월 29일 진주지원 개원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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