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여름 아침, 불보종찰 양산 통도사의 유명한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를 스님과 함께 걸었다.

붉은 빛을 띠며 하늘로 쭉 뻗은 금강송들이 뿜어내는 입김은 아침 공기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3년만의 ‘경행’(徑行)이다.

3년 전, 우린 유학생이었다. 공부가 잘 되지 않을 때면, 향수병에 사로잡힐 때면 함께 살던 집 근처 메이지 신궁(明治神宮)의 잘 가꾸어진 도심 속 정원을 자주 걸었다. 우린 그것을 경행이라 불렀다.

메이지 왕을 신으로 기리는 메이지 신궁은 도쿄 도심 한가운데 70만평에 달하는 광대한 토지에 전국에서 헌공한 나무들로 가득 채워 조성하여서 도심 한가운데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끼 낀 아름드리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스님, 메이지 왕은 신으로 다시 태어났을까요? 스님께서는 윤회를 당연히 믿으시겠지요?”

스님은 웃으셨다. 답은 상관없었다. 도심 속에서 느끼는 숲속 정취가 좋아 우린 그저 걸었다.

“정 선생님, 위를 한번 올려다보세요. 저 하늘로 뻗은 나뭇가지와 거기서 자라난 잎사귀들은 옆 나뭇가지의 크기에 맞춰서 일정한 간격을 비워두고는 서로의 영역을 정확하게 지키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가요? 절대 더 자라거나 작게 자라지도 않으면서, 서로 눈이 있어 본 것도 아닐 텐데 옆 나뭇가지가 튀어나오면 그 옆 나무는 들어가 주고…. 그러면서 남의 영역을 절대 침범하지 않습니다. 보세요, 경계선이 명확히 지켜지고 있잖아요?”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랬다. 그때까지 관심을 갖지 않아서 몰랐지만, 아케이드처럼 길을 뒤덮은 나무들은 신기하게도 옆 나무의 나뭇가지와 잎이 자라난 모양에 퍼즐 맞추듯이 더 넓지도 더 좁지도 않은 간격을 놀라우리만치 잘 맞추고 있었다.

“살아오시면서 느낀 적 없던가요? 네모난 행동을 했다면 반드시 언젠가는 그 네모난 행동을 받아들일 네모난 자리가 기다리고 있음을요.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이러한 정확한 인과(因果) 법칙에 대한 선언이잖아요. 행복도 불행도 내 행위에 의한 결과일 뿐, 행위와 결과 사이에 우연이니, 신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을 개입시키지 않았지요. 결국 중생들의 세간(世間)이란, 마치 누에가 자기 몸에서 뽑은 실로 고치를 만들 듯 스스로의 어리석은 마음에 의해 저지른 행위가 쌓아올린 세상일 뿐이지요.

윤회라…. 아직 죽지 않아 다음 생을 모르겠고 1년 전 일도 가물가물할 때가 많아 전생의 기억은 더더욱 없어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거 하나만 생각합니다. 내 지금의 행동은 저 나무들이 자라나는 것처럼 반드시 언제 어딘가에 영향을 끼칠 거라고…. 그러니 지금의 나도 어제의 결과물이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결과물이겠지요. 어제오늘 그리고 내일이, 전생·이생·내생이 이렇게 이어져 하나일 뿐이니 저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려 할 뿐입니다….”

3년 만에 만나 무풍한송로를 걸으며 그래서 나는 스님과 다시 윤회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윤회에 대한 ‘믿음’ 이 아닌, 스님은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시고 계실 뿐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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