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세상과의 소통 22

선진국에 뒤처진 의식수준
명상을 하면 의식이 명료해지고 가벼우며 유쾌한 느낌이 든다.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에 대한 집착이나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망이 감소한다. 이처럼 명상은 우리의 주의가 외부로 흐르는 것을 막고, 마음이 들뜨는 것을 잠재우며, 망상적 집중을 막아준다. 그 결과 에고가 점차 정화되어 순수한 존재의 장을 만날 수 있다. 필자가 경험한 명상의 효과이다.

여기서 의식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마음의 영적요소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 나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영혼 의식이 있다. 나의 영혼은 자신의 지배적인 의식 상태에 따라 환경에 적응하는데, ‘참 나’를 각성하고 있을 수도 있고, 다소 장애가 있거나 흐릿할 수도 있으며, 혼란에 빠져있거나 무의식적으로 근본적 자연과 동일시되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 있다고 말하면서도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데는 주저하고 있다. 그건 바로 우리의 의식이 아직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필자는 쓰레기 버리기라는 일과 질서 지키기는 일에 불편을 겪을 때가 있다. 필자가 사는 집 앞 골목입구가 삼거리인데, 언제부터인가 그곳이 쓰레기 버리는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주민센터에 이야기했더니 “경고-쓰레기 무단투기 및 불법소각하지 맙시다! 적발 시 폐기물 관리법 제68조에 따라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00 읍장”이라고 팻말을 꽂아 두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쓰레기는 버려졌다. 필자는 그 팻말의 경고를 지키기 위해 다른 먼 곳에 있는 쓰레기 분리통에 버린다. 그리고 삼거리에 쓰레기가 차면 한두 달에 한 번씩 주민센터에 알려 치우도록 한다. 그런데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쓰레기 투기가 이루어지는 것을 미뤄볼 때 벌금을 받는 것 같지도 않다. 법이 집행되지 않을 뿐더러 쓰레기 투기 행위도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쓰레기를 치울 때까지 매일 냄새와 흉한 꼴을 보아야 하는 일이다.

경제적 선진국 대열 들었지만
국민 의식수준 낮은 대한민국
‘함께’보다 ‘나’ 먼저 생각해
명상 통한 의식 확장이 필요

다른 하나는 타지에 사는 자식들에게 김치를 보내려고 우체국에 갔을 때의 일이다. 조금 이른 시각이라 김치박스를 문 앞에 놓고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안에서 문을 열었고 들어가려고 하자 뒤늦게 온 사람이 재빨리 먼저 들어갔다.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어서 속으로 ‘오래 기다린 사람도 있는데 먼저 들어가다니 참’이라 생각하고 불편해했으나 들어갔을 때는 이미 그 사람은 번호표를 받아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나간 일이라 그냥 보기만 했지만 이런 일은 어느 곳에서나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일로 다투기만 한다면 곳곳에서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30여 년 전의 일을 떠올려 본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필자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 지금도 나의 삶의 이정표가 되고 있어서 이 기회에 함께 나누고자 한다. 하나는 일본에 가서 5년간 공무원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한 교육공무원의 이야기다. 일본에 갈 때 데리고 간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5학년이 되어 한국에 오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울면서 아버지에게 “아빠, 전 이 학교에 못 다니겠어요. 일본에 다니던 학교로 가고 싶어요”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자 “오늘 학교 체육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에 있는 수돗가로 가는데 모두가 먼저 씻으려고 달려가는 바람에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어요”라고 하지 않는가! 이 자녀의 말로는 일본에서는 그렇게 달려가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캐나다에 갔을 때 본 자동차 운전자들의 운전 태도이다. 모든 자동차들은 보행자가 안전하게 다니도록 천천히 달린다. 특히 건널목에서는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멈추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이런 일은 산간을 달리는 차들도 마찬가지다. 길을 걷고 있는 사슴들을 보자 그들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기회만 있으면 경쟁하듯 먼저 가고자 하는 우리 국민들을 생각할 때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위의 두 사례를 보면 우리 국민들의 전반적인 의식수준이 어떠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이 선진국과 우리나라는 의식수준이 다르다. 부끄럽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내가 우선이라는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다. 그러나 선진국은 나보다 남, 함께라는 공동체의식이 더 깊게 배어있다. 공동체의식은 나만 보며 살다가 남도 함께 살고 있다는 의식으로 확장되면서 일어난다.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무수히 관계갈등을 겪게 되는데, 이는 경계를 짓기 때문에 일어난다. 경계는 나와 남이라는 구분의식에서 생겨난다. 경계는 의식을 확장함으로써 해결된다. 의식의 확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성이다. 자기감정에 정직해야 한다. 감정은 경험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정직하지 않으면 부정직한 감정이 무의식으로 남게 되어 다음에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될 경우 영향을 미쳐 부정직이 더욱 증폭된다. 특히 지도자로 활동하는 사람은 의식이 확장되어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작은 일에도 자신의 잘잘못을 알아차리고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기심과 이타심이 삶의 방향을 갈라놓는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 혼자만 잘 살 것인가? 함께 잘 살 것인가?

의식을 결정짓는 3요소
이러한 인간의 의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인자가 ‘3Guna’이다. 인간은 자연계에 널리 퍼져 있는 의식의 세 가지 속성인 sattva, rajas, tamas라는 세 가지 기질을 갖고 태어난다. 이는 우주의 5대 원소인 에테르, 공기, 불, 물, 흙으로 구성되어 있다. sattva는 질서, 순수함, 빛나는 것을 나타내는 속성으로서, 인간의 맑고 밝은 의식으로 영성과 가깝다. 개인보다 더 큰 세상의 평화를 위하는 마음이다. rajas는 활동과 변형의 속성으로서 끊임없이 목적을 향해 성취하고자 하는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욕망을 향해 잠시라도 쉬지 않는다. 세상보다는 오로지 자기 개인의 안위나 만족을 위하는 마음이다. tamas는 무거움과 관성, 타성을 나타내는 속성으로서 나태하고 게으르나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간다. 이러한 3guna는 한 개인에게 속해있는 기질적 속성으로서 한 인간의 삶을 이끌어가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그 영혼은 온전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그것은 그대로 자신의 영혼에 저장된다. 즉 우리가 몸을 가지고 하는 모든 일은 우리의 영혼에 각인된다. 이 흔적들은 기억, 선호, 기질, 습관의 형태로 표현된다. 우리가 행한 삶의 경험들이 영혼에 각인되었을 때, 그 경험이 어떠하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 만일 그 동안의 경험이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했다면 우리는 잘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열심히 잘 살려고 했으나 고단하고 힘들었다면 비록 의식하지는 못했으나 습관적으로 잘못된 경험을 쌓아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이 영혼에 인상을 남긴다는 의식을 가질 때 우리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보다 높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주의를 보낼 때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나보다는 세상을 위한 사랑과 봉사라는 영혼의 본성을 경험하지 못하는 까닭은 혼란한 생각과 감정의 변화로 인해 영혼의식이 왜곡되고 제한되어 지성이 흐려져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본성인 순수의식은 변함없는 상태로 남아있지만 마음의 작용이나 감정적인 상태에 깊이 빠짐으로 인해 그 본성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존재의 본질이 분명하게 이해되고 경험될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이나 감각, 감정, 그리고 심리적 작용으로부터 주의를 회수함으로써 생각과 감정을 가라앉히고 깨어있게 하여 우리의 자아의식을 영혼의식으로 이동해야 한다. 영혼의식은 정신적, 감정적 상태를 넘어선 명료하고 고요한 의식의 상태이다.

이러한 영혼의식은 명상을 통해 영적인 힘을 배양할 때 가능하다. 자신에게 영혼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역할에서 초연해진다. 내가 평화로운 영혼임을 이해하면 다른 사람도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고귀한 영혼의 존재로 보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들이 화낼 때조차도 수용한다. 영혼의식 속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생겨나고, 영혼의식은 나로 하여금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게 지낼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내가 몸 안에 살아 있는 영혼임을 의식하게 되면 내 생각의 질이 크게 달라진다.

쓰레기 버리는 사람들이나 빨리 일을 처리하겠다고 질서를 어기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나라고 하는 개인의 이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지난날의 어두웠던 시절의 불행에 집착하여 현실의 막중한 과제를 놓쳐버리고 있는 국가의 지도자들은 국가라는 더 큰 일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안위에 치중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영혼의식이 사트바보다 라자스에 더 편향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으로 살아가는 한 선진국으로 가기는 어렵다. 명상을 통한 의식 확장만이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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