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지도 않고 속지도 않는다. 드러내지도 않고 숨기지도 않는다.

비어 있으나 가득하고 가득하나 비어 있다. 지음이 없으나 작용(作用)이 있고 작용이 있으나 머묾이 없다. 보고 듣고 오고 가는 것이 오고 가고 보고 듣는 것일 뿐 더함도 덜함도 없다. 하나를 보여도 열을 보이는 것이요 열을 보여도 하나를 감추지 않는다. 빛과 어둠이 둘이 아닌 하나이나 그 하나에도 머물지 않는다. 진리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다. 숨어있는 게 아니라 드러나 있다. 물처럼 공기처럼 내 곁에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행복을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분주하게 헤맬 뿐 마음을 크게 열지 않는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길 바라면서도 진정한 자유인이 되길 바라면서도 집착이라는 병(病), 습관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

있는 대로 행복하고 없으면 자유롭다

순수와 진솔함으로 삶의 주인공이 된다

날마다 좋은 날의 진정한 자유인은 졸리면 잠을 자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자연 그대로의 사람다운 사람이다. 부처는 신(神)이 아닌 참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열린 마음이면 이르는 곳마다 정토(淨土)이다.

이글은 몇 년 전에 펴낸 선문답(禪問答)의 여는 글이다.

흔히들 깨달은 사람의 삶은 어떠한 것인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아 답변으로 옮겨온 글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다. 깨달은 사람, 부처는 참사람의 완성을 의미한다.

하여, 진리와 한 몸을 이룬 깨달은 사람은 생각의 윤회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오고 가고 있고 없고 높고 낮음 등에 차별을 두거나 끄달리지 않는다.

있으면 있는 대로 행복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유롭다. 꾸밈이 없고 조작하지 않으며 순수와 진솔함으로 자연스런 삶의 주인공이 된다.

지나간 어제에 집착하거나 미련두지 않고 다가올 내일을 기대하거나 쌓아둠으로 맞지 않는다. 어제도 내일도 없는 오로지 오늘의 주인공으로 넘치거나 부족함 없이 평화와 행복, 자유인으로 얽매임 없이 살아간다.

모으거나 쌓아둠 없이 비우고 버리며 나누는 기쁨으로 발길 닿는 곳이 정토이다. 변두리도 없다. 모서리도 없다. 임제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처럼 내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요 만나는 사람이 모두 부처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커다란 교과서요 만나는 사람은 좋은 스승이다. 선지식이란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이요 착한 벗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이 둘이 아닌 하나이나 그 하나에도 머묾이 없는 머묾이 선지식의 삶인 까닭이다.

본래 동, 서, 남, 북은 없는 것이다.

나는 어느 곳에 서 있어도 세상의 중앙이요 이르는 곳이 극락세계의 평화와 행복, 자유 누리는 오늘의 주인공인 것이다.

관세음보살과 문수와 보현이 나뉘어 셋일 뿐 셋이 아닌 하나요 보신(報身)화신(化身) 법신(法身)이 셋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 하여, 하나를 보여도 열을 보이는 것이요 열을 보여도 하나를 감추지 않는 것이다.

드러낼 일도, 감출 일도 없이 목마르면 물마시고 졸리 우면 잠을 자는 자연인으로 살 일이다.

업(業)은 습관이다. 습관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모으고 쌓아두려는 속물근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는 수행자가 아닌 업덩이 중생일 따름이다.

입으로 짓는 것만이 구업(口業)이 아니다. 눈은 보는 입이요 귀는 듣는 입이다. 코는 냄새 맡는 입이요 배꼽 밑의 두 개의 생식기관은 배설하는 입이다.

손짓과 발짓, 몸짓으로 뜻을 나타내는 시늉도 또 하나의 입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열린 안목으로 열린 자세로 간절심으로 마음 모아 깨달음을 이루어야 진정한 의미의 참사람,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집착과 의혹, 얽매임에서 천지개벽하듯 참사람에 이르게 되면 평화롭다. 편안하다. 행복하다. 자유인이다.

거짓으로 솔직하지 않는 꾸미는 만족은 윤회를 거듭할 뿐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행복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유로운 수행의 완성은 구호나 연습으로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누가 무엇을 물어도 망설이거나 머뭇거림 없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인, 자유인으로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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