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미타암 주지 명천 스님

비구 스님이 바느질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님은 가사불사에 매진하는 비구 스님도 있어야 한다는 원력하나로 주변의 시선을 극복해왔다. 고려시대 가사를 복원해 지은 가사를 배경으로 미소 짓는 스님의 표정에서 한땀 한땀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불화·가사 편수의 대가

2009년 불교미술대전 대상

가사연구 25년 외길 걸어

1가사에 100일 공력 다해

“가사는 복짓는 밭입니다”
 

은사 스님 보은이 원동력

1978년 성수 스님 인연

“살아있는 부처 그려보라”

전통가마 ‘금어연’ 제작

가마연 통한 불교문화 알려
 

그림을 배운 적이 없었으나 그림을 그렸다. 바느질을 배운 적이 없었으나 가사(袈裟)를 지었다. 음식을 정식으로 배운 적 없지만 산에서 나는 재료로 뚝딱 요리를 만들어 냈다. 불모(佛母)이자 가사원의 편수(片手, 불사의 책임자), 그리고 연(輦, 사찰에서 불상을 옮길 때 쓰는 가마) 제작 총책임자이기도 하다. 경남 양산 미타암 주지 명천 스님의 이야기이다.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여러 미술 분야에서 각 사찰의 주지 스님들은 자문이 필요하면 명천 스님을 찾는다.

10월 16일 통도사 말사 미타암에서 만난 명천 스님은 바느질 이야기를 꺼내자 “바느질 하는 비구라는 이미지는 여전히 쑥스럽다”며 빙긋 웃었다. 어떻게 불교문화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됐냐는 질문에 스님은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라며 단순하게 답을 했다.

“학교에서 정기적인 미술 시간 외 예술 공부를 따로 한 적은 없었다”는 말에 타고난 재능을 가진 천재는 이런 것 일까?란 생각마저 들었다. 2009년 불교미술대전에서 명천 스님은 ‘복전의’(가사의 또 다른 말)로 대상을 받고 각종 전시와 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전통불교문화 복원에 스님의 손길이 들어가면 일단 신뢰를 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타고난 미적 감각과 더불어 스님의 꼼꼼한 정성이 깃들어 탄생한 작품이 입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스님은 불교 외 다른 주제는 관심이 생기지도 눈길도 안 간다고 했다. 불교가 너무 좋아 16살 때부터 행자 생활을 했던 스님이었다. 오랫동안 시봉했던 성수 스님(조계종 전계대화상, 1923년~2012년)의 한마디 “살아 있는 부처를 그리면 내가 업어주지”를 마음속에 품고 부처를 향한 구도의 길을 오늘도 뚜벅 뚜벅 걸어 갈 뿐이라고 했다.

2009년 불교미술대전 대상 작품.

부처님 향한 정성, 작품 원동력!

양산 미타암 다실에 불자들이 방문했다. 양산시 고위 공무원 부인들로 부처님께 기도 하고 명천 스님께 인사하기 위해서였다. 가사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가져온 작품을 펼쳐 보이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부인들은 손으로 가사를 만져보며 손수 바느질한 정성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비구 스님이 가사 불사를 진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님은 가사에 대한 전통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꼈다. 비구 스님이 바느질을 하는 것이 좋은 모양이 아니었지만 수행의 일환으로 삼았다. 가사는 스님들의 의복이고 법복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행의 일환이었습니다. 참선을 해서 득도를 해 중생구제를 하던지, 경전을 보고 설법교화를 한다던지와 동떨어 졌지만 이 분야는 누가해도 돼야 하기 때문에 마음을 굳세게 가졌습니다.”

시작은 했으니 해야 한다는 마음 뿐이었다.

“가사를 또 다른 말로 ‘복전의(福田衣)’라고 합니다. 복 밭이란 의미이지요. 밭에 물길이 난 모양처럼 생겼기도 했지만 숨은 의미는 중생을 위해 부처님의 법을 전해 자신과 듣는 이가 함께 복을 받는 것을 의미하죠. 천과 천을 연결하기 위해 또 다른 천을 덧대고 바느질을 합니다. 덧댄 천이 마치 밭고랑처럼 보이는데 그 연결 부위 안에는 물길이 지나가듯 구멍이 연결되어 통과 될 수 있도록 돼야 합니다. 막힌 부분이 있으면 파가사라고 해서 버리지요.”

처음부터 잘 될 리가 없었다. 수차례 손을 찌르고, 피가 나고, 화도 났다. 하지만 스님은 수행이라 생각하고 가사 불사를 진행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가사를 뒤집어 보니 바느질 선이 보이는 곳과 안 보이는 곳이 철저하게 나눠져 있었다. 바느질 선은 곧고 깨끗했다. 가사 가장 자리에는 실로 만든 작은 매듭이 오돌토돌 만져졌다.

“세발상침이라고도 하고 개미처럼 작은 매듭이라서 개미상침이라고도 부릅니다. 가사 가장 자리를 만져보면 손으로 미세하게 느낄 수가 있는데 연꽃 봉오리를 상징하고 가사를 장엄하는 것입니다.”

가사 하나를 짓는데 며칠 정도 걸리느냐는 질문에 “아무것도 안하고 가사 불사에만 집중하면 보통 100일 즈음 걸린다”고 답했다. 왜 가사를 짓기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전통을 후대에 전하고 싶어서”라고 답했지만 “좋아서…그 외엔 이유가 없어요”라고 들렸다.

“전통 가사원을 현재 조계종에서 운영합니다. 그 전에는 손으로 지었죠. 가사에 대해 알아보고 연구를 한지 25년이 지났네요. 우리나라는 전란으로 전통 유물을 잃기도 했지만 스님은 입적을 하면 다비를 합니다. 일반 사가에서는 수의를 제작해 입지만 스님들은 옷이 귀했어요. 그래서 평소 입었던 옷과 가사를 깨끗하게 빨아 평소 입던 그 옷을 입고 다비를 했습니다. 그러니 전통 가사를 연구하려해도 자료가 부족하죠.”

전국 곳곳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가사 편수인 비구 스님을 만나 공부했다. 외국 가사와 조계종 외 타 종단 가사도 받아 연구하며 문헌을 연구 대조했다.

통도사 가사원서 지도하는 명천 스님.

“통도사에서 가사 불사 할 때 스님을 뵌 적이 있다”며 “재가자들이 오조가사를 만들 때 가사원 편수를 하셨는데 그 때 재가자들이 가사에 대해 이해하고 불법승 삼보를 수호 하고자는 마음이 크더라”고 말하자 “가사는 그 자체로 불법이다”고 말을 이었다.

“전통 가사를 보면 경전 말씀이 적혀 있고 월광보살님과 일광보살님에 얽힌 이야기도 있지요. 의미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그 자체로 법문입니다. 어른 스님들의 당부와 마음가짐 그리고 몸 가짐, 신장 수호의 역할까지 가사가 하는 역할은 큽니다. 어려운 법문이 아니어도 그 깊은 의미를 전달하면 일반인부터 재가자 까지 그 정성에 깊이 감동하고 불교의 아름다움에 빠지는 거죠.”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컴퓨터는 아예 할 줄 몰라요. 하지만 현대인의 고질병인 거북목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어요. 어깨 통증은 만성이죠(웃음)”

2013년 8월 제작된 범어사 금어연.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며 제작된 가마이다.

스승에 대한 보은(報恩), 연(輦) 제작 까지

2013년 8월 범어사에서 특별한 고불식이 진행됐다.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며 제작된 가마, 금어연(金魚輦) 고불식으로 조선시대 전통방식을 고증해 제작 된 연을 기념한 행사다. 100여 년 전 고종 때 임금을 위한 연이 제작 된 후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연은 일반적으로 왕과 왕비가 사용 했지만 사찰에선 불상과 경전 그리고 위패, 가사 등을 이운 할 때 사용된다. 30여명의 문화재급 명장들이 참여했으며 총 3억 원이 투자 된 금어연 제작 총 책임자가 바로 명천 스님이었다.

이후 금어연은 정전 60주년 한반도 평화대회와 범어사 칠성도 이운식 등 다채롭게 활용되며 범어사 행사를 장엄했다.

“각 사찰에 찾아보면 아마 한두 개 즘 연이 있을 겁니다. 불상과 사리를 이운할 때 종종 사용했었는데 요즘은 사용을 못하고 있어요.

그 때 당시 범어사 주지였던 수불 스님이 제작을 요청하셨고 불교문화 중흥을 위해 흔쾌히 지원하셨습니다. 평생 그렇게 만들어 볼 기회가 없었어요. 마음을 다해 준비 할 수 있었죠. 지금은 통도사에서 통도연을 제작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습니다. 아직 시작은 안했지만 구상 중에 있어요.”

가마 연을 처음 제작한 시기와 계기를 물었다. 스님은 “성수 스님에 대한 ‘보은(報恩)’이 본격적인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처음엔 소소하게 두어 개 만들었지만 시봉했던 성수 스님이 입적 하실 때 상여를 직접 만들어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금어연도 만들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성수 스님은 2012년도에 열반 하셨는데 그 전에 스님을 따로 모시고 살았거든요. 은혜도 입고 영향도 많이 받아 스승으로 모셨죠. 무엇으로 은혜를 갚아야 할 까 생각을 했는데 상여는 내가 만들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입적 3개월 전부터 도안도 그리고 나무도 사놓고 매듭도 틈틈이 만들었어요. 거의 완성 될 때 즘 입적하셔서 온 힘을 다해 마무리 했죠. 상여와 위패를 모시는 연 까지 총 3개를 만들었습니다.”

성수 스님에 대한 인연을 묻자 출가 전 부터 맺었던 인연이라고 설명했다.

명천 스님은 1978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성수 스님을 처음 만났다.

“성수 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출가를 하고 싶다고 하자 학교를 졸업하고 와도 늦지 않다 시더군요. 제가 경북 의성이 고향인데 당시 성수 스님이 주지로 계셨던 고은사와 100리 정도 떨어져 있었어요. 그 후 참지 못하고 부모님께 통보 하듯 말씀을 드리고 고향에 있던 대곡사 고찰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불교가 너무 좋았거든요.”

이후 스님은 군대 복무 후 정식 수계 절차를 밟아 통도사를 본사로 출가했다.

“학교 졸업하기 전에는 교복을 입고 주말과 방학이면 성수 스님을 찾아가 법을 듣곤 했습니다. 1987년 수계를 받은 후 공부를 하다 선방에 들어가기 전 성수 스님이 계신 곳을 찾아 갔어요. 그 때 당시 천막으로 지어진 토굴에서 지내셨는데 물도 새고 환경이 열악하더군요. 이런 곳에서 혼자 어찌 지내실 까 걱정을 하며 ‘해제 후 찾아뵙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했죠. 돌아서 정확히 세발자국 걸어 나왔는데 큰 스님이 ‘자네가 함께 있음 도움이 되지’라고 하시더군요. 어른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어찌 가겠습니까? 그 때부터 스님을 시봉했습니다.”

1990년 경 성수 스님을 토굴에서 3년 동안 시봉하고 이후 함양 황대선원으로 자리를 옮겨 2002년 까지 30~40여명을 위한 대중공양도 마련했다.

“성수 스님께서 토굴에 계실 때 시장 안보고 살아보자라고 하셨어요. 그 후 근처에서 나는 모든 것은 음식 재료로 사용할 정도였죠. 한번은 성수 스님께서 염소가 밤나무 잎을 먹는다며 이걸로 음식을 해보라 하셨는데 순간 놀랬지만 다른 야채랑 모아 물김치를 만들었어요. 생각보다 쌉쌀한 맛이 나더군요. 질긴 미나리도 먼지처럼 잘라서 전을 해 먹고 머위 꽃대도, 진달래꽃, 민들레 꽃 모두 음식 재료가 됐습니다”

어른 스님의 한마디 말씀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음식을 제대로 배워 본적 없는 스님께 큰 공부이자 도전이 됐다. 스님은 이후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서 실시한 전국사찰음식실태조사 때 30여 가지의 사찰 음식을 선보일 정도로 대가가 되어 있었다.

“정성을 다했어요. 그것만이 비결이에요. 주어진 환경에서 원칙을 지키고 최선을 다한 것이 좋은 결과를 내 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수 스님께선 국수를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저녁 공양은 언제나 국수였죠. 아침은 죽 점심은 밥 그리고 저녁은 국수였고 자주 법문을 가시는 큰 스님을 위해 도시락을 준비해 드렸어요. 그 순간들이 모여 이룬 결과라 생각합니다.”

통도사 가사원에서 가사불사 봉사자들과 함께한 사진. 가사불사는 대부분 여성불자의 몫이었다.

 

불교문화 통한 포교 앞장

美서 ‘고려전’ 전시도 진행

1000여 미국시민 몰려 ‘화제’

문화 통한 포교 가능성 확인

“승가교육에 불교문화 필요해”

불교문화 위한 전문 승가 과정 필요해

“2002년, 2004년 그리고 2007년 총 3번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박물관에서 청암사 설민 스님과 함께 한국불교문화를 알리는 전시에 참여했습니다. 12년을 기획하고 6개월간 열리는 전시로 고려전이 주제였죠. 함께 했던 설민 스님은 6m 높이 관음도를 제작하고 점안식을 했어요. 그 때 집계로 천명이 넘는 시민이 왔었습니다. 전 삼국유사 향가를 소개하고 반야심경을 한글과 영어 그리고 한문으로 각각 안내했습니다. 문화의 저력을 체험한 시간이기도 했죠.”

명천 스님은 불교문화 양성을 위해 승가 교육에 불교문화 전문 과정이 필요하다 강조했다.

스님은 “옛 부터 불교에서는 글을 모르는 일반 중생을 위해 벽화를 그렸다. 문화는 글과 언어를 뛰어 넘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명천 스님은 어릴 때부터 불교가 너무 좋았다고 했다. 면 소재지에 집이 있어 버스를 환승하는 노스님을 뵙는 날이면 졸졸 따라가 골목길로 가로질러 스님을 다른 길목에 서서 기다리곤 했다고 했다.

“어릴 때 노스님께 인사가 하고 싶은데 뒤를 쫓아가 인사하면 너무 따라간 티가 나잖아요. 그래서 골목길로 뛰어 돌아가 앞에서 우연히 만난 척 하고 노스님들께 인사를 했어요. 너무 좋은 거예요. 너무…….”

사랑하는 만큼 정성을 쏟는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부처님을 향한 그 사랑의 크기만큼 쏟았던 정성이 명천 스님을 대가라 부르게 만들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다.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 이룬 결과였다.

명천 스님은?고등학교 1학년 때 경북 의성 대곡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지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성수 스님을 시봉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스님은 전통불교문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사찰음식을 비롯해 공예, 불화, 연 제작 등 다방면에 능력을 발휘했다. 불교미술대전에서 ‘복전의’로 대상을 받았으며 전승공예대전에서 입상하는 등 특별한 능력을 증명했다. 이후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불교미술과를 졸업하고 다양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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