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동국사, 한일 불교학회 추계학술대회서

니이노 카즈노부 교수 주장 

"수운교 진종 대곡파 귀속 실제론 진종 신앙 안해"

군산 동국사(주지 종걸)와 한일불교문화학회(회장 원영상)는 10월21일 군산 동국사 100주면 기념관에서 18회 추계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근대기 일본종교의 한반도 침투와 그 동향’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는 일본불교대학의 권동우교수가 ‘교파신도의 조선포교로 보는 근대신도의 양상’, 니이노 카즈노부 일본 동붕대교수의 ‘15년 전쟁기의 한국종교’, 문혜진 동서대교수가 ‘일제 강점기 경성부 남산의 일본종교침투에 관한 고찰’, 이치노헤 쇼코 운상사 주지가 ‘식민지 시대 사사와 나무’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일제 강점기 조선에 진출한 일본불교 진종 대곡파가 불교뿐 아니라 천도교, 시천교, 보천교 등의 민족종교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일본 동붕대 니이노 카즈노부 교수는 ‘15년 전쟁기의 한국종교- 수운교의 일본 진종대곡파 귀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니이노 교수에 따르면 일제는 ‘사찰령(1911년 발령)’을 통해 공인된 불교사찰이외에 천도교, 시천교, 보천교등 70여개에 이르는 민족종교를 종교유사단체(유사종교)라 칭하며 ‘보안법(1907넌), 경무총감부령 ’집회취체에 관한 건(1910년)으로 엄중단속을 받게되고 ‘동학’의 흐름을 이어받은 ‘수운교’도 엄격한 감시하에 놓이게 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수운교는 1936년 대전경찰서 고등계로부터 ‘교리는 불교에 가까우므로 불교로 개종한다면 인정받을 수 있지만 수운교는 인정할 수 없다’는 해산명령을 받게되자 어쩔 수 없이 1937년 ‘미타교’로 개칭하고 진종 대곡파에 귀속되게 된다.

1937년 3월 16일 교주 이상룡등 13명이 교토 동본원사를 방문해 득도하고 진종대곡파에 귀속하게 되지만 실체 신자들은 형식적으로만 귀속하고 실제로는 진종을 신앙하지 않았다고 니이노 교수는 주장했다. 그 증거로 광복 때까지 수운교 기도나 포교혐의로 징역형이나 감옥에 수감된 사람이 40여명에 이르고 6명이 옥사한 것을 증거로 제시했다.

진종 대곡파는 경성에 조선승려 양성소를 운영하며 조선불교의 일본화에 적극 나서기도 했는데 수운교의 득도자중 8명이 이곳 출신이기도 하다.

진종 대곡파에 귀속된 수운교 흥룡사 휘장. 아미타불의 48대원과 일본천황을 상징하는 거울(야타노카가미)을 표현하고 있다.

진종 대곡파는 수운교를 귀속시키며 ‘진제(부처님 가르침)인 불도와 속제인 황도(천황의 가르침’이라는 두가지를 일원화해 불교와 황도를 종파활동의 근간으로 삼게했다.니이노 교수는 수운교 교주 이상룡이 득도한 흥룡사휘장에 이같은 내용이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8각으로된 이 휘장은 가운데 만자를 중심으로 마미타불 48원을 상징하는 선이 표시되어 있다. 이 휘장은 일본 천황의 3가지 보물중의 하나인 ‘야타노카가미’ 거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런 형태의 휘장은 대곡파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논평에 나선 김방룡 충남대교수는 한국에서 신종교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다는 취지의 발언에 대해 한국에서 활발한 연구와 논문이 발표되고 있어 이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전제하고 사찰령에 의해 수운교가 귀속됐다는 주장역시 전적으로 동의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수운교 귀속에는 일제와 일본 진종 대곡파의 조선불교 탄압과 민족정기 말살정책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운교 실체를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연구사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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