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햐쿠사이지와 이시도지

햐쿠사이지 인왕문의 모습. 문에 걸려 있는 큰 짚신을 만지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한다.

나라와 교토는 명찰이 많아서 소개하고 싶어도 아직 못한, 가 볼만한 사찰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이 사찰들을 소개하는 것도 괜찮지만 나는 한국 분들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지역이 있다. 그곳이 바로 시가현이다.

최근 일본을 찾아오는 외국인 방문객이 연간 2,000만 명을 넘는 시대가 되었다. 특히 한국인이 현저히 늘어나고 있다. 내가 전차를 타면 한국어가 자주 들릴 정도다. 그런데 간사이 지방에서 외국인한테 압도적으로 인기가 있는 곳은 여전히 오사카와 교토이지만, 시가현을 찾아가는 외국인은 많지 않다. 시가현은 대중교통이 그리 발달된 편이 아니라서 찾아가는 것이 조금 불편하다. 그래도 교토에서 멀지 않고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깊은 관계가 있어서 가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한반도 도래 문화 숨쉬는 시가현
百濟寺·石塔寺, 한반도와 연관돼
고구려·백제 승려 주석한 百濟寺
石塔寺 석탑, 장하리 석탑과 유사


교토부 동쪽에 위치한 시가현에는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인 비와호(琵琶湖)가 있고 자연 환경도 아주 뛰어나다. 환경이 좋고 교토나 오사카로도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여서 인구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시가현의 인구는 오사카의 약 1/6에 불과하고 면적도 작은 편이라 지명도는 높지 않다. 실제로 방문하면 차창 풍경이 산과 들과 논밭, 그리고 주택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아 시골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뜻밖에도 옛날에 ‘오미(近江)’라고 불리던 시가현은 ‘대국(大國)’이었다. 현재의 현(縣)에 상당하는 일본 각지에 있었던 ‘국’은 ‘대상중하(大上中下)’라는 4등급으로 랭크가 매겨졌는데 오미는 가장 큰 대국으로 매겨져 있었다. 동일본과 서일본 중간에 위치하는 시가현은 옛날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열차도 자동차도 비행기도 없던 시대에 중요한 교통수단이 수운(水運)이었다. 시가현 북쪽은 후쿠이현(福井縣)을 경유해서 동해로, 시가현 남서쪽은 강을 경유해서 오사카, 그리고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로 이어져 있다. 동해 쪽에서 배로 온 사람이나 물품은 비와호나 강을 통해서 교토나 오사카 쪽으로 날라졌다.

약 5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7세기 후반에는 시가현으로 천도해 일시적으로 수도가 되었다. 천도의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도성을 만드는데 큰 힘이 되는 선진 기술을 갖고 있는 도래인들과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도 이전에 이미 도래인이 시가현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백제가 패망한 후 그 유민들을 일본에 정착시켰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665년에 백제인 400여 명을, 669년에는 백제인 700여 명을 시가현 동쪽인 호동(湖東)에 정착시켰다고 한다. 이런 역사가 있어서인지 역시 시가현에는 도래인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그 가운데 햐쿠사이지와 이시도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햐쿠사이지(百濟寺)
일본어로 ‘구다라’라고 발음하는 ‘백제(百濟)’, 앞에서 말했듯이 백제와 일본이 깊은 관계가 있었다. 지금도 구다라가 주소, 초등학교, 공원 등 고유 명사에 사용되는 사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인연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구다라지(百濟寺)라고 불리는 사찰이 몇 개 있었다. 폐사가 된 곳, 터만 남아 있는 곳도 있는 가운데 시가현의 햐쿠사이지(이곳만 구다라지가 아니라 백제의 한자음을 그대로 따르고 햐쿠사이지라고 발음함)는 단풍 명소로도 알려져 있어 가을엔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햐쿠사이지는 7세기 초 무렵에 쇼토쿠타이시(聖德太子)의 발원으로 백제인에 위해 백제 용운사(龍雲寺)를 모델로 창건된 사찰이다. 고구려 승려 혜자(惠慈), 백제 승려 혜총(惠聰), 도흠(道欽), 관륵(觀勒) 등이 이곳에 머물면서 사찰 건립에 힘을 썼다. 덕분에 사찰이 크게 융성했다고 한다. 헤이안 시대에 들어 비와호 서남쪽에 있는 히에이잔(比叡山)에 천태종 사찰 엔랴쿠지(延曆寺)가 개창된 후 햐쿠사이지도 천태종 사찰이 되고 규모도 확대되었다. 헤이안 말기에서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엄한 대사찰이었다. 화재나 전란으로 사찰 건물이 많이 소실되었으나 당시는 재건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햐쿠사이지가 큰 타격을 받은 것이 16세기 후반이었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후반에 걸쳐 일본이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혼란기로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불리는 시대가 되었다. 천하통일을 노린 무장이자 다이묘(大名)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1571년에 엔랴쿠지를 태워버렸다. 엔랴쿠지가 노부나가에 저항한 다이묘와 친교가 깊어서 이 싸움에 휘말린 것이다.

햐쿠사이지도 마찬가지였다. 노부나가에 저항한 어떤 다이묘들이 돌담을 쌓아 햐쿠사이지 등을 성새화(城塞化)했다. 노부나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햐쿠사이지는 고민한 끝에 오랜 관계를 중요시해 저항 세력에게 병량(兵糧)을 보내고, 그들의 가족들을 사찰 경내에서 보호했다. 격노한 노부나가는 이것을 모반이라고 간주해 햐쿠사이지를 태워버렸다. 간신히 주요한 불상 몇 구, 중요한 경전 등이 살아남았다. 1573년의 일이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가 지상의 낙원인 햐쿠사이지가 불태워져 없어진 것을 아쉬워하는 기록을 남겼다.

에도 시대에 들어 본격적인 부흥이 시작되었다. 17세기에는 본당(本堂), 인왕문(仁王門), 산문(山門) 등이 건립되었다. 그것이 현재 있는 건축물이다. 옛날 같은 수많은 건물이 많이 없어졌지만 햐쿠사이지 넓은 경내를 답사하면 위용을 자랑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시도지(石塔寺)
이 연재에서 소개하는 사찰이 거의 다 내가 적어도 한 번은 가 본적이 있는 사찰이다. 그러나 이시도지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도 꼭 소개하겠다고 결심한 사찰이다.

내가 이시도지를 알게 된 계기는 작년 말에 오사카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후지모토 다쿠미(藤本巧) 사진전 ‘일본 속의 한국 도래 문화’이었다. 이시도지 삼층탑과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을 대비해 전시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서 한반도와 깊은 관계가 있는 유적이 많지만 이렇게 한 눈에 그 인연을 보여주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시도지 삼층석탑. 부여 장하리 석탑과 유사한 모습이다.

사전(寺傳)에 의하면 이시도지 연기는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인도의 아쇼카왕이 불법 흥륭을 기원해 8만 4천 개나 되는 탑을 만들고, 탑에다가 사리를 넣고 세계 여러 곳에 뿌렸다. 그 중 탑 2개가 일본에 떨어졌는데 하나는 현재 이시도지가 있는 곳에 떨어져 땅에 묻혔다. 헤이안 시대에 유학승이 송나라에서 이 이야기를 알게 되자 일본에 있는 승려에게 편지를 보내 이 일을 알렸다. 편지를 받은 승려가 상소를 올리자 천황이 칙사를 보내 발굴시켰더니 큰 석탑이 나왔다. 원래 여기는 쇼토쿠타이시가 건립한 사찰의 하나였지만, 큰 탑이 나왔기 때문에 가람을 다시 건립해 이시도지라는 이름을 지었다.

사전 내용이 이렇게 전설적인 것이 아마 사찰 연기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석탑은 여기에 정착한 백제계 도래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추측된다.

15세기에 오닌(應仁)의 난(亂), 16세기에 오다 노부나가의 병화로 가람, 문헌 등이 거의 다 소실되었다. 하지만 석탑이 당당한 모습으로 솟아 있는 것을 보면 도래인의 마음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 감동을 받는다.

사찰 입구에서 긴 계단을 올라가면 높이 7.5m의 큰 석탑을 중심으로 작은 석탑이 무수히 지어 널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와 이 모습에 압도당한다. 이시도지를 방문하면 색다른 일본 사찰 답사가 될 것이다.
 

 

햐쿠사이지 이시도지 답사 안내

햐쿠사이지, 이시도지에 대중교통으로 가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불편하다. 주변엔 두 사찰 외에도 볼만한 사찰이 많아 택시를 이용해서 돌아다니는 것도 효율적으로 답사하는 한가지 방법이다.

전차, 버스로 햐쿠사이지에 갈 때는 방법이 2개 있다. JR오미하치만(近江八幡)역에서 내리고 오미 철도(近江鐵道)를 타고 요카이치(八日市)역까지 간다.

그리고 요카이치역에서 버스 아이토선(愛東線)을 타고 햐쿠사이지 혼보마에(百?寺本坊前)에서 내린다(소요시간 약 30분). 이 버스는 사찰 바로 앞까지 가는 것이 장점이다. 단 하루에 4번 밖에 없어 주의해야 한다. JR노토가와(能登川)역에서 내리고 버스 가쿠노선(角能線)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이 버스는 1시간에 1번 정도 있어서 더 편하다(소요시간 약 35분). 다만 버스 정류장 햐쿠사이지 혼마치(百?寺本町)에서 사찰 입구까지 15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햐쿠사이지, 햐쿠사이지 북쪽에 있는 곤고린지(金剛輪寺), 사이묘지(西明寺) 세 사찰은 호동에 있는 고찰로 ‘고토산잔’(湖東三山)이라고 불린다. 곤고린지는 도래인의 후손인 명승 교키(行基) 스님에 의해 개산된 사찰이다. 모두 다 단풍 명소로 가을엔 많은 사람이 찾아간다. 자동차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단풍 투어 버스도 있다. 매년 11월 하순엔 셔틀 버스로 고토산잔을 돌아다닐 수 있다.

이시도지에 대중교통으로 갈 때는 오미 철도 요카이치역에서  갈아타고 사쿠라가와(櫻川)역에서 내리고 사찰까지 걸어가는 방법이 있다. 작은 무인역인 사쿠라가와 역에서 사찰까지는 논이 펼쳐진 풍경을 보면서 40분 정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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