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한마음에 우주가 직결돼 있고 이 세상이 가설돼 있다!

진주에서 개원식을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정신세계와 물질세계가 합하여 한마음으로 이렇게 지원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애써 주신 여기 회장님으로부터 부회장님, 총무님 그리고 여러 신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나를 믿되 나가 아닌 나를, 즉 주인공을 믿어라.

그리고 거기다가 일임해라.

그리고 거기서만이 이끌어 간다는 믿음을 가져라.

그런데 따지고 본다면 모두가 각자 자기 일 자기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또는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행을 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주어지든지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마음 한생각을 잘하면 인체의 세포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수십억의 의식들이 같이 따라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따라 주기 때문에 한생각 내기가 그렇게 어렵단 얘깁니다.

생활 속에서 살아나가면서 나쁜 생각을 하지 말고, 나쁘게 들어오는 걸 좋게 생각을 돌려서 그 자리에 일임하라고 했습니다. 몸속의 의식들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지금 현실에 나오는 것인데, 나오는 데다 다시 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모든 업보성 윤회성 유전성 영계성 세균성, 이 모두가 없어지는 까닭에 내 몸이 편안하고, 내 몸이 편안한 까닭에 부처는 편안하다 이 소립니다. 내 몸이 편안한 것은 내 몸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이 작용을 잘해 주기 때문이죠. 그리고 또 내 마음이 모두 한데 합쳐져서 한마음으로 돌아가니까, 하여튼 사람이 마음 내는 대로 의식들은 그 몸속에서 모두 그대로 따라 주는 겁니다.

그렇게 에너지 덩어리는 심력만 배출할 뿐, 악으로 나갈 수도 있고 선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태양열도 그렇지만 전력도 우리가 크게 끌어 쓰려면 크게 끌어 쓰고 작게 끌어 쓰려면 작게 끌어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용도에 따라서 다 주어지듯이 말입니다. 자기에게 에너지 덩어리 하나가 있는데, 강도질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기를 치려고 그 에너지를 빼 쓴다면 그대로 그냥 배출이 되니까 그대로 될 겁니다. 하지만 선으로 나가는 데도 또 그것이 그대로 배출됩니다. 한마음에 일체를 다스려 주는 그 근본이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는 거죠. 그래서 악하게 하면 악하게 하는 대로 입력이 되고 선하게 하면 선하게 하는 대로 입력이 자동적으로 돼 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지금 현실에 나오는 것이니, 자기가 현실에 사는 거를 가만히 지켜본다면 미래에 올 것을 알 수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죄를 안 짓는데도 왜 이렇게 고가 많고 병고가 많고 애고가 많은가.’ 하고 남을 원망하고 그렇게 하겠지만,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면 네가 과거에 한 거를 대충 짐작하리라. 그리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를 가만히 본다면 미래에 또 어떻게 올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느니라. 그러니 남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태교가 중요하듯이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는 자체가 아주 중요합니다. 한생각을 잘하면 수십억의 의식들이 모두 나가서 작용을 해 줍니다. 즉 말하자면 이것도 혹성입니다. 크고 작을 뿐이지요. 그러면 몸에도 대기권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건 왜냐하면 몸속의 의식들이 다 나가서 작용들을 하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들고 나고 들고 나고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잘못하면 악연을 가져오게 돼 있고, 세균성을 끌어들여서 몸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영계성을 끌어들여서 정신병자로 만들 수도 있고, 유전성을 끌어들여서 그냥 복잡하게 2대 3대가 가도록 연방 같은 병 증세 또는 애고의 문제, 이런 것들이 꽁지에 꽁지를 물고 일어나게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대기권에서 모든 것을 통신하는, 들여보낼 수도 있고 내놓을 수도 있는 통신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내 마음을 한번 잘 쓰면 두뇌로 배출이 돼서 두뇌에서 사대로 통신이 되게 돼 있어요. 내 몸뚱이 하나가 움죽거리는 거를 본다면 전체 우주가 움죽거리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얘깁니다.

부처님이 49년을 설하시며 가르치실 때도 그러셨지만 본래 불교는 생활 자체 그대로입니다. 목탁 두드리고 머리 깎고 회색 옷 입고 이렇게 하는 게 불교가 아니라, 하나도 빼놓는 게 없이 전체가 다 불교 아닌 게 없습니다. 그래서 49년을 부처님께서 설하실 때는 “너희가 마음을 깨달아서 본다면 내 마음도 꿰뚫어 볼 수 있느니라. 네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일체 모든 생명들의 마음이 둘이 아니니라. 그렇기에 한도량이요, 모두 각자 내 도량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기 때문에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돌아가는 진리이니라.” 그러셨던 겁니다.

하다못해 벌레 한 마리도 생명이 있는 거기 때문에, 미생물 하나도 생명이 있는 거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가 다 불(佛)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바로 불이에요, 불! 또 보이지 않는 데나 보이는 데나, 정신계나 물질계가 한데 합쳐서 작용하면서 돌아가고 통신이 되고 모두 교류하고 돌아가는, 말하면서 돌아가고 생각이 같이 어울려 돌아가고 이러는 것이 교(敎)예요. 그래서 불교는 어느 한 군데 국한돼 있는 게 아니고 전체가 같이, 아까도 얘기했지만 공생이며 공체며 공식하고 공용하고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불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 깎고 회색 옷 입고 이렇게 하는 것만 불교가 아니라 전체 생활의 어느 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사생이 전부 한데 합쳐서 돌아가되 (법상을 짚으시며) 이런 거 하나도 버림이 없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런 것도 지금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어요. 우리 마음이 낱낱이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가니까 이런 것도 돌아가고 있죠. 모두가, 하나도 쉬고 있는 게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대로 여여하게 사는 그 자체가 불교라 이겁니다.

종교가 많지만 그건 모두 이름일 뿐입니다. 그 이름을 가지고 내 종교 네 종교, 내 사찰 네 사찰 하고 싸우고들 야단들인데, 그건 있을 수가 없어요. 그거는 넓게 생각을 못해서일 겁니다. 계정혜(戒定慧)를 왜 만들어 놨습니까? 계율과 질서를 참으로 지키려면, 즉 잘못되는 걸 다스리면서 자기가 행하는 것을 모두 정에다가 같이 놔라 이겁니다. 물리가 터지고 지혜가 있는 것도 다 정에다 놔서 같이 한마음으로 그거를 다스려 나가는 것이 자유인의 길이라는 얘깁니다.

불교라는 자체가 그냥 여여하기 때문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했습니다. “낮은 것도 높고 높은 것도 높으니 어느 거 하나 높지 않은 게 없느니라.” 해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하신 겁니다. 어느 가정이든지 내 남편이 높고 내 자식이 높듯이, 또 바다에서 보면 뱃사공이 높고, 농사짓는 데 가면 농사꾼이 높고, 정치하는 데 가면 정치인이 높고, 모두가 하나도 높지 않은 게 없죠? 산도 높은 게 있으니까 낮은 게 있고 낮은 게 있으니까 높다고 하지 낮은 게 없는데 어떻게 높다고 하겠습니까? 이 모두가 평등한 진리며 모두가 둘이 아닌 도리입니다.

외국에 나가 봐도 그렇고,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항상 기복으로 타의에서, 꼭 상대를 놓고 믿어요. 상대를 놓고 찾아요. 이거는 어불성설이지요. 이거는 있을 수가 없어요. 사대 성인들, 역대 조사들이 말씀하시기를 “너부터 믿고 너부터 알아야 가설되어 돌아가는 이 세상의 법계를 알고 우주의 섭류를 아느니라. 네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상대가 어딨고 종교가 어딨겠느냐? 너부터 알라.” 했는데 모두들 상대를 놓고 하나님을 찾고 주를 찾고 부처를 찾고 온통 야단들이에요. 그러니까 달마 대사도 “당신네가 상대를 놓고 비는 이상 노예로밖에는 살 수 없다. 가르치는 사람도 노예요, 배우는 사람도 노예일 뿐이지 자기 소굴에서 벗어날 수는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죠. 소크라테스도 그랬지만 말입니다. 모두들 미거한 탓에 그렇게 의인을 죽여야만 했던 때도 있었죠.

그렇지만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어느 형상을 믿겠습니까, 스님들의 고깃덩어리를 믿겠습니까? 또 이름을 믿겠습니까, 아니면 허공을 믿겠습니까? 뭘 믿어야만 되죠? 어느 분이 한번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내 주먹만 믿어!”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것도 좋지만 내 주먹을 믿는다면 펼 줄도 알고 쥘 줄도 알아야만이 진짜 넓은 지혜로 가는 길입니다. 내가 주먹을 쥐고선 펼 줄 모른다면 모두가 둘이 아닌 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공생이며 공용이며 공체로 공식화하고 돌아가는, 시공을 초월한 이 자체의 진리를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내 한마음에 우주가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이 가설이 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지혜가 풍부해지고 물리가 터집니다. “나를 믿되 나가 아닌 나를, 즉 주인공을 믿어라. 그리고 거기다가 일임해라. 그리고 거기서만이 이끌어 간다는 믿음을 가져라. 거기서만이 이끌어 가고 거기서만이 병도 낫게 할 수 있다.” 이겁니다. 왜냐? 그 모든 것은 거기서 나온 거니까요. 땅을 걸어가다가 엎드러져도 땅을 짚고 일어나야지 허공을 허우적거려서는 일어날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다 모든 걸 일임하고 돌아간다면 안에서 작용을 해 줍니다. 자기가 자기를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안에서는 작용을 해 주고 밖으로 약을 먹더라도 주인공과 둘 아니게 먹어야 하는 겁니다. 밥도 약입니다. 밥도 약이에요! 평소에 사과나 어떤 과일을 먹는 것도 약입니다. 이 몸뚱이를 이끌고 나가기 위해서 먹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전체가 약 아닌 게 없죠. 그러니 환경에 따라서 용도에 따라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것이 바로 법이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하나도 걸릴 게 없어요. 불교라는 자체가 이렇게 광대하고 무변하기 때문에 내 종교니 네 종교니 하고 찾을 것도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불교를 믿든 기독교를 믿든 가톨릭교를 믿든 가정생활을 소홀히 하지는 마세요. 기도를 하러 갑네 하고 가정을 비워 놓고, 또는 남편을 굶주리게 하고 자식을 굶주리게 하고, 음식을 가리면서까지 잘되게 한다고 기도를 하러 석 달 열흘을 가지를 않나 일주일을 가지 않나. 그러나 이것이 모두 헛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거는 건건이 나쁜 일이지요. 집안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잘되겠다고 가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자기 앉아 있는 자리에 부처든지 주처가 있는 거지 자기가 없는데 뭐가 있습니까?

법당에도 오시면 여러분이 오셨기 때문에 거기 부처가 있는 거죠. 여기 스님네들이 항상 계시기 때문에 부처가 있는 거죠. 그리고 또 이런 말도 있죠. “사람이 없으면 부처가 없다.”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어느 사찰이든지 어느 교회나 성당이든지 사람이 없으면 부처가 없고 주님도 없어요! 허허허…. 그 뜻을 잘 알아내 보십시오. 자기만이 자기를 알 수 있는 거니까요. 나도 전에 고해 성사까지도 해 봤지만 말입니다. 허허허….

하여튼 불교라는 게 그렇게 광대하고 무변한 겁니다. 그러니 일체가 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꼭 알고 가야만 되겠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지금 세세생생 쳇바퀴 돌듯 하면서 옷이 더러우면 벗어 버리고 또 새 옷 입고 이러듯이, 우리 몸뚱이는 한 철 캠핑 나와서 놀다 가는데 그냥 어떻게 노느냐에 따라서 또 주어지죠. 주어지면 그걸로 또 이 세상에 나오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천당 지옥이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은 그걸 실감 못할 겁니다.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이 모습, 즉 말하자면 무명이 씌워집니다. 개같이 산다면 개의 모습으로 나올 거고, 짐승같이 산다면 짐승의 모습으로 나올 거고 사람같이 산다면 사람의 모습으로 나올 겁니다. 그러니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의 의식을 가지고 만약에 개로 됐다고 합시다. 그런다면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옥이겠습니까?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이 자리가 지옥이고 이 자리가 바로 천당입니다. 무슨 지옥이 따로 있어서 가둬 놓는 데가 따로 있고 이런 게 아닙니다. 한 찰나에 그냥 사람으로 됐다가, 한 찰나에 그냥 딴 모습을 쓰고 나오게끔 돼 있죠. 그래서 상천세계 중천세계 하천세계, 이렇게 돼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있는 곳은 중천세계라고 볼 수 있죠. 상천세계로, 대천세계로 승진을 하느냐 하천세계로 떨어지느냐 하는 문제가 지금 우리가 여기서 살아나가는 데에 달렸다 이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마음공부 할 때는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이 바로 둘이 아니다 이 소립니다. 과거심도 현재심이요, 미래심도 현재심이다 이겁니다. 그걸 일일이 따진다면 헛갈려서 안 되겠지만 마음은 체가 없습니다. 삼천 년 전이라 할지라도 오늘입니다. 삼천 년 후도 오늘입니다. 이해가 갑니까? 안 가죠? 허, 이해가 그렇게 안 가십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어저께도 오늘이고 내일도 오늘이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어저께 해 놓은 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 부딪치죠. 오늘 해 놓은 일이 있기 때문에 내일 오늘이 있습니다. 내일 오늘이요. 그래서 삼천 년 전 오늘이나 삼천 년 후 오늘이나 오늘 일심으로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낸다 이겁니다.

여러분, ‘정신세계는 뭐고 물질세계는 뭔가?’ 이렇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집을 짓겠다고 생각을 했을 때가 정신세계고, 설계도가 나왔을 때가 바로 물질계입니다. 그럼 정신계와 물질계가 종합해서 집 한 채가 올라갑니다. 허허허…. 여러분이 그렇게 여여하게 살면서도 그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예가 없어요. 달력에 써 놓은 내용들을 하나하나 잘 읽어 보세요.

수억겁을 거쳐서 우리가 미생물에서부터 진화하면서 나투면서 화하면서 이렇게 인간까지 왔습니다. 그렇게 진화해서 이렇게 온 것도 자기가 자기를 형성시키며 온 겁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 아버지의 정자 난자가 합하고 거기에 태어날 자기 영혼이 포함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삼합이 포함되지 않으면 어린애가 형성될 수가 없습니다. 형성될 수가 없는데 거기에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식이 또 붙습니다, 영혼에. 업식이 붙어서 형성된 인체 내부에 모든 회사가 들어섭니다. 간장 공장, 심장 공장, 콩팥 공장, 척수 척추 공장, 대장 소장 공장 이 모든 공장이 쫙 몸뚱이에 들어서서 작용을 해 주기 때문에 모두 부처님이시죠. 허허허…. 그리고 다닐 수가 있죠. 말할 수가 있고 행동할 수가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그 업식이라는 것이 모두가 그런 공장의 바로 공장장들이죠.

그러니 내가 마음을 이렇게 쓰면 이렇게 쓰는 대로 하나로 돼 주고, 또 내 마음이 그리로 든다면 그냥 한마음이 돼서 부처고요. 그래서 자(子)와 부(父)가 서로 상봉을 해야만이, 과거에 살던 내 조상과 지금 현재의 내가 상봉을 해야 깨달았다고 하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어린애를 낳은 셈이다 이겁니다. 육체적인 어린애 말고 정신적인 어린애로 태어났다. 정신의 어린애로 태어났다면 그게 또 성장하도록 길러야 되겠죠? 기르는데 체가 없는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바로 귀신 방귀털을 더 먹이지도 말고 덜 먹이지도 말고 길러야 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건 마음으로 먹이고 마음으로 조절해야 되는 거죠. 이 마음 다스림이 바로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계를 키워서 물질계를 모두 개발하고 발전시키고, 창조력을 길러서 창조를 하고 이러는 게 즉 생활과학입니다. 부처님이 딴 거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 하나로 인해서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그냥 움죽거리고 돌아가느니라. 이 마음에 전체가 다 같이 호흡하면서 돌아가느니라.” 본래 여러분이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이 재료로 쓰여지게 충만히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지수화풍이 바탕으로 돼 있으며 지수화풍을 먹고 삽니다. 그런데 고마운 줄을 몰라요. 어떻습니까? 한번 고맙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아, 참 고맙다! 바람, 공기야, 참 고맙다! 내 생명을 유지시켜 줘서 참 고맙다! 불아, 고맙다! 흙아, 고맙다!’ 해 봤습니까? 밥을 먹으면서도, 걸어다니면서도 한번 고맙다고 해 봤습니까? 허허허….

하여튼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돼 있고 지수화풍을 먹고 살고 또 그렇게 하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처럼,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도 우리가 먹고 사는 겁니다. 네? 안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어떻게 작용하게 하느냐를 알아야지요. 물질계와 정신계가 100% 같이 돌아가야 합니다. 즉 말하자면 전깃줄과 전깃줄이 합해져야만이 불이 들어올 수 있죠. 그렇듯이 우리가 마음이라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불을 켤 수가 없는 거죠. 자유스럽질 못해요.

컴컴하다면 불을 켜서 밝은 데서 살고, 목이 마르면 물 마시고, 똥이 마려우면 똥 누고 이렇게 자유스럽게 사세요, 자유스럽게! 속이 더부룩하고 그럴 때 똥을 누면 시원하죠? 그 똥 누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생활하면서 살아나가는 데에 그저 이것저것 닥쳐오고 답답하고 그럴 땐 똥 못 누는 거나 똑같아요. 허허허…. 그러니까 변비 생겨서 똥 못 누는 거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답답한 거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타파하고 나갈 수 있다면 아주 시원한 삶이죠. 그러니 모두 여러분의 한마음에 달려 있고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모두에게 네 가지 재료가 주어져 있으니 본래 있는 거 가지고 바로 중용을 하실 겁니다. 모두 본래 가지고 있으니까요.

의사들도 많이 계시고 그렇지만, 내가 박사님들더러 그럽니다. 박사님들께서 연구를 해서 못 고치는 병을 고친다고 하더라도, 그 병자는 또 딴 병으로 바꿔서 올 겁니다. 왜냐하면 업식을 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사분들은 또 이 병이 어디서 어떻게 돼서, 어떻게 얽혀서 왔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 병 이름을 알고도 못 고치는 병들이 많습니다. 병 이름은 모두 여러분이 지어 놓은 거지 저절로 생긴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름들을 가지고 야단법석이죠.

그래서 그 박사님들더러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주 잘한다고 해도 35%나 40%, 45% 그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나머지는 누가 충당을 합니까? 여러분이 해야죠. 그런데 여러분이 이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어디서 온 거를 모르고 어디로 갈 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거를 타파 못하고 자유스럽게 헤치고 나갈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 병원에선들 어떡합니까? 업보성으로 오고 영계성으로 오고, 세균성으로 오고 유전성으로 오고 아, 이러는 놈의 거를 어떻게 의사가 치료를 해요? 정신세계의 마음공부를 안 했다면 그거를 알 수가 없으니까 못하죠.

그러니 이 공부를 어느 분이고 모두 다 하셔야 될 겁니다. 그래야 조상의 묵은 빚도 갚을 수 있고 지금 자녀들에게 햇빛도 줄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재산을 모아서 주려고 하는데 재산을 모아 주기보다도 이 마음공부를 전달해서 뿌리가 싱싱하다면 나무도 싱싱하고 가지도 싱싱하고 잎새도 싱싱해서 열매가 굵고 아주 맛있게 열리고, 제 나무에서 실과는 익어 누구나가 다 먹을 수 있게끔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만 안겨 줄 양으로 그냥, 자기가 병이 드는지 죽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들한테 잘살게 해 줘야지!’ 하는 소망만 가지고 뛰는 겁니다. 하기야 사는 날까지는 꼭 살겠죠. 그렇지만 사는 날까지 살더라도 자유스럽게 살고 자유스럽게 가야죠. 옷이 더러우면 ‘빨아 입어야겠다!’ 하고 벗을 줄 아는 사람이 돼야죠.

목탁을 두들기고 머리 깎고 회색 옷을 입는 것만이 불교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꼭 증명을 하시고, 생활 속에서 꼭 아셔야 됩니다. 그것은 모두 방편으로써 그렇게 하는 겁니다. 방편이란다고 또 거짓으로 알진 마세요. 거짓으로 이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별의별 게 다 나오는데 우리가 켤 줄 알아야 그걸 다 볼 수 있다는 얘기죠. 그리고 생각도 할 수 있고요. 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도 할 수 있고 “아이! 저놈은 얄미워.” 하는 소리도 나오고 “조놈은 아주 잘하는데….” 하기도 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텔레비전 화면과 같고 텔레비전 몸체와 같습니다. 텔레비전 속에 선 같은 것이 연결되어 있듯이 우리도 두뇌에,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켤 줄 알아야 켜지 몸체만 있으면 뭘 합니까? 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2년 11월 29일 진주지원 개원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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