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보궁으로 향하는 길에는 단풍이 무르익었다. 오대천을 따라 걷는 이길에서 한없이 숙연해짐을 느꼈다. 단풍나무 곁을 걷고 있지만 나는 겨울숲을 미리 걸었다.

중국 산서성의 오대산에서는 지금 한창 중국 정부 주도로 거창한 불사가 진행 중이란다. 어떤 의도로 정부까지 나서는지 의아하지만 옛날 옛적에, 문수보살을 비롯해 별처럼 헤아릴 수 없는 보살들이 머물렀다는 이 산의 가치를 뒤늦게 알아 불국토를 재현한다는 소식이다. 

잘 알려지다시피 신라의 자장율사가 그 오대산에 갔다 와서 강원도 땅에서 찾아낸 산이 우리의 오대산이다. 우리나라 오대산은 중국의 오대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중국 오대산은 어디서 왔을까? 인도의 대승경전 화엄경에 나오는 가상의 산 청량산에서 왔다.

천년고찰에 전해지는 선기
전쟁 화마 이겨낸 불심 남아
입추 속에 느껴지는 불국토

오대산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도 갔다. 자장보다 훨씬 늦은 중국 송나라 때 오대산에 간 일본 스님이 교토의 아타고산(愛宕山)에 오대산 문화를 이식했다. 이처럼 오대산은 아시아를 아우르는 넓이였다.

그런데 중국의 자존심은 유별났다. 불교가 자국의 종교가 아니란 사실을 감추려고 청량산을 오대산에 덮어씌운다. 같은 장소임을 강조해 가상을 사실로 전도시키려는 문화전략이었다. 중국의 오대산이 인도의 청량산과 비슷하다는 환경을 빌미로 개명까지 단행했으니, 일본 공상만화에서 힌트를 얻는다는 벤츠의 신기술처럼 인도의 가야산이 중국의 오대산으로 둔갑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화엄경에 나오는 문수보살 때문이다. 문수보살은 실존인물이라기보다는 부처의 신통력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한 가공인물이란 것이 정설이다. 부처와 달리 문수보살에게는 뚜렷한 본적지가 없다는 사실도 문수의 비현실성을 지목한다.

문수보살이라면 중국 오대산에서 겪은 자장의 신화적 체험이 얼마든 현실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었다. 중국의 역사서인 ‘속고승전’은 자장이 종남산 운제사에서 수행했다고 전하지만, 오대산에서 만난 문수보살에게서 부처의 사리와 가사를 얻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더 눈길이 간다.

‘이것은 석가세존의 것이니 잘 보관하십시오. 당신 나라의 동북쪽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일만의 문수보살이 늘 거주하니 가서 뵈십시오.’

자장이 가져온 불사리는 강원도 오대산의 적멸보궁에 모셔진다. 삼국유사에서 불국토를 이룰 땅이라고 예견한 바와 같이 오대산에는 월정사와 상원사를 비롯하여 다섯 봉우리마다 암자들이 깃들어 문수성지로 자리매김한다. 

자장이 중국 오대산에서 보았듯이 문수보살은 고승이나 노인으로 나타나고 동물로도 나타나는데, 그중 동자로 가장 자주 나타난다. 문수보살을 보려면 문수보살과의 인연이 깊어야만 볼 수 있고, 문수보살의 지혜에 이르려면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맑아야 한다. 이를 증명하듯 상원사 문수전에는 문수보살과 문수동자가 나란히 앉아 있다.

오대산에서 꽃핀 문수신앙은 21세기에 이르러 ‘선재길’을 만들어낸다. 화엄경에 나오는 어린 구도자 선재동자(善財童子)에서 따온 이름으로 문수보살, 아니 문수동자와는 사제지간이다. 

세상이 온통 고달프다고 한다. 최고의 실업률이 고달프고, 최고의 가계부채가 고달프고, 최고의 자살률과 이혼률이 고달프다. 부조리한 것은 이같은 중생고에도 어두워야 할 도시가 점점 깨끗해지고 투명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시를 장악하는 유리건물들은 중생고를 차갑게 내려다보는 사이코패스이다. 선재길은 본래 월정사와 상원사를 오고간 스님들이 다니던 길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고달픈 중생들이 걷기 시작했다. 

선재길은 월정사 부도밭 뒤에 시작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서 있지만, 나는 월정사 일주문부터 걷기 시작했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도 나오는 그 유명한 월정사 전나무 숲을 빼놓고 걸을 순 없었다. 전나무 특유의 알싸한 향기가몸을 씻어주는 길이다. 가을로 들어서는데도 전나무 숲길은 스님이 입는 괴색 승복처럼 계절을 타지 않았다.

선재길 징검다리를 건너는 도반들.

월정사는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지만, 한국전쟁 때 대적광전 앞의 팔각구층석탑만 남기고 모조리 불탔다. 탑 앞에서 공양하는 자세로 두 손을 모아 쥔 석조보살좌상만이 불에 그슬린 천 년을 기억하고 있다.

선재길은 상원사로 이어진 조붓한 숲길이다. 오대천을 따라 흐르는 이 길을 징검다리와 섶다리, 출렁다리, 조릿대 숲이 이어준다. 지난겨울 나는 이 길을 걸었고, 이제 아이들이 쓰는 크레용으로 가을을 그리듯 쓱쓱 다시 걷는다. 

길은 오대천 위를 가로지르는 반야교를 건너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곧 회사거리가 나타난다. 회사거리, 일제 강점기 목재공장이 있던 자리란다. 선재길을 걸으면 화전민들이 살았던 흔적, 땔감나무를 운반하기 위해 깔았던 철길 등 우리나라의 근대사도 보인다.

회사거리에서 동피골까지, 단풍나무가 가지를 뻗어 내려와 열목어, 금강모치, 꺽치, 퉁가리, 쉬리, 버들치, 둑중개가 산다는 냇물에 붉고 노란 낙엽들을 떨어뜨린다. 지난겨울 이 부근 오대천은 꽁꽁 얼어 있었고, 얼음 위에 눈이 쌓여 소리를 낮추더니 지금은 빠른 물살 소리와 함께 낙엽들을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다.
이 길에서 만나는 단풍나무는 설악산과 사뭇 다르다. 설악산 단풍이 명료한 빛깔에 도도한 자태라면 오대산 단풍은 채도가 낮고 수수하다.

섶다리가 보였다. 나룻배를 띄울 수 없는 얕은 물에 임시로 걸쳐놓는 다리다. 잘 썩지 않는 물푸레나무와 버드나무로 다리를 세우고, 소나무와 참나무를 엮은 상판 위에 솔가지나 잎이 달린 잔가지를 깔고, 그 위에 흙을 덮는, 나름으로 정교한 공정을 거쳐 만든 다리다. 여름에 개천이 넘치면 떠내려가므로 ‘이별다리’하고도 부른다.

다리를 지나자 자작나뭇과인 거제수나무가 흰빛을 터뜨리더니 동피골 오대 산장을 지나자 푸른 조릿대가 지천이다. 출렁다리를 지나고 현수교를 지나자 다시 빽빽한 전나무 숲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길은 상원사에서 중대사자암, 적멸보궁, 비로봉으로 이어지지만 선재길은 여기서 끝이 난다. 

상원사는 한국전쟁 때 경허의 제자 한암스님이 지키고 있었다. 월정사를 불태운 국군이 상원사로 올라오자 한암은 불상 앞에 정좌했다. 불을 지르려거든 나부터 태우라고 하자 장교는 그 자리에서 주춤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장교는 문짝을 뜯어 마당에서 태우고는 자리를 떴다.

선재길로 경허의 제자 한암이 다니고, 한암의 제자 탄허가 다녔으리라. 그리고 두 스님은 때때로 적멸보궁에 오르기 위해 상원사를 나섰으리라. 그들이 걸었을 길로 나도 따라나섰다. 몸이 다소 피로했지만 상원사를 몸으로 지킨 한암의 결기 때문인지 새로이 힘이 솟는 듯했다.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에도 단풍은 타오르고 있었다.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계단을 태우고, 5층 석탑처럼 보이는 산지가람 중대사자암을 태우고, 기와불사하는 종무소를 태우고는 마침내 땅에 떨어져 바람에 뒹구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단풍은 나무의 일을 모르고 있었고, 나무는 단풍의 일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렇게 훨훨 타오르다가 마침내 타고 남은 재처럼 검은 나무들만 남은 겨울 숲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몸인 적멸보궁이라는 것을. 겨울 숲을 지날 때는 그래서 한없이 숙연해진다. 단풍나무 곁을 걷고 있었지만 나는 적멸보궁의 겨울 숲을 미리 걸었다. 

상원사 문수전.

오대산 적멸보궁은 평일인데도 참배 온 불자들로 붐볐다. 그들은 무엇을 보러 여기에 왔을까? 부처가 있어야 할 수미단에는 황금색 문양이 아로새겨진 주홍색 방석만 놓여 있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부처가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일까? 방석 뒤편 벽면도 눈부신 황금빛이다. 그 벽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산기슭에 부처가 있기라도 한 것일까? 자장은 어디에 부처의 사리를 묻었을까?

사람들 틈을 비집어 전각에 들어간 나는 단지 삼배만을 곡진하게 올렸다.

돌아서 나오는 문에서 먼 산들이 보였다. 산과 산이 겹쳐 있듯이 세상과 세상이 겹쳐 있었고, 그 겹친 세상 너머에 중국과 인도가 보이고, 문수보살과 자장이 보이고, 북쪽으로 마지막 유행길을 떠나는 부처의 맨발이 보였다. 문득 뭔가 머리를 찌른다. 아, 그래서 적멸보궁이구나! 적멸보궁에선 빈 방석, 빈 벽, 빈 하늘이 부처 아닌가.

걷는길 : 월정사 - 월정사 부도밭 - 섶다리 - 상원사 - 중대사자암 - 적멸보궁
거리와 시간 : 약 5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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