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하늘의 문이 반쯤 열린다는 일요일인데 아침안개가 산허리에 감기더니 종일 내 방에는 수상쩍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한 남편은 죽고 한 남편은 헤어진 오십 줄넘긴 과부댁 둘이 용한 무당이 사자암에 가라해서 왔다며 재수 좋은 일, 돈 버는 일을 묻는다. 글쎄, 재수 좋으면 돈 벌었으면 일요일 산간(山間)에 퍼질러 이불빨래나 하며 짓이길까. 점심엔 일 년 내내 사과 한 알 사온 적 없는 김 처사가 친구까지 데려와 아껴먹는 군고구마 남김없이 먹어 치우고 사과나 배 없느냐며 냉장고 안까지 뒤져댄다. 여름엔 땀방울로 일궈놓은 열 평 남짓한 텃밭에서 풋고추랑 깻잎이랑 호박잎까지 따가던 박보살이 오지 않아 다행, 라면 끓여 먹고 그릇은 대충 씻는 오십 넘긴 노총각이 오지 않아 다행, 이런 날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찰떡이나 천원에 두 개주는 황금잉어빵을 사오는 진짜배기 거사나 보살이 한두 명 다녀가면 좋으련만, 착한 인연은 비켜가고 지지리도 수상쩍은 버거운 인연만 드나들고... 늦 오후엔 차라리 헤진 삶 다둑이며 가벼운 산행(山行)을 해야겠다. 마음을 반에 반쯤은 열고 염불대신 그리운 얼굴 떠올리며 휘파람으로 구성지게 추억이 가슴까지 차오르게 유행가나 두 어 곡 불러 봐야겠다. 시린 가슴에 눈물방울 두 어 방울 고일 수 있게.”

몇 년 전에 낙서삼아 써둔 ‘착한 인연은 비켜가고’이다.

선재동자는 아니지만 일상의 생활 주변에서 보살과 투사, 부처와 중생을 만나며 늘그막 황혼기에 철들고 있다. 마음의 흐림과 맑음에 따라 보살이 투사로, 부처가 중생으로 키를 낮추며 다가선다.

내가 머물고 있는 사자암은 오르내리막 길이 업 다운이 심한 등산로의 해발 380m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하여, 사과 한 알을 몸에 지니고 오기에도 숨 가쁜 벅찬 노동일 수 있다. 중간에 음료수 파는 곳도 없어 요사채에 항시 마련해둔 봉지라면은 종교 신앙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들락거리며 라면을 셀프로 끓여 먹고 봉지커피로 휴식을 즐기며 잡담 나누며 돌아간다.

의도적으로 도전하는 사람을 피하라
분노는 결국 분노를 불러올 따름이다


그런데 오늘 점심에 있었던 일이다. 작심하고 온 어느 등산객들이 20여 명이 종각 밑에서 소주파티에 불고기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하여, 나는 그들에게 화난 감정을 잦아들게 한 후 조용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이미 시작한 점심이니 맛있게 편하게 드시고 뒷정리는 말끔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한사람이 말하였다. “식사 후 감사기도와 성가(聖歌)도 부를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가능하면 조용하고 엄숙한 품위가 유지되길 희망합니다.”

그들이 떠난 뒤 요사채의 책상 위에는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 한 분을 보고 갑니다. 저희의 무례함을 용서 하십시오 불교는 열린 종교라는 게시판의 주지스님 글도 읽고 갑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글쎄, 사자암 주지 성깔은 지랄이고 버럭 인데 모르시는 말씀이다. 다만 상황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버럭은 버럭을 불러들일 따름이다. 상대가 의도적인 잘못을 저지르며 도전해 오길 바란다면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평화이다. 가정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직설적인 꾸짖음보다 배려와 이해로 부드러운 용서가 행복과 자유를 꽃피게 할 터이다.

그러나 받아들임의 이해와 용서만이 자비가 아니다. 섭수(攝受)의 자비보다 절복(折伏)의 자비가 더욱 힘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받아들이고 감싸는 자비가 섭수자비라면 말씀에 힘을 실어 꾸짖는 회초리 든 자비가 절복자비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자비는 <열반경>에 박혀있다.

소아마비의 아이에게 일정한 운동을 시키며 게으름이 없도록 회초리 든 심정의 아버지의 교육이 절복자비라면 아이가 안쓰러워 운동을 중간에 쉬게 하고 아이를 감싸며 게으름을 용서하는 어머니의 받아들임이 섭수자비인 것이다. 1년 내내 사과 한 알 사온 적 없는 김 처사가 친구까지 데려와 아껴먹는 군고구마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사과나 배 없느냐며 냉장고 안까지 뒤져댄다고 글을 남기는, 뒤 끝이 좀팽이인 사자암 주지이다.

오늘 점심시간에 요사채에 글 남긴 기독교인은 알까? 모를까? 별난 성깔, 버럭 성질을, 열 개, 스무 개의 얼굴가진 향봉인데.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