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자비보살-고려대구로병원 봉사자 연명순 씨

2008년 불의의 사고로 두 다리와 한 팔을 잃은 연명순(60) 씨. 연 씨는 장애를 딛고 고려대구로병원에서 다른 환자들을 위해 9년째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연 씨가 한 손으로 직접 만든 연등이 그 어떤 연등보다 밝게 빛나는 듯하다.

장애 딛고 다른 환자 위해 봉사
유방암 판정 후 약물 부작용까지
우울증 찾아와 2008년 불의 사고
두 다리, 한 팔 잃는 고통 겪어
“지금 웃지만, 말할 수 없는 고통”

좌절 빠진 그에게 손내민 ‘불교’
병실 찾은 불교호스피스봉사단
“퇴원 후 봉사하겠다” 마음먹어
지현 스님 부탁에 법당 봉사
약물 끊고 의족·의수 착용해

비장애인과 다름없는 모습 ‘귀감’
법회 준비부터 공양물 마련 손수
봉사자 옷 세탁까지 솔선수범해
한 손으로 직접 연꽃도 만들어
도반들 “살아있는 부처님” 칭찬

“남 위한 것, 곧 나를 위한 일”
生死 공존하는 병원서 희망 전달
환자들과 차담하며 아픔 공감
타인 위해 과거 상처도 드러내
“아파봤기에 아픔 공감할 수 있어”

‘사지(四肢)가 찢기는 고통’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극한의 고통을 느낄 때 종종 하는 말이다. 두 팔, 두 다리가 없는 고통은 차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프다는 뜻이기도 할 터. 팔 하나는 차치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손가락 하나만 잃는다고 상상하면 어떨까.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대게는 슬픔과 좌절, 낙담, 포기에 가까워질 테다. 그런데 여기, 절망 속에 꽃을 피운 이가 있다.

장애의 몸으로 아픈 환자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불자가 있어 10월 10일 고려대구로병원을 찾았다. 본관 지하 통로 끝에 위치한 병원법당. 어딘가 음침한 느낌이 들지만, 문 앞에 내걸린 연등이 어둠을 내몬다. 이번 취재가 그의 아픔을 꺼내는 일은 아닐까 평소보다 긴장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7평 남짓한 법당, 그리고 법회가 막 끝나고 바삐 움직이는 봉사자 5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심코 ‘몸이 불편한 사람’을 찾았다. ‘아직 안 오셨나’라는 생각이 들 때 쯤 “이리 앉으세요”라며 손짓하는 이에게 시선이 멈췄다. 의수와 의족이었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다시 봤다. 분주한 발걸음과 연신 밝은 미소가 여느 봉사자들과 조금의 다름도 없다. 차이가 있다면 그의 움직임이 좀 더 바쁘다는 정도. 이토록 환히 웃는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마주앉아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연명순 씨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고려대구로병원 병원전법단 ‘자비회’ 회원들은 연 씨가 “살아있는 보살”이라며 입모아 칭찬한다.

자비행에 ‘장애’는 ‘장애’ 되지 않아
고려대구로병원 병원전법단 ‘자비회’ 소속 연명순(60·법명 법왕심) 씨는 9년 동안 이곳에서 봉사 중이다. 정기법회가 열리는 매주 화요일, 기도하러 법당을 찾는 환자들을 위해 좌복과 법요집을 준비한다. 환자들과 다도를 나누며 그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일도 연 씨의 몫이다.

작은 법당 뒤편에 놓인 작은 의자가 연 씨의 자리다. 의족으로 인해 좌복에 앉지 못하는 연 씨는 이곳에 앉아 법회를 보고 환우들을 만난다. 이 의자를 제외하면 연 씨와 다른 봉사자들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함께하는 봉사자들조차도 가끔 연 씨가 몸이 불편하단 사실을 잊는다고. 그저 똑같이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도반일 뿐이다.

김명숙 봉사자는 연 씨를 ‘살아있는 부처님’이라 표현한다. 스님이 아닌 재가불자들 두고, 또 다른 재가불자가 존경을 표한다는 것은 생소한 광경이었다.

“네? 살아있는 부처님이라고요?” “암요. 법왕심 보살님이 몸이 불편하다는 걸 저희도 까먹을 때가 있어요. 병원 계단도 잘 오르고, 얼마나 부지런히 움직이는지 몰라요. 저희가 배려를 해도 모자란데 오히려 배려를 받는 입장이에요.”(웃음)

연 씨는 ‘봉사자들을 위한 봉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봉사자들이 입는 분홍색 조끼를 소리 소문 없이 집으로 가져가 세탁하고, 풀을 먹여 다시 가져다둔다. 부처님 전에 올릴 공양물도 손수 장을 봐 마련한다.

특히 연 씨가 한 손으로 만든 연꽃은 봉사자들 사이에서 1등 자랑거리다. “이 빨간색도, 저 노란색도 우리 법왕심 보살이 한 손으로 만든 것”이라면서 앞 다퉈 자랑한다.

이정옥 봉사자는 “한 손으로 어떻게 연꽃을 저토록 예쁘게 만들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라면서 “힘든 일이 있다가도 법왕심 보살님을 생각하면 불만이 없어진다. 불편한 몸으로도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면 내 삶의 불만도 사라진다”고 웃어보였다.

전상삼 지도법사도 연 씨의 행(行)은 자체만으로도 귀감이 된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환자분들이 법당에 내려와 연 보살님이 열심히 살고 계신 모습을 보면 희망을 얻고 갑니다. 도움을 받기에도 모자랄 분이 남을 위해 헌신하시니, 그야말로 살아있는 부처님이 따로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도반들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 일색일까. 연 씨를 보자마자 ‘연등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 것만으로도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남을 위한 것이 곧 나를 위한 것”이라며 앞으로도 타인을 위한 삶을 살고 싶다는 연명순 씨.

두 다리, 한 팔 잃은 절망 속에서…
연 씨가 병원법당을 처음 찾았을 때는 봉사자가 아닌 환자였다. 유방암 판정을 받고 실의에 빠져있던 중, 약물 부작용으로 인해 극심한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이로 인해 불의의 사고를 겪고 두 다리와 한 손을 잃었다. 2008년 당시 경위와 심경에 대해 조심스럽게 묻자 연 씨가 입을 열었다. “병원 치료 중에 약물 부작용으로 우울증을 겪었어요.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병원 치료 중 사고가 났어요.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그때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자세한 말은 아꼈지만, 담담한 어조였다.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이 아물고 그 자리에 새 희망이 움트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터. 그는 무엇으로 다시 웃을 수 있었을까. 그가 병상에 누워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 같이 곁을 지킨 것은 다름 아닌 ‘불교’였다.

연 씨는 자신의 병실에 찾아왔던 불교호스피스 자원봉사단의 모습을 회상하며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세상 끝에 내몰린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분홍 조끼를 입고 연꽃을 건네는 불자들이었다.

“그들을 보면서 환희를 느꼈습니다.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나는 그동안 나와 가족들만을 위해 살았구나’란 사실을 순간 깨달으며 퇴원하면 타인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후 퇴원하는 그를 다시 한 번 발심하게 한 것은 당시 고려대구로병원 법당을 개원하신 지현 스님이었다. “보살님, 저 좀 도와주세요”란 부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부탁이 연 씨를 휠체어에서 일어나 목발을 짚고, 마침내 두 발로 걷게 하는 힘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처음에는 ‘내가 할 수 있을까’란 걱정이 앞섰어요. 그런데 스님께서 계속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법당 봉사를 시작한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님의 ‘좀 도와달라’는 요청이 ‘나 스스로를 도와라’란 말씀이셨던 것 같아요.”

그 후 연 씨는 독한 약도 끊고 휠체어도 떨쳐 버렸다. 대신 의족과 의수를 차고 봉사에 뛰어들었다. 환자들에게 깊이 있는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공부에도 매진했다. 쉽지만은 않았지만, 힘에 부칠 때마다 교계 신문과 경전, <법공양> 책자를 더욱 가까이 했다. 스스로를 “기복신앙 신도였다”고 말하는 연 씨가 진정한 불자로 거듭난 것이 바로 이쯤이다.

“어렸을 때부터 친정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긴 했어요. 성인이 된 후에는 부처님오신날이면 연등도 달았고, 자주는 아니었지만 법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야말로 기복신앙이었어요. 불교를 ‘공부한다’는 생각은 없었죠. 하지만 봉사하면서부터는 달라졌어요. 주옥같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1번 하기도 힘든 <법화경> 사경도 벌써 4번째 완료했다. 사고 전에는 아들의 대학입시 합격을 기원하며 1번 해본 것이 전부지만, 후에는 자신을 위한 사경에 임했다. 오른손잡이였던 그는 성한 왼손으로 사경에 임하며 왼손잡이로의 훈련도 함께했다.

“사고 전까지는 오른손잡이였기 때문에 왼손에 힘을 길러야만 했어요. 그래서 사경은 제게 수행과 기도인 동시에 훈련과 다름없었습니다. 이제는 왼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요.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현재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오늘의 삶만 열심히 살아간다면 후회도 남지 않습니다.”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연 씨는 지금을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표현한다. “내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저 스스로 계속 행복하려고 노력해요.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찾아가요. 사소한 일이지만 제게 활력을 줍니다. 제가 행복함으로써 병원법당을 찾는 분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길 바라요.”

타인에 희망주려 내 아픔을 꺼내다
매에게 쫓기던 비둘기를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인도 남방 팔리 자타카의 시위왕 이야기. 시위왕은 “어찌 비둘기의 목숨만 귀히 여기는가. 나 역시 비둘기를 잡아먹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란 매의 말에 자신의 살점을 기꺼이 내놓았다. 사실 베풂으로 유명했던 시위왕의 본성을 시험하기 위해 불의 신 아그니와 제석천(帝釋天) 인드라가 각각 비둘기와 매로 변했던 것으로, 시위왕은 이들의 찬양을 받으며 목숨을 구했다. 이 설화는 대승불교가 발전하며 ‘보시바라밀’이란 개념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다.

누군가를 대가 없이 돕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스스로 손해를 보면서까지 돕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숭고한 희생’에 박수를 보낸다.

연명순 씨는 진정한 보시행을 위해 무엇을 내던졌을까. 바로 ‘자신의 아픔’이다. 나의 지우고 싶은 상처가 타인의 위안이 되는 것은 분명 씁쓸한 일이지만, 연 씨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기꺼이 꺼내 보인다. “남을 위한 것이 곧 나를 위한 것이며, 나를 통해 누군가 희망을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 없다. 세상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이라도 나눠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는 게 연 씨의 이유다.

특히 자신과 같은 유방암 환자들을 대할 때는 마음이 더욱 쓰인다. 여성으로서 느끼는 절망과 좌절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몇 해 전, 퉁퉁 부은 눈으로 연 씨의 품에 안기던 미혼의 유방암 환자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미혼의 딸이 유방암이 갑상선까지 전이돼 힘들어 하고 있다면서 어느 날 그 부모님이 법당에 내려오셨어요. 저는 좀처럼 병동에 올라가는 일이 없지만, 그때는 그 환자분을 만나기 위해 병실을 찾았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는 모습을 봤는데, 처음 본 사람이었지만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꼭 끌어안으며 제 이야기를 털어놨습니다. 환자 역시 부모님께도 말 못했던 아픔을 얘기하면서 얼마나 한참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후 환자는 건강을 되찾아 퇴원했다. 문자로 부처님 말씀을 전달하고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지금까지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병원은 생(生)과 사(死)가 공존하는 곳이잖아요. 그 갈림길에선 환자들이 법당에 내려와 부처님께 기도하고 희망의 빛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지 돕고 싶습니다.”

자신이 아파봤기 때문에 아픈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연 씨. 힘든 점은 없냐는 질문에 “위로 보면 한없이 부족하지만 내려 보면 행복할 일만 있다”는 가르침을 이른다. 불평과 불만, 불안으로 가득한 삶에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였다. 연 씨에게서 어떤 어둠도 몰아낼 광명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글=박아름 기자·사진=노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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