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행(禪修行)에 있어서 곧잘 즐겨 쓰는 말 가운데 본분사(本分事)라는 말이 있다. 본분(本分)을 가장 중요시 한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본분이란 어떤 분별과 수단도 허용하지 않는 종사의 법도(法度)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선종의 종지를 완전히 터득한 이상적인 경지로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초탈된 자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실체가 없음에도 자유자재한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경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출가자가 해야 할 일을 두고도 본분사(本分事)라 하였다. 다시 말해 오로지 깨달음을 위해 전심전력 하는 것을 본분사를 위하는 것이라 하였다.

향엄지한(香嚴智閑:?~898)은 위산영우(山靈祐)의 법을 이은 제자이다. 그가 깨달음의 계기를 얻었던 것을 두고 향엄격죽(香嚴擊竹)이라는 말이 생겼다. 〈경덕전등록〉 11권 〈향엄지한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위산이 어느 날 향엄에게 말했다. “그대가 평생 공부해서 이해한 것이나 경전과 책자를 통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묻지 않겠다. 그대가 태어나기 이전 동서남북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을 때의 본분사(本分事)를 한 마디 말해 보라.” 향엄이 영우에게 나아가 여러 가지로 자신이 이해한 바를 진술했지만 영우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향엄이 말했다. “청컨대 화상께서 저를 위해 설해 주십시오.”

위산이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나의 견해일 뿐이니 그대의 안목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 후 향엄은 공부가 잘 되지 않아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였다.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 어느 날 영우 회상을 떠나 행각(行脚)을 나갔다. 남양(南陽)의 무당산(武當山)에 있는 혜충(慧忠) 국사(國師)의 처소에 가 며칠을 지내게 되었다. 하루는 도량을 청소하다가 자갈을 하나 주워 마당 멀리 던졌다. 이 돌이 대밭으로 날아가 대와 부딪치며 ‘딱!’하는 소리를 내었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환희심이 넘친 그는 목욕을 한 뒤 향을 피우고 위산이 있는 쪽을 향하여 예배를 올리면서 속으로 말했다.

“화상의 큰 자비를 입은 은혜는 부모를 넘어서니, 그때 만약 저를 위해 말로 설명해 주셨더라면 어찌 오늘의 깨침이 있었겠습니까?”하고 찬탄을 하였다.

그리고 게송을 지어 읊었다.

“부딪치는 한 소리에 알음알이 잊고, 더 이상 수행의 힘 빌리지 않는다. 움직이는 가운데 옛 진리 드날리며, 고지식한 기틀에 떨어지지 않는다. 어디에도 종적이 없고 소리와 빛깔을 벗어난 위의라, 제방에서 도를 통달한 이들이 모두 그를 최상의 기틀이라 하네.”
(一擊忘所知 更不假修治 動容揚古路 不墮?然機 處處無?跡 聲色外威儀 諸方達道者 咸言上上機)

그 후 그는 향엄산에 머물면서 위산의 종풍을 널리 선양하였다. 향엄은 원래 박학다식하고 언변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불입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의 세계에서 말하는 본분사에 있어서는 그의 학식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학문은 날로 더해 가는 것이지만 도(道)는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라는 말이 있다. 학문의 영역과 도의 영역이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다. ‘대(竹)에 돌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모든 알음알이가 날아갔다’는 말이 묘한 뉘앙스를 남긴다.

향엄은 후에 또 다른 시를 남긴다. 가난타령을 한 시이다.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네. 금년의 가난이 진짜 가난일세.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마저 없어졌다네.”(去年貧未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無卓錐之地 今年錐也無)

〈전등록〉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는 깨달음의 경지를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 혹은 공의 상태로 표현한 지극한 말이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작년에 깨닫고 비로소 주객이 모두 없어진 경지를 체험했다.

다시 말해 무(無)를 체험하고 공(空)을 체험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깨달았다는 희열감 내지 충만감이 꽉 차 있었는데 금년에는 그것마저 사라져버리더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무소득(無所得)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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