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이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나야 자유스러우니라!

저는 이날까지 제가 산다고 생각해 본 예도 없고 제가 한다고 생각해 본 예도 없고 제가 지금 이렇게 잘한다고 생각해 본 바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대덕 스님네들이 이렇게 오셔서 같이해 주시고 같이 사랑해 주시고 같이 한마음으로 이렇게 좋은 말씀을 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못났든 잘났든, 자라든 모자라든 오늘날 이렇게 하게 된 것도 ‘그저 내 정성이면 되지.’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누구에게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자 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에서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낮은 걸 보고도 낮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모든 걸 네 모습으로 보고 네 마음으로 보고

네 아픔으로 보고 네 몸으로 생각해라.

불교(佛敎)가 따로 있는 줄 알고 있는 분들이 많죠. 다른 종교들도 있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뉴욕에 갔을 때 기독교, 가톨릭교 교인들과 신부님들이 모인 세미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 보니까 불교는 그저 미신의 소굴인 줄만 알고들 있더군요. 그러니 너무나 기가 막혀서 이런 말을 했죠. “일체 미생물에서부터 생명은 전부 불(佛)이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면서 배우는 것이 교(敎)다. 그래서 불교라고 하는데 당신네들은 불교 안에서 살면서 불교를 그렇게 말하느냐?” 이런 말을 했죠. “그럼 당신네들도 귀신이겠네.” 하고요.

그렇듯이 불교라는 단어 자체가 그대로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죽는다 해도 불교는 되남는 것입니다. 어디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우리 머리 깎은 사람들이나 하는 것인 줄 알지 마시고 불자들이나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불교다’ 하면 우리 지구뿐만 아니라 삼계 간 온 누리를, 우주 간 모두를 한데 합해서 일컫는 말입니다. 불교라는 이름 자체가 그대로 실지이고 그대로 진리이고 그대로 우리 삶입니다. 따로 불교인이 있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지금 생활하고 가시는 그 자체가 그대로 불교며 그대로 여여하며 그대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 이 세상에 나질 않았다면 뭐가 있겠습니까? 상대성 원리라든가 일거수일투족이 다 없는 것입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것이고 종교도 있고 불교도 있다고 하는 거지 내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느 누구든 부처님 아님이 있겠습니까마는 백지장 하나 사이로 부처다, 중생이다 하겠죠. “우리 인생은 허허바다에 배 띄워 놓은 거와 같으니라.” 한 것은 이 몸을 비유한 거죠. 여러분 몸속에 생명들이 천차만별로 모습을 해 가지고 천차만별의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몸 하나가 우주와도 같고 별성과도 같고 블랙홀과도 같습니다. 이 안에 세계가 벌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벌어진 그 모두를 중생으로 비유했거든요. 이 몸뚱이는 배로 비유하고 안에 들어 있는 생명체들은 전부 중생으로 비유했거든요. 그러니 파도가 치고 온통 바람이 불고 배가 뒤집히려고 하고 이럴 때에 중생들이 어떻게 해야만 되겠습니까? 오직 마음을 선장에게 일임해서 모두 같이하고 마음을 편안히 둬야 그 배는 뒤집히지 않고 갈 곳까지 갈 겁니다.

비유컨대 콩을 심어서 콩나무가 됐다면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죠? 콩씨가 콩싹으로 화했으니까요. 여러분 모습이 콩싹이라면 바로 그 콩싹은 또 콩씨를 열리게 합니다. 자기한테 자기 콩씨를 두고 과거로 돌아가서 콩씨를 찾는다면 아마 백 년이 걸려도 못 찾을 겁니다. 그래서 콩나무가 없어도 콩이 없고 콩이 없어도 콩나무가 없는 것입니다.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입니까? 우리 육신을 일거수일투족 끌고 다니는 것은 나무뿌리와 같습니다. 나무뿌리가 한 나무 전체를 안고 성장시킵니다. 지분과 수분, 철분을 흡수해서 올려보내고 위에서는 공기력과 태양력을 흡수해서 내려보내고, 정맥 동맥이 돌아가듯 이렇게 해서 나무를 성장시킵니다. 푸르르게 살게 말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 뜻이 뭔가를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심사숙고해 보십시오. ‘내 고깃덩어리를 믿어라’ 하신 건 아닙니다. 내 고깃덩어리를 ‘따르라’ 했지 ‘믿어라’ 한 거는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왜 편안치 않게 살아야만 하겠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몸뚱이 속에 천차만별의 의식이 있는데 우리 몸뚱이는 그 생명들에게 뭐가 됩니까? 관리인이 되고 심부름꾼이 되고 집이 됩니다. 집! 그렇다면 여러분이 물 한 컵을 잡수신다 하더라도 혼자 잡수시는 게 있을까요? 더불어 같이 먹는 거니 내가 먹었다고 내놓을 수가 없죠. 안 그럴까요? 내가 먹었다고 할 수가 없죠. 더불어 같이 먹었으니까.

그래서 “색(色)은 일체 공(空)했느니라. 공이 모두 색이니라.” 하셨습니다. 왜 공했다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까, 찰나찰나 화해서 바꿔 가면서 나투니까 어떻게 공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어떤 거 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공한 것이요, 여여한 것이다 했습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태어나서 살면서 고정되게 보고만 있으면 목석이라고 할 겁니다. 그냥 고정되게 듣고만 있으면 귀머거리라고 할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거를 생각해 볼 때에 ‘일거수일투족이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 그대로 내가 한 바가 없이 여여하구나!’ 한 것이 됩니다. 그대로인데, 그렇게 윗눈썹과 아랫눈썹이 가깝게 같이 작용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가까워서 그런지 자기를 못 보는 겁니다. 너무 가까워서 그런지 그대로 여여하게 사시면서도 마음으로는 집착과 관습에 그냥 모두 얽매여 가지고는 오히려 마음이 자기를 붙들고 부자연하게 만들어 놓는 거죠. 사방이 다 터졌는데 말입니다.

보세요. 마음이 체가 있습니까? 체가 있다면 내놔 보세요. 체가 없고 고정됨도 없고, 여기서도 집에 갔다 오시려면 한 찰나에 갔다 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신발이 어디 놓여 있고 내 소지품이 어디 있고, 그런 것까지도 다 아시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얽매여서 트이질 못하고, 물리가 터지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둥글지 못하고 이래서, 남이 길면 긴 대로 길다고 야단, 짧으면 짧은 대로 짧다고 야단, 이렇게 해서 싸움이 일어나고 분별도 하고 이러죠.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짧으면 짧은 대로 네가 짧아 주고 길면 긴 대로 네가 길어 주고 둥글면 둥근 대로 네가 둥글어 주고, 이 세상에 모두 높지 않은 사람이 없느니라.” 내가 배를 타려고 뱃사공한테 간다면 뱃사공이 높고…. 내가 요즈음에 치과에 갔더니 말입니다, 치과 박사님이 제일 높습디다. 아무리 내가 높다고 생각을 해도 그건 망상입니다. 망상! 내가 잘한다고, 내가 잘 안다고 해도 망상입니다. 개미 소굴에 가 보십시오. 개미 소굴에서는 개미가 높습니다. 왜 부처님께서 “이 모두가, 미생물에서부터 일체 만물만생이 다 평등하니라.” 하셨겠습니까?

내가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항상 공했다고 하는 이런 말을 말로만 알지 왜 뜻을 모를까? 모두 내 부모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자식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형제 아닌 게 하나도 없다, 평등하다 하는 그 가운데의 뜻을 왜 모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미생물에서부터 수억겁 광년을 거쳐서 사람까지 화해서 이날까지 왔습니다. 진화됐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나를 형성시켜서 이렇게 지금까지 끌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다 탄생을 해 가지고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안 그렇습니까? 미생물에서부터 말입니다.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이날까지 그렇게 겹겹이 올라오면서 인간까지 성장을 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벌레의 부모라고 그래서 내 부모 아닌 게 없습니다. 과거의 내 모습이니까 말입니다. 내 모습 아닌 게 하나도 없거든요. 그러니 내 모습이고 네 모습이고 간에 내 부모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자식 아님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이, 그 말씀이 부처님한테서 나온 겁니다. 그게 아리송하시겠죠?

지금 육의 부모만 부모가 아닙니다. 내 영원한 근본은 정자 난자를 빌려서 삼합이 합쳐져야 육을 형성시킵니다. 지금만 육의 부모를 두고 이 세상에 나왔을까요? 천만의 말씀이죠. 수억겁을 통해서 아마 생존 경쟁을 했을 겁니다. 잡아먹히고 잡아먹고 이렇게 실랑이를 해 가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나를 그렇게 가깝게 두고도 모르는 겁니다. 나는 그 주인의, 즉 말하자면 종입니다, 종. 종 문서를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종입니다. 주인과 종이 둘 아니게 상봉을 해야만이 우리가 진짜 공부해 나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자기 주인을 이름해서 부(父)라고 하고 자기는 자(子)라고 합니다. 자와 부가 상봉을 해야만이 그때서부터 무의 세계로, 유의 세계로 뛰면서 공부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하시는 분들이 잘못 생각을 하고 가시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왜? 화두를 마음이 준 겁니다. 화두라는 이름을 준 거는 아니거든요. 안 그렇겠습니까? 화두라는 이름을 준 게 아니라, 이름이 없으면 줬다 안 줬다 할 수가 없으니까 화두라는 이름을 준 겁니다. 어느 스님네고 마음을 주었지 화두라는 이름을 준 거는 없거든요. 그러면 받아들일 때, 자기 영원한 근본이 물 한 방울이라고 치면 그 영원한 근본을 둘 아니게 수만 개를 넣는다 하더라도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대로 영이죠. 그러니 그대로 한마음이죠. 그렇게 해서 그 한마음 가운데에 ‘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잖아.’ 하고 놓는 것입니다. ‘내고 들이는 것이 바로 너니까 네가 있다는 것을 네가 증명을 할 수 있잖아.’ 하고 자꾸 놓는 것이죠.

일거수일투족을 움죽거리게 하는 것도 너, 잘되고 못되게 하는 것도 너, 잠자고 깨어나게 하는 것도 너, 일체가 다 너죠. 너라고 해도 좋고 부처라고 해도 좋고,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고 부(父)라고 해도 좋고, 자기가 친근하게 닿을 수 있는 이름으로 방편을 대도 좋지요.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보살들을 자기가 생산시켰습니다. 한마음으로서 이 몸뚱이 속에 있는 그 생명체들을 전부 보살로 화하게 해서 털구멍을 통해서 들고 나게 만들고, 낮고 높고를 떠나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가리지 말고 모두 응신이 돼 줘라 하는 뜻에서 천백억화신이 그 모든 중생들에게 응신으로 나투어 주신다고 하셨던 겁니다.

여러분 몸속에서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현재에 모두 주둔하고 있는데, 이런 게 있죠.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유전성 인과성 업보성 세균성 영계성, 이 다섯 가지가 몸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적으냐 많으냐 하는 차이뿐이지 다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내가 태어났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부처도 내가 가지고 있고 인과응보도 내가 가지고 있고 다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 모두를 이끌어 갈 수 있고 스스로 그냥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그 다섯 가지가 있다면 오신통이라는 다섯 가지가 또 있죠. 그 육통을, 육신통이라는 이 통 속에서 벗어나야만이 누진으로써 자유스럽게 들이고 낸다 이런 말이죠. 내가 말을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래서 보는 거 천안통, 듣는 거 천이통, 또는 신족통, 타심통, 숙명통이라는 다섯 가지의 오신통 자체 속에 유전성 영계성 인과성 업보성 세균성이라는 다섯 가지의 그 모든 것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그 자체는 뭐냐? 우리가 지금 시쳇말로 따지자면 오신통을 컴퓨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컴퓨터라고 한다면 그 다섯 가지 문제를 들이고 다섯 가지 문제에서 풀려서 현실로 나가고 또 들이고 하는데, 내고 들이고 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또 입력이 된단 말입니다. 참 묘하게 생겼어요. 입력이 되는 대로 자꾸 그게 누적이 되니까 누적되게 하지 마시고 그 나오는 자리에다 다시 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이 없어지지 않느냐 이런 소립니다. 그러니 놈이라고 하면 어떻고 부처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오직 한 놈 속에서 들이기도 하고 내기도 하는 걸요. 그러니 그 구멍이 아니라면, 구멍 없는 구멍이 아니라면 절대로 무의 세계에는, 궁전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궁전에 들어서야만이 현실의 모든 법을 감지하면서 무의 세계에서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가 나지 않게 둥글리면서 진짜 공부는 그때서부터 하는데 그것이 점수입니다. 점수라고 일컬어 말하는 거죠. 돈오와 점수가 어떻게 둘이겠느냐. 돈오는 어린애를 금방 낳은 거와 같고, 점수는 어린애를 키우는 거와 같다 이런 겁니다. 키우는 거하고 낳는 거하고 뭐가 다릅니까?

선과 학도 둘이 아니요, 생활과 부처님 법도 둘이 아닙니다. 우리 생활 자체가 그대로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이고 우리들의 법이자 우리들의 재료입니다. 공부할 수 있는 재료! 법당에 들어가서도 삼정례를 한다, 칠정례를 한다, 팔정례를 한다, 또 백팔배를 한다, 삼천배를 한다 이러는데, 옛날에 제가 걸음을 걸을 때에 한 걸음을 걸은 거와 삼천 걸음을 걸은 거와 맞먹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길이 산길이 아니고 들길이 들길이 아니고 그대로 한생각이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그렇게 하면서 살고 계신데 그걸 납득을 못해서 그럽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진짜로 믿고, 자기 콩싹이 자기 콩씨를 진짜로 믿고 ‘하! 영원한 친구구나. 네 몸이 이렇게 불편해서 쓰겠니? 네 집인데 주인이 고쳐야지 누가 고치겠니? 사사 집도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자기 집을 고치게 마련인데 아, 네 집을 형성시켰으면 네가 고쳐야지.’ 하고 그렇게 웃으면서 내뜨릴 수 있다면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생활이 될 겁니다. 참으로 좋고 묘하고 말로는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아래 위 중간, 즉 대천세계 중천세계 하천세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둘이 아니게 둥글려서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지만, 법도를 지키려면 바로 하천세계는 하천세계고 중천세계는 중천세계고 상천세계는 상천세계입니다. 즉 말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있으면서도 따로 없다. 한 찰나에 과거고 한 찰나에 미래고 한 찰나에 현실인데, 우리가 죽어서 과거로 가서 또다시 미래를 향해서 현재로 다시 오는 거는 어느 생명체도 다 똑같습니다. 지옥이 따로 있고 극락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가만히 보세요. 현재 세계에 모두 지옥이 있고 극락이 있지 않은가 잘 보세요. 눈 크게 뜨시고요. 그리고 그 지옥을 만드는 것도 자기요, 극락을 만드는 것도 자기입니다. 자기 마음이 그렇게 묘하고 미묘하고 광대한데 그런 마음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거기서 나오는 거죠.

이 마음이 정말이지 아주 기묘하고 마음이라는 그 이름이 이 세상을 다 삼키고도 남고, 그 마음이 이 세상을 다 끌어당길 수도 있고 집어삼킬 수도 있고 뱉어 놓을 수도 있고, 마음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권도라고 할까요? 권도! 자유 권도!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몰라서 잘못한 사람을 잘못했다고 때려 주면 안 되느니라.”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가 아니라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부처님 한자리에 사신다고 생각을 하고 본다면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그 부처님 법을 그대로 알게 될 겁니다. “넓게 살아라. 둥글게 살아라. 낮은 걸 보고도 낮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모든 걸 네 모습으로 보고 네 마음으로 보고 네 아픔으로 보고 네 몸으로 생각해라. 수억겁을 거치면서 부모가 안 됐던 게 없고 자식이 안 됐던 게 없고 형제가 아니 됐던 게 없으니 부족하더라도 모두 옛날 네 모습으로 봐라. 모든 것이 평등하니라.” 하신 뜻을 아실 겁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한 치도 내다보지 못하고 삽니다. 한생각이 그렇게 중요한 것을, 미래를 가져오고 과거도 현실로 끌어올 수 있고 미래도 끌어다가 바로 현실로 놓을 수 있는 그 미묘한 법을 그대로 방치한단 말입니다. 그대로 방치하면서 그대로 남의 탓만 하고 남이 모자란다는 생각만 하고 남이 잘못한다는 생각만 하고, 나는 이만하면 법랍이 어떻고 나는 이만하면 뭐가 어떻고 이런 생각만 해서 되겠습니까?

그리고 죄송하지만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비구는 비구니까 성불한다는 생각에서 그만 잘못되고, 비구니는 성불 못한다는 데서 그만 잘못됩니다. 하늘이 비구라면 땅은 비구니입니다. 산하대지의 모든 일체 만물만생을 길러 내는 어버이입니다. 젖소로 따진다면 비구가 젖소라면 비구니는 젖일 것입니다. 모두가 둘이 아닌 그 따뜻한 마음, 한 아름으로 비구 스님네들은 모두…. 땅에 박힌 돌 하나도 부처 아닌 게 없다고 하셨는데, 공안 아닌 게 없고 부처 아닌 게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고 내 마음 아닌 게 없고, 내 몸 아닌 게 없고 내 도량 아닌 게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어째서 그렇게 자기네들 심부름 해 주는 그 사람들을 그렇게 무시하느냐 이런 거죠. 심부름을 부려먹어도 좀 더 너그럽고 지혜롭게 팔 아름이 이 세상을 다 안고도 남음이 있게끔 안는다면 세상에 뭐가 부러울 게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때로는 비구가 됐다 때로는 비구니가 됐다가, 때로는 작부가 됐다가 때로는 짐승이 됐다가 미생물이 됐다가, 이렇게 천차만별로 화해서 바뀌고 나툰다고 하셨는데 어떤 거를 할 때 비구니라고 하고 어떤 거를 할 때 비구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한국 불교의 중흥을 이룩하고 한국 불교를 리드해 나가려고 한다면…, 지금 청소년들이나 우리 한국의 모든 것이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경제적 발전은 되었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얼마나 집을 튀어나가는지 아십니까? 얼마나 나쁜 짓을 하는지 아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승가대학을 좀 더 마음으로라도 뒷받침을 해서 거기서 금같이 굳고 대쪽같이 바르고, 넓기로 말하면 우주를 싸고도 남음이 있는 그런 스님네들이 배출되기를 바라면서 마음으로 항상 염원하고 있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물에서 노는 고기들은 물 밖에 나오면 죽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도 공기주머니에서 나오면 죽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가긍히 생각하시고 “너희들이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나야 자유스러우니라.” 하셨습니다. 너무나 가긍해서 부처님께서 우리를 일깨워 주시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팔만대장경입니다. 죽는 것도 생각 안 하고 몸이 쓰러지는 것도 생각 안 하고, 먹는 것도 생각 안 하고 주는 것도 생각 안 하고 받는다는 생각도 없이, 오직 건질 생각만 하시고 그렇게 팔만대장경을 말씀하셔서 우리를 일깨워 주신 건데, 우리가 첨단은 넘어설 수 없을지언정 그 말씀만은 실천으로 옮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린 지금 공기주머니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갇혀서 사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자세히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내가 생각해 보니까 그래요. 이 육신통, 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 지구 속에서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여러분은 심안으로 보기만 해도 도라고 그러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보는 것도 도가 아니고 타심통, 남의 마음을 다 잘 아는 것도 도가 아니니라. 또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간다 하더라도, 구름을 타고 다닌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자기가 어디서 나온 줄 안다고 해도 도가 아니니라. 자기가 모든 것을 듣는다고 해도 도가 아니니라. 그 다섯 가지 통 속에서 벗어나서 대뇌에서 자유자재권을 얻어야 되느니라. 대뇌라는 것은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고 세상하고도, 모든 일체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과도 가설이 돼 있습니다. 참 이거는 여러분이 잘 아셔야 될 겁니다. 그래서 내가 혼자 있을 때 사람을 죽였다 해도, 아무도 못 봤다 하더라도 천지가 다 보고 있는 겁니다. 가설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5년 10월 8일 부산대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 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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