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절로 가는 길 - 불갑사에서 용천사 가는 길

용천사 천불전 앞에 가득 핀 꽃무릇, 생사해탈에 이르지 못하는 중생의 안타까움과 불법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듯 붉게 길과 사찰을 장엄하고 있다.

심야버스가 법성포공용터미널에 닿았을 때, 꽃무릇은 지고 있었다. 그 지는 꽃무릇이라도 보려면 법성포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한 시간은 족히 가야 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부터 공연히 마음이 갈급했다. 꽃 때문에, 그것도 지는 꽃 때문에 마음이 급해지다니. 태어나서 처음 겪는 감정에 버스 유리창을 비춘 얼굴에서 슬며시 웃음이 떠올랐다.

마라난타 그리는 사찰

그리움 꽃 상사화 피다

낙조와 월출, 생사 논해

꽃무릇의 개화기는 9월 중순이나 말부터이다. 그때부터 보름 동안 꽃으로서 세상이라는 무대에 선다. 왜 그런지 다른 꽃에 비해 공연시간이 짧은 편이다. 그 시기가 지나면 화장을 지운 여배우처럼 시들하게 꽃대 위에 서 있다가 마침내 땅에 지고 만다. 늦가을 꽃대까지 쓰러진 꽃무릇을 보면 과연 저것이 꽃이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잎은 그때 난다. 하필이면 꽃 진 자리를 더듬듯 바닥에 엎드린 자세여서 애처롭기 짝이 없다. 이 모습을 보고 누군가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은 꽃을 보지 못한다’는 상사화의 게송을 만들어 냈다.

불갑사(佛甲寺)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법성포를 둘러보았다.

법성포에 사는 사람들은 법성포의 법은 불교를, 성은 인도에서 온 성인 마라난타를 의미한다고 믿고 있다. 마라난타가 중국의 동진을 거쳐 우리나라로 올 때 법성포에 상륙하여 불갑사를 짓고, 나주에서는 불회사를 지은 후 서울로 갔다면서 불교의 해로유입설을 설명한다.

불갑사에 도착하니 듣던 대로 꽃은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한마디로 잔치 끝물이었으나 흥건한 기운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다. 꽃무릇은 절집 담장 밑에 자란다더니 불갑사 담장 곁에도 수십 송이가 지각생처럼 손을 들고 서 있다.

불갑사는 동트는 하늘에서 돌아앉아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서방정토를 그리는 아미타 사상이 그 밑그림이지만, 서해를 건너 백제로 온 마라난타를 기리는 마음에서 그렇게 배치한 것으로도 전한다. 마라난타가 지은 첫 절이라 해서 부처 불(佛)에 으뜸 갑(甲)을 붙였지만 정작 이 절의 창건주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돌계단을 오르면 천왕문과 만나는데, 그 안에서 목조 사천왕상이 눈을 부릅뜨고 서 있다. 전북 흥덕 연기사에 있던 사천왕을 고종 7년에 설두선사가 불갑사에 옮겨온 걸작이다.

보물인 대웅전과 고려 공민왕 8년에 이달충이 세운 진각국사비가 경내 볼거리이고, 절 밖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참식나무가 눈길을 끈다. 녹나무과에 속하는 난대 수종으로 가을이면 암꽃과 수꽃이 각각 다른 그루에서 피는 이 특이한 나무에도 상사화 못지않은 애틋한 전설이 오래전부터 내려온다.

불갑산 호숫가에 핀 꽃무릇

역시 인도 이야기였다. 신라의 경운 스님이 인도에 유학 갔을 때였다. 스님의 학식과 외모에 인도 공주 진희수는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공주는 스님을 사모한 나머지 평민이 입고 다니는 사리를 입고 몰래 절을 찾기도 했다. 스님 또한 진희수를 사랑해서 모시로 짠 가사와 미영으로 물들인 천을 선물했다. 그러나 공주의 부왕이 두 사람의 사랑을 극구 반대하여 경운스님을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진희수는 서럽게 울면서 스님을 배웅했다. 고국으로 떠나는 경운스님에게 진희수는 내세의 인연을 기약하는 증표로 작은 참식나무가 든 화분을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불갑사로 돌아온 경운 스님은 참식나무를 정성껏 심었다. 세월이 흘러 노승이 된 경운 스님은 참식나무 그늘에 앉아 ‘같이 있어도 같이하지 못하듯, 함께하지 않아도 같이 있음’을 되뇌면서 열반에 들었다. 그러자 스님이 좌정했던 참식나무에서 꽃이 피어올랐다.

“당신이 주신 가사로 사리를 만들었어요. 그걸 입은 나를 보러 언제 이곳에 오시나요?”

마치 진희수가 꽃으로 피어나서 스님에게 읊조리는 것 같았다. 그때 사람들은 스님의 열반송과 홀연히 꽃이 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불갑사 참식나무 숲은 내세에서의 사랑이 결실을 본 듯 무성하다. 꽃무릇 보러 왔다가 참식나무 숲에 붙들린 자리에 서서 나는 그리움에 대해 생각했다. 문득 며칠 전에 지하철에서 본 어느 결혼정보회사의 홍보문구가 기억났다. ‘누구나 결혼할 수 있으나 누구나 잘할 수는 없다’ 나는 한동안 멍했었다. ‘잘’이란 부사어에 함축된 극도의 이기심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경운 스님과 진희수 사이의 그리움을 우리 사회에 복원할 방도는 없을까. 남자와 여자 사이의 간격을 출신과 학력과 재력과 용모로 압축해버리는 요즘 같은 정보화 세상에서 인간성 회복을 위한 사회적 생산력으로 그리움을 작동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식나무 숲을 나오면서 나는 등산화 끈을 조였다. 불갑산 연실봉 516m에 올랐다가 용천사로 내려갈 요량이었다. 동백골로 들어서는 길에 커다란 담수호가 고여 있었다. 카메라를 멘 사람들이 허리를 굽힌 채 호숫가를 거닐었다. 삼각대를 받쳐놓고 카메라 렌즈로 땅을 탐사하는 무리도 보였다. 물안개 핀 호수 위로 아침 햇살이 번지는 시간이었다. 물안개가 걷히는 물가에서 늦게 피어난 꽃무릇이 그림자를 호수에 드리운 채 물속에서도 빨간 꽃을 피워냈다. 그 곁에서 몇몇 사람들이 신명이 나서 꽃무릇을 찍어댔다.

불갑사에서 용천사 가는길의 꽃무릇

사진작가들 곁에서 나 또한 꽃무릇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군락을 이루지 않고 호숫가에 불쑥 피어난 꽃무릇은 저 홀로 요염했다. 이파리 한 장 없는 꽃대 위에서 꽃잎은 추어올린 속눈썹처럼 여러 갈래로 뻗었는데, 그 한가운데서 가늘고 구부러진 바늘들인 양 꽃술이 떨고 있었다. 화려한 외양과 달리 향내를 거의 풍기지 않는 꽃이었다.

호수를 따라난 길은 동백골로 이어지고, 거기서 산길을 따라 구불구불 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꽃무릇이 덮고도 남았을 산기슭이 푸른색으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정상이 가까운 산기슭에서 불갑사의 산내 암자인 해불암이 나타났다. 낙조를 전망하는 곳으로 유명한 암자이다. 칠산(七山)바다를 붉은빛으로 물들이며 지는 해를 이곳 사람들은 우리나라 으뜸으로 친다.

내리막길인 구수재 능선을 사이에 두고 불갑사와 용천사가 있다. 구수재는 두 절의 스님들이 오가는 길로, 영광 불갑산과 함평 모악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고개이다.

꽃무릇을 다시 만난 곳은 서해안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는 용천사였다. 대웅전 층계 앞에 있는 용천(龍泉)이라는 샘에서 유래한 절 이름이다. 이 샘에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 현재의 사찰은 6·25전쟁 때 불에 타 중창한 것이지만, 그 이전에도 몇 차례의 전란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 있다. 정유재란의 화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선조 때 중창했고, 인조와 숙종 때도 중건과 중수를 거듭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용천사 석등과 해시계가 볼거리지만 용천사 역시 꽃무릇 피는 시기에 절정기를 맞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다. 부처는 이 애별리고(愛別離苦)가 거역할 수 없는 현실임을 직시하라고 했다. 불교에서 우연은 없다. 어떤 우연한 만남도 인연 때문에 생기는데, 가혹하게도 이 세상에서 맺어진 모든 인연은 헤어짐이란 필연을 겪어야 한다. 꽃무릇이나 참식나무에 대한 연민은 궁극적으로 만남과 헤어짐 사이에 가로놓인 그리움이다.

걷는길 : 불갑사 - 동백골 - 해불암 - 구수재 - 용봉 - 용천사

거리와 시간 : 6km 정도, 5시간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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