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 스님 (75ㆍ전국교도소재소자교화후원회장)

삶의 절망 속에서 한 소년은 출가자가 됐다. 그리고 그 소년은 다시 절망이 흐르는 교도소에서 희망을 전하기 시작했다. 50여년이 흘러 소년은 노스님이 되었지만 마음만은 희망을 품고, 전하는 소년 그대로였다.

인간에겐 공기와 물 등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다. 아울러 삶의 차원에서 필요한 것들도 있다. 그 중에서 ‘자유’는 삶의 공기이자 물일 것이다. 하지만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이들도 있다. 재소자들이다. 그들 중에는 자유뿐만 아니라 ‘삶’을 반납해야 하는 이들도 있다. 사형수들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시비(是非)에 앞서 함께 두 손을 모아야 할 공업(共業)이다. 50여 년 동안 이 공업참회에 평생을 바친 이가 있다. 전국의 재소자들을 찾아 교화설법을 하고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준 삼중 스님이다.

삶과 죽음을 건너서
삼중 스님은 이 세상에 온 지 겨우 1년이 되던 즈음에 죽음의 문턱에 선다. 스님의 부친도 죽음의 문턱에 있었다. 양쪽 모두 순간을 쪼개가며 숨이 붙었다 떨어지기를 주고받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상대를 위해 먼저 가기를 다투는 듯했다. 이윽고 아이가 죽고 아버지가 살았다. 병원으로 가던 중 아이는 숨이 끊어졌다. 병원에 도착했지만 아이는 사망선고를 받았다. 모친이 스님을 업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노상에 좌판을 펼친 할머니가 눈물범벅이 된 새댁과 등에 업힌 아이를 보게 된다. 안쓰러워진 할머니가 스님의 모친을 불러 세워 묻는다.

“새댁 왜 그러우?”

“…아이가 죽었어요.…”

등에 업힌 아이를 살펴본 할머니는 스님의 모친에게 자신이 팔던 약초 한 뿌리를 건넨다. 집으로 돌아온 스님의 모친은 할머니가 시킨 대로 약초를 급히 다려 아이의 입에 부었다. 그 때, 스님의 부친이 누워있는 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부친의 사망 소식이었다. 부친의 부고가 전해지자마자 아이가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이번엔 아버지가 죽고 아이가 살았다. 결국 아버지가 먼저 죽음의 길을 밟았다. 스님의 삶은 그렇게 삶과 죽음을 힘겹게 건너며 시작됐다.

숙연의 시작, 서대문형무소
아버지를 여읜 스님은 친가를 나와 외가로 옮겨 살게 된다. 친정으로 돌아가야 했던 스님의 모친이 스님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당시 스님의 외가는 서울 서대문형무소 뒤였다. 스님은 유년기를 형무소 담벼락 밑에서 보낸다. 어느 날, 구슬치기를 하며 놀던 스님은 푸른 옷의 재소자들을 처음 보게 된다. 그들은 간수의 총부리 끝에 줄을 서서 노역장으로 끌려 다녔다. 스님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됐지만, 왠지 그 사람들이 불쌍했어요. 그래서 그 때, 훗날 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의 ‘삼중’은 아마도 거기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어요.”

젊었을 적 삼중 스님이 교도소에서 열린 체육대회에 참여해 함께 달리기를 하고 있다.

50년 전국 재소자 교화

서대문형무소 뒤편 살며
재소자들의 삶 알게 돼
1967년 대구교도소 전법
투석하며 현재도 교도소 찾아

사형수들의 대부 자임

300여 사형수 마지막 지켜
“사형수 얼굴이 부처님 얼굴,
교화하는 제가 오히려 배워요”
억울한 사형수 감형 돕기도

절망, 그리고 또 절망
스님도 어느덧 사춘기를 맞는다. 철이 들기 시작한 소년은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첫 번째로 소년의 마음을 예리하게 지나간 것은 어머니의 삶이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어머니였다. 어머니이기 이전에 여자였다. 소년은 자신이 어머니의 삶에 적지 않은 장애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없는 삶도 편치 못한 삶이었지만, 편치 못한 어머니의 삶을 지켜보는 일도 사춘기 소년에겐 편치 못한 삶이었다. 열일곱 살, 누가 시킨다고 하고, 말린다고 하지 않는 시절이 아니다. 마음속에 들어선 것이 있으면 그것부터 해야만 하는, 못 말리는 시절이다. 스님은 외가를 나와 한 살 때 떠나온 친가를 찾아간다. 하지만 스님은 친가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삶은 쉽지 않았다. 절망뿐이었다. 길이 없는 사춘기 소년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길은 ‘자살’이었다. 스님은 다량의 수면제를 미련 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하지만 스님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돌아온다.

다시 삶을 시작한 스님은 무작정 대구로 간다. 스님은 피를 팔아 역전에서 노점을 시작해보지만 그 역시 스님에겐 삶이 되지 못했다. 어린 소년이 홀로 버티기엔 힘겨운 세상이었다. 여전히 스님에겐 죽음도 삶도 쉽지 않았다. 절망의 연속이었다.

절망에서 출가로, 청담 스님을 만나다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소년은 어느 날, 거리에서 승복을 입고 지나가는 스님을 보게 된다. 순간 소년은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 되자.”

절망 속의 소년이 우연히 지나는 스님을 보고난 후 일으킨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인연은 그런 것이었다. 스치고 지나가는 승복자락이 숙연의 실마리였다. 소년의 머릿속엔 해인사가 떠올랐고, 그 길로 해인사로 향했다. 그리고 청담 스님을 만난다.

“왜 왔느냐?”

“스님이 되고 싶습니다.”

“본래 꿈이 스님은 아니었을 터, 무엇 때문에 마음이 바뀐 것이냐? 중은 평생 누더기 입고 살아야 하는 일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절을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시절이었다. 절이라고 해도 오는 사람들을 다 받아줄 수는 없었다. 갈마를 거쳐야했다.

“영원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문득 소년의 머리를 스친 생각은 그것이었다. 숙연의 실마리는 또 있었다. 그렇게 소년의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온 문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때까지 소년의 삶을 그려보면 그 문장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 답변은 소년의 입에선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말이었으나 주지 스님의 입장에서 보면 한 자도 버릴 것이 없는 답변이었다. 부처님에서 시작된, 출가의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니던가. 소년은 머리를 깎는다.

일본교도소에서의 교화활동 모습.

“재소자 눈물 닦아준 교도소, 내평생 수행도량”

사회활동도 활발히 펼쳐

재일교포 김희로 구명운동
안중근 의사 유해찾기 30년
1993년 유묵 발견 성과도
“안중근, 거룩한 사형수”

교화의 시작…푸른 옷의 기억
“부처님은 힘겨운 중생을 위해 사바에 오셨습니다. 편안하고 행복한 사람들보다는 가난하고 아픈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는 것이 제 소임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삼중 스님은 1967년부터 대구교도소를 시작으로 재소자 교화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교화활동을 하고 있는 목사나 신부는 많았으나 스님은 없었다. 우연히 법사를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간 곳이 대구교도소였다.

“여러분들과 저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머리모습도 비슷하고요. 옷 색깔도 비슷하고요. 고무신을 신은 것도 비슷합니다.”

스님의 교화활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재소자들과의 만남이 거듭되면서 스님은 사형수들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스님의 마음에 그들이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문턱과 삶의 벼랑 끝을 오가며 누구보다 생사의 간격을 진하게 체험했으며, 그 생사의 간격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어려운 물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스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스님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마음이 기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스님의 교화활동은 우연히 시작됐지만 그것을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으리라.

“푸른 옷의 재소자들 앞에 선 순간, 어릴 적 서대문형무소 담장 밑에서 보았던 그 사람들이 생각났어요. 그리고 그때 품었던 마음과 원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아! 이 길이 나의 길이구나.”

“법문은 그들이 합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죽음 앞에 선 사형수의 모습엔 부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생사일여’를 그들에게서 봅니다. 법문은 그들이 합니다.”

1989년 8월 4일, 서울구치소. 삼중 스님이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사형수 고금석의 사형이 집행됐다. 고 씨는 1986년 서울 역삼동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때, 조 씨 등 네 명을 살해한 죄로 사형수가 됐다. 고 씨는 삼중 스님을 만나면서 참회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너무나 평온한 모습으로 마지막 길을 떠난다. 집행 당일 오히려 <반야심경>을 독송하던 스님이 독송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고 씨가 담담한 목소리로 끊어진 <반야심경>을 이어갔고 다시 스님이 경을 독송했다. 사형수 고 씨는 미소를 지었고, 사형수의 마지막 길을 편안하게 지켜주어야 할 스님은 오히려 펑펑 울었던 것이다. 그 동안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세월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형수 고 씨는 스님이 열어준 교화의 길을 한 발 한 발 걸었고, 스님은 사형수이기 이전에 뜨거운 가슴을 가진 한 인간의 진한 참회를 볼 수 있었다. 의식이 끝나고 형이 집행되기 직전, 도리어 고 씨가 스님을 위로했다.

“스님, 죽음은 없다고 하셨잖아요. 스님 울지 마세요. 그래야 제가 편히 갈 수 있습니다.”

그 날, 고 씨는 자신의 콩팥과 안구를 기증하고 피안의 길로 떠났다.

2014년 8월 안중근 의사 유묵 기증식.

삼중 스님의 손에는 늘 두 개의 염주가 들려있다. 하나는 앞서 말한 고 씨가 생전에 <금강경>을 새겨 넣은 것이고, 또 하나는 스님의 노력으로 사형에서 감형되고 석방까지 된 최 모 씨의 것이다. 최 씨의 염주 알에는 ‘필귀가(必歸嫁ㆍ반드시 집으로 돌아간다)’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는데, 최 씨의 감형과 석방은 염주 알에 새긴 그 ‘필귀가’를 삼중 스님이 보면서 시작됐다. 사형수 양 씨 역시 스님의 노력으로 인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스님은 일본 교도소에 갇힌 우리나라 재소자들까지도 관심을 가졌다. 1980년대부터 일본 교도소에서 교화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한국인 차별에 격분해 일본인 야쿠자를 살해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재일교포 김희로가 1999년 석방돼 우리나라로 돌아오기까지 10년 간 구명운동을 펼쳤고, 가장 거룩한 사형수라고 생각하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와 유묵을 찾는데도 30년 세월을 바쳤다. 1993년 스님이 일본에서 찾아낸 안중근 의사의 유묵 ‘경천’은 서울대교구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현재 이탈리아 로마 교황청 바티칸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삼중 스님은 몇 해 전부터 심부전증으로 인해 이틀에 한 번씩 혈액투석을 하고 있다. 귀도 어두워져 보청기를 끼어야 한다. 그런 불편한 몸이지만 스님은 지금도 여전히 사형수를 만나고 있다.

“제가 이틀에 한 번씩 투석을 해야 할 만큼 힘들지만 그 힘든 투석을 견디고 아직도 사형수를 만나는 이유는 그들을 통해 영원한 삶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오늘’은 저를 비롯한 구치소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오늘’과는 다른 하루입니다. 그들은 내일이 없는 오늘을 살면서도 저보다, 우리보다 더 평온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틀에 한 번 죽음 앞에서 돌아옵니다. 그렇게 삶의 끈을 붙들고 있는 제 모습을 보고나면 그들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러 갑니다. 그들을 만나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제 마음을 전하고 나면, 그들이 저에게 법문을 합니다. 말없이 법문을 합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평온한 모습을 보고 돌아올 때, 저의 가슴속은 그들의 법문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법문하러 갔다가 법문 듣고 옵니다. 결국 제가 그들을 교화한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통해 서로 교화된 것이죠. 어느 한 쪽만 가르침을 준 것이 아닌 것이죠. 평생 재소자 교화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생각은 50여 년 제가 공부하러 다녔습니다.”

삼중 스님은 50여 년 동안 수많은 재소자들에게 교화설법을 해왔으며, 300여 명의 사형수를 만나 그들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스님은 경전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그들에게서 배우고, 선방에서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을 구치소에서 깨닫는다고 했다.

“일체 유위법이 꿈과 환상과 물거품과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은 관을 지으라.”

스님은 사형이 집행되는 날이면 사형수에게 <금강경>의 위 구절을 들려줬다. 1997년 이후 우리나라에선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사형수들의 ‘오늘’은 힘겨운 시간일 것이다. 한 순간의 어긋난 마음으로 죄를 지었지만 누구보다 부처님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그들이 있기에 스님은 힘겨운 다리와 어두운 귀를 이끌고 오늘도 그들을 만나러 간다.

삼중 스님은…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해인사에서 출가했으며, 경북 용연사, 개운가, 화엄사 주지를 지냈다. 전국교도소재소자교화후원회장, 법무부갱생보호위원, 서울구치소교정위원, 서울소년원 소년보호위원, 이총ㆍ비총호국영령위령탑건립위원장, 일본안중근의사추모기념비 보존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계종 종정 표창, 조계종 총무원장 표창, 교정대상(1986), 국민훈장 목련장(1990), 대한적십자 박애금장(1992) 등을 수상했다. 일본, 태국, 대만, 중국, 뉴질랜드, 영국 등에서도 교화활동을 펼쳤다. 저서로는 <통곡하는 사람들> <사형수 어머니들이 부르는 통곡의 노래1, 2, 3> <빈몸으로 왔다 빈몸으로 가는 것을> <사형수들이 보내온 편지1, 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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