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돈황 막고굴 미술의 우수성

돈황 막고굴 제45굴 전경. 이곳의 칠존상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현대불교 자료사진

돈황 막고굴. 만약 그곳을 미술관이라 한다면 내가 가장 아끼는 미술관의 하나이다. 막고굴은 세계 최고의 벽화미술관이다. 사막 한가운데의 절벽을 파 석굴을 마련한 다음 이룩한 숱한 미술품들, 이는 한마디로 불가사의의 산물이다. 그래서 세계의 학계는 이를 ‘돈황학’으로 특화시켜 독립학문으로 우대하고 있다. 중국은 돈황 하나만 갖고도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국가임을 자랑할 수 있다.

돈황 석굴, 최고의 벽화미술관
4만5천㎡ 달하는 벽화에 매료
독특한 彩塑 불보상들도 눈길
제45굴 칠존상, 아름다움 극치


나는 1988년 처음 막고굴을 참배한 이래 10번 이상 그곳을 갔다. 어느 해는 정월 초하루를 돈황에서 맞기도 했다. 연말연시를 사막에서 보낸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정월 초하루에 썰렁한 석굴을 산책하는 기분은 경험자 이외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막고굴 부근에서 사는 친구를 둔 덕분이었다.

물론 돈황은 일반적으로 여름철에 방문객을 많이 맞는다. 내가 처음 석굴을 찾았을 때는 그야말로 석굴은 헐렁했고, 부분적으로 벽화나 불상 파편이 바닥에 흩어져 있기도 했다. 관리의 손길이 부족할 때였다. 그러던 막고굴은 뒤에 보존의 이유로 모조석굴을 만들게 했고, 일반 관광객은 그곳으로 안내하게 했다.

물론 일반 공개하는 원형 석굴의 숫자는 줄기 시작했다. 게다가 A급은 별도의 비싼 관람료를 요구하거나 아예 폐쇄했다. 막고굴은 유명 관광지로 점차 각광을 받았다. 월아천이 있는 모래 능선은 모래 썰매장으로 바뀌었고, 또 낙타 타기 관광상품도 흥행에 한몫했다. 막고굴은 그렇고 그런 관광지의 하나로 ‘전락’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의 발길은 그곳으로부터 멀어졌다. 시끄러운 관광지는 나의 체질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고굴 근처의 유림석굴은 작은 규모이지만 나름대로 운치 있는 석굴이다. 특히 미륵변상도 등 아름다운 벽화가 있는 석굴은 보배 그 자체이다.

그건 그렇고, 막고굴의 예술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무엇보다 벽화를 주목해야 한다. 막고굴 벽화의 면적은 4만5천㎡의 규모이다. 화려한 원색의 향연, 그러면서도 다양한 이야기와 형상들, 한마디로 벽화예술의 극치이다. 돈황 벽화의 내용은 불상 그림, 불교 고사화(故事畵), 도교화(道敎畵), 경변화(經變畵), 불교사적화, 공양인 모습, 장식도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불상은 석가모니불을 비롯 여래와 보살상 등이다. 다만 막고굴 보살상의 특징은 여성으로, 그것도 당대 최고의 미인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벽화 속의 미인형 보살은 그렇다 치더라도 채소(彩塑)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점만 가지고도 돈황 벽화는 당대 최고수준의 미술가를 초청하여 현장제작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사화는 불경 속의 옛 이야기를 일컫는다. 제290호 석굴의 고사화는 길이가 25미터이며 87가지의 장면을 표현했다. 만화처럼 구획을 주어 연이어 그리는 연환화(連環畵)의 초기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도교화는 도가의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다. 서왕모, 복희 여와, 사신도 등을 일컫는다.

제285석굴의 천정은 고대신화의 신선세계를 표현한 바, 복희 여와 혹은 도철 그리고 머리가 아홉 개 달린 용 등을 그렸다. 빼어난 상상력에 빼어난 조형성은 오랜 시간 눈길을 끈다. 이는 불교가 도교나 유교사상을 수용한 폭 넓은 관용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경변화는 불경의 내용을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변상도라고 부른다. 당나라 시대에 유행했는데, 막고굴의 경우는 24종 1천 여 폭으로 알려졌다.
불교사적화는 불교의 역사에서 주요 인물이나 사건 같은 것을 그린 것이다. 막고굴은 40군데에 67종의 사례가 있다. 장건(張騫)의 서역 출사(出使) 모습 등 역사적 사건이나 인도와 중국의 교류사 등이 있다. 공양인 화상은 장의조(張議潮) 등 실존인물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공양인은 시주했다하여 자신의 모습을 돋보이게 그리지 않았다. 공양인 보다 붓다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장식도안은 다양한 문양으로 채워 넣은 부분을 말한다. 디자인 감각의 탁월함은 막고굴의 우수성을 실감하게 한다. 제390석굴 연화초화문의 경우는 아름다움의 극치로 막고굴의 자랑거리이다.

막고굴 미술의 또 다른 보배는 색깔 입힌 입체작품 즉 채소(彩塑)이다. 흙으로 빚어 가마에서 구우면 테라코타라고 하지만, 흙으로 빚어 그대로 놔두고 표면에 채색을 입힌 것을 채소라 부른다. 현재 막고굴의 채소는 약 2천여 점을 헤아리게 하고, 영소(影塑)의 경우도 1천 점 가량 된다. 이는 조소예술의 극치로 세계 미술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이들 채소의 특징은 불보살상 등 다양한 소재라는 점을 들 수 있다. 1천년 동안 다채롭게 조성된 이들 채소는 꾸준히 발전상을 보인 바, 이는 새로운 사조를 적극 수용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막고굴 불상 가운데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는 경우, 북대상(北大像)과 남대상이다.

제148호의 열반상. 16m에 달하며, 72명의 제자 군상이 조성됐다. 현대불교 자료사진

제148호의 열반상은 길이 16m에 제자의 숫자만 해도 72명이나 된다. 당대 최대 규모의 군상(群像)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채소는 중심의 나무 위에 진흙을 발라 만든다. 여기의 흙은 강바닥에서 채취한 것이어서 부드럽다. 흙 70%에 모래 30% 그리고 삼이나 솜을 넣어 견고하게 했다.

나는 막고굴 가운데 제45석굴을 가장 사랑했다. 거기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나라 시기 작품으로 서쪽 감실의 칠존상은 최고 수준의 걸작으로 칭송이 자자하다. 중앙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가섭, 오른쪽의 온화한 아난, 이들의 사실적 묘사는 마치 실물이 서 있는 것처럼 리얼리티를 담보하고 있다.

가섭과 아난 옆의 보살입상, 불경스런 표현을 용서한다면 정말 관능미로 넘치는 여성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무리 보살이라 하지만, 정말 보살을 이렇듯 아름다운 여성으로 조성해도 좋은가. ‘미스 당(唐)’과 같은 미인선발대회가 있다면, 단연코 1등상을 받았을 모델 같다. 이들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아래로 살짝 뜨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 손은 들었고 허리는 약간 굽혀 신체의 리듬을 주었다. 상반신은 나신이고 화려한 목걸이를 하고 있다. 하의의 정교한 표현은 이 보살상 작가의 기량을 쉽게 짐작하게 한다.

이들 ‘미인’은 오늘의 미인이라고 불리는 여성과 다르다. 깡마른 빼빼라기보다 약간 풍만한 맷집의 몸매라는 점이다. 하기야 당대(唐代) 미인은 풍만형이었다. 양귀비 모습도 그러했다. 어쩌면 이 보살상의 작가는 실제 미인을 모델로 놓고 작업했을지 모른다. 그만큼 현실감에 넘치는 사실적 표현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미인형 보살 옆에는 마치 이들을 보호하겠다는 듯 우락부락하게 생긴 근육질의 천왕이 지키고 서있다. 부드러움과 거칠음의 비교 또한 작가의 기량을 짐작하게 한다. 제328석굴에서도 아름다운 미인형 보살을 볼 수 있다.

자, 세계 최고의 막고굴 미술관 안에 들어가 보자. 화려한 미술품들은 관객의 정신을 순식간에 빼앗는다. 어떻게 이런 작품이 가능했을까. 그것도 사막 한 복판이 아닌가. 열악한 환경에서 조성했을 막고굴 미술.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많고도 많은 벽화와 조소작품들, 작가 이름이 없다는 점이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깨달음의 세계를 붓다에게 헌상한다고 해도, 그래서 작품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해도, 우리는 현재 작가 이름을 모르고 있다. 어떤 기록에도 작가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화가 이름 그리고 조소작가 이름, 다 어디로 갔는가.

세계 최고수준의 벽화, 그러나 화가 이름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막고굴 현장. 나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작가명은 그렇다 치고, 막고굴 작가들은 굶주림 속에서 고통을 안고 작업했다. 심지어 아이를 담보로 맡기고 돈을 꾸기도 했다. 막고굴 옆의 작은 석굴, 거기가 작가들의 숙소였다. 너무 비좁아 작가들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짐작하게 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한 미술가들, 하지만 불후의 걸작을 만든 작가들. 돈황은 이래저래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화가는 어떻게 벽화 작업을 했을까. 벽면 위에 회반죽을 하고, 그 위에 아교를 칠해 광택을 주었다. 밑그림의 윤곽선에 작은 구멍을 뚫은 종이를 벽 위에 붙여 놓고 색깔이 있는 안료를 문질러 윤곽선을 뜬다. 윤곽선이 벽면 위에 나타나면 채색을 올릴 수 있다.

문제는 석굴 내부는 깜깜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장작을 때거나 횃불을 들 수 없다. 그을음은 벽화를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전기가 있었다면 얼마나 편하게 작업 했을까. 막고굴 화가들은 커다란 거울을 사용하여 태양광을 석굴 안으로 끌어 와 작업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고통의 산물이다. 오늘 우리는 작가의 고통은 잊고, 막고굴의 아름다움에 그저 감탄사만 연발하고 있다. 막고굴 미술!  

월아천을 낙타로 이동하는 관광객들. 문명의 발전으로 돈황 막고굴과 월아천 등은 관광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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