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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목욕… 生死 경계를 이어내다테마인- 유재철 연화회 대표
  • 글=신성민 기자·사진=노덕현 기자
  • 승인 2017.09.22 18:40
  • 댓글 2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맞는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왕이든 거지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죽음은 찾아온다. 그래서 인류는 죽음을 맞이하는 의식을 발전시켜왔다.

죽음에 맞이하는 의식인 장례에서 염습(殮襲)은 가장 기본이 되는 과정이다. 습(襲)이란 시신을 목욕시키고 일체의 의복을 입히는 것을 의미하며, 소렴은 시신을 옷과 홑이불로 싸서 묶는 것이며, 대렴은 시신을 아주 묶어서 관에 넣는 것을 말한다. 습과 렴을 총칭하여 ‘염습’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대표하는 ‘염장이’
직접 염습 담당한 대통령만 3명
한국불교 주요 스님 다비 봉행
스님에게 야단맞으며 다비 배워

첫 불교장례서비스 시작
1994년 조계사 앞서 연화회 창립
불교상장례·다비 조사 연구 앞장
‘연화 다비’ 자체 기술도 보유해

세상의 마지막 이뤄지는 목욕인 ‘염습’은 생과 사를 이어주는 마지막 행위다. 그리고 이런 염습을 총괄하는 사람을 우리는 ‘염장이’라 부른다.

‘염장이’라는 말이 대중화된 데에는 불교상장례를 전문으로 하는 유재철 연화회 대표의 역할이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유 대표는 2006년 최규하 대통령 국민장, 2009년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2009년 김대중 대통령 국장, 2015년 김영삼 대통령 국가장을 진행했다. 총 4명의 대통령이 그의 손을 거쳐 묘지에 안장됐다. 그래서 그를 사람들은 ‘대통령 염장이’라 부른다.

또한 서경보 스님을 비롯해 광덕 스님. 정대 스님, 법정 스님, 대행 선사 등의 다비를 봉행했고, 이맹희 CJ 명예회장 그룹장 등도 주관했다. 사회와 불교계의 주요 인사들의 장례를 담당한 유 대표는 단연 한국 최고 염습 장인이다.

실패 끝에 찾아온 직업 ‘염장이’
지금은 장례 관련 학과가 생기고, 장례지도사라는 국가공인자격이 있지만, 예전에 염장이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래서 유 대표에게 물은 첫 질문도 “염습을 직업으로 삼게 된 이유”였다. 그러자 유 대표는 웃으며 “뭐 별거 있겠습니까? 밥 먹고 살기 위해 배웠죠”라고 답했다.

이른 시기 사업에 뛰어든 유 대표는 크게 실패를 맛봤다. 벌여놓은 사업이 모두 실패하고 100일 정도를 누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중앙승가대학교의 전신이 있었던 개운사에 기도하러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어머니는 집 계단서 다쳐 다리가 불편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아들을 위해 기도하러 사찰에 간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유 대표는 어머니를 뵈러 사찰로 갔다. 밝은 대낮 어머니와 스님이 기도 소리가 유 대표의 마음을 울렸다. 특히 ‘신묘장구대다라니’가 가슴에 들어왔다. 집에 와 ‘신묘장구대다라니’만을 따로 녹음해 보름 정도 반복해 들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가 염습을 만난 것은 1994년이다. 대한불교청년회 회원이었던 그는 그해 광주에서 열린 여름 불교청년대회에 참여했고, 능인회 회원들과 만났다. 당시 회원 2명이 장의사를 개업했는데 꽤 운영이 잘 됐다. 유 대표는 그들을 보고 ‘장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길로 염장이의 길을 걷게 된다.

장의업에 대한 거부감이 없던 것은 가풍의 영향도 많았다. 경기도 광주에서 400년 간 한마을에 살았던 유 대표의 가족은 상장례를 스스로 해결했다. 유 대표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집안 어른들의 상제례에 함께 참여했다. 실제 유 대표는 중요무형문화재 111호 사직대제 이수자이기도 하다.

“장례를 배우자고 결심하고 전국을 돌면서 전통장례 장인을 통해 장례예법을 배웠어요. 30대 젊은이가 장례를 배우겠다니 장인들도 기특하게 생각하고 마음을 내주셨습니다.”

장례에 대한 배움은 배울수록 커졌다. 유 대표는 동국대에 석사 과정인 장례문화학과 개설을 요청해 수학했고,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한국의 국가장’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장의대학으로 연수를 가서 ‘시신약품처리보존기법(Embalming)’도 배웠다. 이런 배움들은 그를 ‘대통령 염장이’로 만든 원동력이 됐다.

2010년 법정 스님의 운구 모습. 스님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장례였다.

스님들에게 혼나며 배우다
1994년 조계사 앞에 불교장의서비스 회사 연화회를 창업한 유 대표는 이후 주요 스님들의 다비도 맡아왔다.
첫 시작은 1996년 일붕 서경보 스님의 다비였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스님들에게 전해지던 다비 의식을 재가자가 여법하게 진행하긴 어려웠다.

“서경보 스님의 장례를 진행하는 데 문중의 여러 스님들이 와서 혼을 내셨어요. 그 스님들은 어릴 적 장례를 해본 경험이 있는데 직접 할 힘은 없는 분들이셨습니다. 일반 장의사에게 배운 것으로 불교 장례를 하니 스님들의 눈에 찰 리가 없었죠. 실제 불교 장례는 일반 장례와는 많이 달랐어요. 그래서 그 다른 점들을 스님들에게 혼나면서 일일이 메모하며 공부했죠. 6년간 공부를 하고 매뉴얼로 정리했습니다. 업무 분담까지 세세하게 기록했죠. 정리한 매뉴얼로 진행했더니 스님들에게 더 이상 야단을 안 맞게 됐습니다.”

그렇게 배운 다비 의식들은 연화회의 독자적 다비 방법인 ‘연화 다비’ 연구·개발로 이어졌다. 사찰별 전통 다비 방법의 장단점을 분석해 현대적으로 계승한 ‘연화 다비’는 기존 다비보다 훨씬 저렴하다. 석유를 사용하지 않으며, 시간은 24시간에서 3시간으로 단축됐다.

“2008년 불교미래사회연구소의 ‘승려노후복지’ 설문 조사 결과 스님의 85%가 입적으로 다비하기를 원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죠. 약 5% 정도의 스님만 다비를 하고 있습니다. 연화 다비를 연구·개발한 것은 이런 상황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염습은 내 운명, 기도 없으면 못 버티죠”

염습과 불교, 생활이자 운명
생활위해 광주서 염 배우며 시작
염불만일회 초창기 회원으로 활동
불교 신행은 내 직업의 ‘원동력’   

염습 장인의 기억에 남는 장례들
노무현 대통령 장례 가장 기억나
법정 스님 유지 지키느라 애먹어
가장 여법했던 장례는 대행 선사

가장 기억에 남는 장례
약 24년 간 장례업에 종사하면서 수 천명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그런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례를 물었다. 숨을 고른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정신없이 진행됐어요. 그래서 노 대통령의 장례가 기억이 남아요. 하루는 여운계 씨가 돌아가셔서 염을 하고 있었는데 노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빨리 밀양 부산대 병원으로 가라는 전갈이었죠. 급히 염을 마무리하고 기차를 타고 갔어요. 가서 보니 노 대통령의 피투성이 시신이 있었습니다. 제가 수습을 해 모셨죠. 황망하다고 할까요. 여러모로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편안했던 장례는 대행 선사였고, 가장 어려웠던 장례는 법정 스님이라고 말을 이었다.

“2012년 대행 선사의 다비는 선사의 수행과 정신이 오롯이 드러나도록 기획됐습니다. 당시 영결식과 다비를 준비하는 데 한마음선원 사부대중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더군요. 선원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죠.”

법정 스님의 다비는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승복 입은 상태로 다비하라’는 생전 유지를 지키기 위해 어려움이 많았다고 유 대표는 술회했다.

“보통 다비를 할 때 입관하고 이를 다비장까지 옮깁니다. 그런데 송광사 다비장은 성인 남성의 걸음으로 30분 정도 걸리는 산길입니다. 그곳을 관없이 모시고 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법정 스님이 오대산에 계실 때 사용하신 대나무평상을 가져와 그 위에 모시고 다비장까지 이운했습니다.”

2015년 김영삼 대통령 국가장. 상주는 완장 대신 나비 베상장을 달았고 운구병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 모두 장례예법을 바로 잡고자 유재철 대표가 진행한 일이다.

장례문화 변화가 필요하다
대통령과 스님들의 큰 장례를 진행했던 그는 현재 한국의 장례문화는 개선돼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상주가 왼팔에 검은 완장을 차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잔재다. 또한 대통령 장례식에서 의장대 운구병이 흰색 마스크를 쓰는 것도 본래 예법에는 없던 것들이다. 영정에 검은 띠를 두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유 대표는 김영삼 대통령 장례식 당시 유족 허락 하에 상주 완장, 의장대 마스크를 없애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현재 장례 의식이 ‘고인’을 주인공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례식장에 가서 절하고 방명록에 이름 적고 돌아오는 게 전부인 장례에 추모의 의미가 있냐는 비판도 함께 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장례 절차를 간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잔재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왼팔 완장이 전통이라고들 알고 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항일집회를 막기 위해 들여 온 것입니다. 지금 장례는 빨리 시신을 처리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고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려하지 않아요. 5일장이 보편화된 예전에는 3일째가 돼야 수의를 입히고 입관했습니다. 문상객들도 그때부터 받았습니다. 2일 동안 유족들이 슬픔을 삭일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죠. 그나마 불교에는 이 같은 전통이 남아있습니다.”

유 대표가 꼽은 불교 장례와 일반 장례의 차이점 역시 “불교식 장례는 고인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불교 장례는 고인이 주인공이 됩니다. 불교에서 임종이란 이 세상의 육신이 그 역할을 멈추는 것이면서 육신에 묶였던 영혼이 자유로움을 갖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임종 직전의 염불 뿐만 아니라 임종 후 장례 절차, 내생의 준비기간인 49일 간의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관 내부를 두르는 종이도 그냥 종이가 아니라 사천왕을 그려 넣습니다. 철저하게 고인의 왕생을 기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런 불교장례 정신은 현대 장례문화에서 이어나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상제례 통한 포교에도 관심을
그래서 유 대표는 불교 상장례 문화를 정리하는 데에도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2011년 조계종 포교연구실이 편찬한 <불교 상제례 안내>에는 연구위원으로, 2013년 진행된 조계종 문화부의 ‘다비 현황조사’에는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모두 불교 상장례 문화가 잘 전승되고, 포교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동참한 것이다.

“가톨릭에는 연령회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매우 잘 짜인 조직인데 이것이 선교에 큰 기여를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성당 나오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아요. 오로지 봉사만 할 뿐입니다. 실제 가톨릭에 입교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가족의 장례 모습을 보고 관심이 생겼다’는 답변이 압도적입니다. 또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기도 등의 내용과 운율을 만드는 데 10년을 준비합니다. 중학교 수준으로 이해하기 쉽게 국문학자가 내용을 만들고, 음악 전문가가 운율을 적용합니다. 불교도 <불교 상제례 안내> 등의 책을 만들어 보급했는데 대중화되진 못했습니다.”

다비 문화에 대해서도 유 대표는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다비는 별도로 교육받는 것이 아니라 스님들의 장례를 봉행하면서 습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현재는 다비 전승자조차도 없는 경우가 많아서다.

“스님들은 다비를 하고 싶어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매우 적은 수의 일부 스님만 다비를 하고 있죠. 본사마다 한 곳씩 다비장을 만들었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기도·신행은 내 버팀목
매일 죽음과 맞이하는 일. 고된 점을 없을까. 유 대표는 “그래서 기도한다. 기도가 없으면 무너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유 대표가 광주서 장례를 배울 때 일이었다. 어린 자녀를 둔 아버지의 장례였다. 마음이 안쓰러워 더 열심히 염하고 장례를 진행했다. 그러던 중 영정사진을 보고 기도했다.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습니다. 좋은 곳으로 가세요.’

그 후, 새벽에 고인의 영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봤다. 3일 동안 새벽마다 그 영가를 봤다. 결국 당시 지도법사였던 현 조계종 원로의원 암도 스님에게 상황을 여쭸다. 그러자 스님은 “왜 그런 기도를 했느냐. 네가 염라대왕도 아닌데 그런 기도를 해서는 안된다. 너 때문에 혼이 못 가고 남은 것이다. 앞으로는 허튼 짓 하지 말고, 네 일에 집중해라”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영가를 다루는 사람은 반드시 염불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 일을 겪고 난 후, 유 대표는 기도를 생활화 했다. 새벽 4시면 일어나 염불과 기도로 하루를 열고, 염불만일회에도 가입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어떤 날에는 하루에 3, 4번의 장례를 치르는데 그 중에는 깨끗한 시신도 있고, 험한 시신도 있습니다. 그것을 다 마음에 담아두었으면 못 버텼을 겁니다. 광주서 영가를 본 뒤, 염하는 순간에만 집중하게 됐습니다. 그 집중과 몰입의 순간이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유 대표는 항상 생과 사의 경계에 서 있다. 그 경계에 서서 영혼이 육신을 벗고 사후세계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게 ‘염장이’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 유 대표는 “염을 하는 것은 고귀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일반인에게도 평소에 ‘엔딩 노트(Ending Note)’를 작성하는 습관을 권했다. 자신이 죽으면 장례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떤 말을 남길 것인지를 기록하라는 것이다.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고 이해하면 삶을 더 열심히 살 수 밖에 없다”는 게 유 대표의 평소 지론이다. 결국,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님을 유 대표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유재철 연화회 대표는? 1994년 조계사 앞에 불교장례서비스 전문 회사인 연화회를 창립한 유재철 대표는 불교 상장례 문화를 선도해 왔다. 1996년 일붕 서경보 스님의 다비를 봉행한 이래, 광덕·정대·지관·법정 스님 등 불교계 주요 스님들의 염습과 다비를 도왔다. 또한 최규하·노무현·김대중·김영삼 대통령들의 장례를 진행했다. 동국대 대학원 장례문화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동방문화대학원대학에서 ‘한국의 국가장’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연화회 대표이자 동방문화대학원대학 장례지도사 교육원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글=신성민 기자·사진=노덕현 기자  motp79@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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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미 2017-09-22 20:47:04

    매일 죽음을 만나면서 얼마나 힘들까 생각해보니..
    유박사 참 존경 스럽네요
    고맙고 감사합니다~~   삭제

    • 임영숙 2017-09-22 19:19:20

      펑소에 엔딩노트를 작성해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고 이해하면 삶을 더 열심히 살 수 밖에 없다는 교수님의 말씀...
      가슴깊이 남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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