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49%와 51%

내 나이 서른아홉쯤이었을 때다. 이른바 아홉수에 걸려 있던 나이였다. 호주머니에 늘 사표를 넣고 다녔다. 작가로서 흡족한 작품을 발표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직장에서 내가 하는 일이 만족스럽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었으므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나는 법정스님을 뵙고 내 진로에 대해서 상의를 드렸다.

“스님, 직장을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만두려는 마음이 얼마나 되지요?”

“49%쯤 됩니다.” “그렇다면 더 다니시오.”

이후 세월이 십여 년 흘렀다. 나는 또 예전처럼 번민에 빠졌다. 마침 성철스님 이야기 <산은 산, 물은 물>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전업작가 생활에 대한 자신감이 어렴풋이 들 때였다. 중년의 마흔아홉으로 또 아홉수였다. 나는 스님을 찾아가 여쭈었다.

“스님, 이제는 정말 직장을 그만두려고 합니다.” “그만 두고 싶은 마음과 더 다니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되지요?”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51%, 더 다니고 싶은 마음이 49%입니다.” “그렇다면 그만 두시오. 삶이 실패하더라도 1%가 극복의지가 될 것이오.”

일러스트 정윤경.

스님의 말씀에 영감(?)을 얻은 나는 직장에 사표를 냈다. 물론 결단을 내린 바탕에는 <산은 산, 물은 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산은 산, 물은 물>은 민음사 박맹호 회장께서 1주일 만에 “정 선생, 곧 밀리언셀러가 될 것 같습니다”라고 전화를 해줄 정도였던 것이다.

나는 그 여력으로 남도 산중에 산방(山房)을 지었다. 6개월 뒤 산방이 완성되자마자 미련 없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했다. 큰 딸아이가 고등학생일 때였다. 큰 딸아이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하자 어느 새 나의 산중 삶도 뻑뻑해졌다.

그때 큰 딸아이는 미국으로 유학 가겠다고 우겼다. 법정 스님께 상의했지만 스님께서는 아이가 원하면 무조건 보내라고 말씀하셨다. 안사람은 큰 딸아이를 보내야 한다고 더 적극적이었다. 큰 딸아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인테리어아키텍처. 할 수 없이 나는 큰 딸아이에게 끈기와 근성을 심어주고자 어려운 조건을 달았다.

“미술을 하는 네가 동양의 오방색을 눈에 담고 갔으면 좋겠다. 지금 광주 증심사로 가거라. 단청 팀에 합류해 붓을 들고 6개월 동안 거기서 일해라.”

그런데 큰 딸아이에게 단청 일은 전화위복이 됐다. 큰 딸아이가 원했던 미국의 대학교에서 동양적인 단청작업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가산점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큰 딸아이의 대학원 학비와 생활비였다. 이럴 때 사람들은 ‘은총’과 ‘가피’를 찾는지도 모르겠다. 결코 큰딸아이의 유학비를 위해 집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법정 스님의 일대기 <소설 무소유>가 독자들의 사랑을 크게 받아 빚쟁이 신세는 면했으니 말이다. 마치 법정 스님께서 “내가 책임질 테니 유학을 보내시오”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또한, 큰 딸아이가 평생의 동반자를 그 대학에서 만난 것도 우리 가족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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