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204번 버스’ 게시글

요즘 인터넷 게시글과 댓글로 인해 생긴 부정적 파장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인터넷 게시글과 댓글을 구업(口業)의 한 형태로 본다면 결국 신종 구업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204번 버스 논란이다.


뜨거웠던 ‘204번 버스’ 게시글
살펴보니 기사 잘못은 없었다
게시자가 양념쳐서 글 게재해

‘바르지 않은 사유’로 생긴 일
욕망·화·폭력 연쇄 고리 만들어
현상 쫓으며 구업 적립할텐가

“사랑스런 말로 섭수해야 한다”
선플과 정플로 세상을 정화하자


한 아이의 어머니가 잠시 딴청을 피는 동안 아이가 버스에서 혼자 내린 일에 대해 한 네티즌이 버스 기사가 어머니가 울며 이야기하는 데도 그냥 버스를 출발시켰다고 글을 올려서 문제가 확산되었고, 이 글에 네티즌들이 공분하여 버스 기사는 졸지에 죽일 놈이 된 경우이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버스 기사는 적절한 조치를 했고, 문제는 게시글을 올린 사람이 자신이 보고 느낀 바에 양념을 조금 더 첨부해서 글을 올리다 보니 사실과 다른 상황이 연출되어버린 것이다.   

부처님은 이런 경우를 ‘바르지 않은 사유’로 생긴 일이라고 진단한다. ‘바르지 않은 사유’는 마음에 좋지 않은 새 세 마리가 차례로 날아드는 것으로 비유된다. 그 새들로 인해 좋지 않은 언어가 자동으로 준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새의 이름은 ‘감각적 욕망’이다. 문제의 게시글을 올린 이는 “이렇게 보태어 이야기하면 훨씬 자극적이고,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거야”라는 사욕에 사로잡혀 사실보다는 보고 싶은 대로 본 욕망의 새를 마음에 불러들인 것이다.

두 번째 새의 이름은 ‘화냄’이다. 공분이란 ‘대중들이 다 같이 느끼는 분개’를 뜻하기도 하고 ‘공적인 일에 대하여 느끼는 분개’를 뜻하기도 하는데,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이야기에 사로 잡혀 ‘성냄’의 새를 마음에 불러 일으켜 단체로 눈이 멀어버렸다.

특히 보호받아야 할 아이와 그 보호자인 엄마라는 대목에서 대중들은 ‘지금의 분노는 의로운 분노’라는 인식 오류가 낳은 감정적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대중의 선의가 눈먼 쥐를 따라간 꼴이 된 것이다.

세 번째 새의 이름은 ‘해코지’이다. 분노한 대중들 중 일부는 204번 해당 기사를 해임해달라고 청와대 홈피에 민원까지 넣었다. 화를 넘어 상대에 위해를 가하는 ‘해코지’의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상상을 가미한 꾸민 이야기가 문제적 사유의 끝판왕격인 ‘사람을 해치는 폭력 유발의 새’를 마음에 불러들인 것이다.

이 세 단계를 거치는 사이에 구업을 구성하는 동반자들이 등장한다. 도리에 어긋나며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인 기어는 문제적 게시글을 올린 이가 처음에 사용한 것이다. 이어서 대중들은  독한 악담을 담아 댓글로 도배하기 시작한다. 뒤이어 진실과는 거리가 먼 망령된 망어들이 세상을 덮어 사회는 구업의 천라지망이 되고 피해자의 상처는 가중된다.

문제는 위의 경우는 단지 한 예에 지나지 않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데 있다. 진실을 보지 못하고 현상만을 보며 구업에 휘둘리고 있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부처님은 이런 경우의 대비책으로 〈핫타까 알라바까와 섭수의 경(A8.24)〉을 통해 “이 사람은 사랑스런 말로 섭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감각적 욕망과 화냄과 해코지가 없는 바른 사유에 기반한 나눔 정신이 제대로 된 말과 행동의 동인(動因)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무재칠시 가운데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양보의 말, 부드러운 말 등을 의미하는 언시(言施)를 언급함으로써 말로써 베풀고 살아야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구업의 시대를 정화할 바른 글쓰기와 좋은 댓글인 ‘선플’달기와 바른 댓글인 ‘정플’달기로 혼탁한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구업 희생자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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