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세상과의 소통 19

자신의 정서상태 알아차려
어두운 기운 밝게 바꿔야
어느 상황이든 대처 가능해
“명상이 능력 갖추는데 도움”

음혼을 양혼으로 전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인간의 행복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단언했다. 행복은 뭔가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모든 인생사가 향하는 최종 종착지로 본 것이다. 이 철학적 관점이 빚어낸 행복의 모습이 2천 년간 큰 흔들림 없이 유지돼왔고, 이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행복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이기도 하다.

국어대사전에서는 행복을 ‘생활에서 부족함 없이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하여 만족감, 기쁨, 흐뭇함과 같은 긍정적 정서를 행복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긍정적 느낌은 대체로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일어난다. 대화의 일반적인 형태는 학문상의 이론이나 철학적인 사고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사로운 것들이다. 이를 테면 친구 또는 부모와의 관계, 이성에 대한 사랑앓이, 자신의 성격상의 문제 등이다. 이러한 대화는 자신을 둘러싸고 쉴 새 없이 일어나는데, 감정의 흐름에 따라 대화가 순조로워 관계가 즐겁거나 그렇지 않아 짜증이 나서 관계가 거칠어진다.

인간관계의 호불호(好不好)는 대화의 내용에 있기보다 서로의 생각이나 느낌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수용하느냐에 달려있다. 대화는 머리로 하기보다 가슴으로 하기 때문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서가 밝은지 어두운지에 따라 관계가 달라진다.

사람의 마음에는 양혼(陽魂)과 음혼(陰魂)이 있다. 양혼이란 마음이 밝고 즐겁고 평화로운 상태를 말한다. 반면에 음혼은 마음이 어둡고 우울하며 불쾌하여 짜증스러운 상태를 말한다. 양혼이냐 음혼이냐 하는 마음의 상태는 남과의 만남에서 대화의 분위기를 만든다. 양혼의 상태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가지게 되면 그 관계가 친밀해져서 상대방의 어떠한 상태도 모두 수용할 수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A교수는 간밤에 B교수와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강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도 속이 매스껍고 머리가 띵한 상태다. 휴강이라도 하고 푹 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휴강을 할 특별한 명분이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강의실로 들어간다. 그런데 강의실로 들어서는 순간 기분이 더욱 상해버렸다. 학생들이 여기 저기 책상 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A교수는 강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그래도 억지로 강의를 시작한다. 학생들은 여전히 잡담을 하고 분위기는 바뀌지 않는다. 차츰 짜증이 나기 시작한 A교수는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고 강의는 논리가 서지 않는다. 그리고 이처럼 시원찮은 강의를 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학생들은 그러한 A교수의 강의에 실망한다. 이러한 상황은 A교수의 음혼의 상태가 빚어낸 결과이다.

한편 B교수의 경우를 보자. B교수도 A교수와 마찬가지로 간밤에 과음한 탓으로 신체 또는 정신적인 상태가 양호하지 못했다. B교수도 강의를 해야 하는데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나는 현재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머리도 맑지 못하다. 그러나 강의는 나의 일이며, 학생들은 나의 강의를 기다리고 있다. 내 마음의 어두운 상태는 학생들에게도 어두운 상태를 가져올 것이다. 오늘은 강의 방법을 바꾸어 보기로 하자. 학생들이 준비해 온 과제를 팀별로 발표하게 하고 상호 토론하기로 하자. 오늘은 무엇을 가르친다는 입장보다는 좋은 경청자가 되기로 하자.’

이제 B교수의 마음은 차츰 맑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마음 상태로 강의실로 들어간 B교수도 A교수의 강의실과 마찬가지로 담배를 피우고 잡담을 하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B교수는 이미 정해진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부드러운 눈길로 강의실을 한 바퀴 둘러본다. 학생들은 차츰 안정된 자세를 갖추기 시작한다. B교수는 “오늘 내 몸이 좀 불편하군요. 그래서 강의 방법을 좀 바꾸어 볼까 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시간에 제시한 과제를 준비해 왔으리라고 봅니다. 팀별로 그룹을 만들고 돌아가면서 발표를 하고 서로 토론을 하기로 합시다”라고 말한다. 학생들은 다소 어리둥절하다가 곧 새로운 강의 방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면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렇게 해서 B교수는 자신의 강의를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끝냈으며, 학생들은 B교수의 새로운 강의 스타일에 만족스러워 했다. B교수는 자신의 현재 부정적 심리상태를 재빨리 긍정적으로 전환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음혼을 양혼의 상태로 전환시킨 결과이다.

행동·존재모드 병행해야
우리의 마음은 수시로 변한다. 양혼의 상태에서 음혼의 상태로, 음혼의 상태에서 양혼으로 바뀐다. 이처럼 변화하는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새로운 상황에서 양혼의 상태로 대처하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행위(생각·느낌·의지)를 관찰하는 의식이라는 마음이 있다. 의식은 늘 자신이 어떻게 행위 하는지를 관찰한다. 의식이 깨어있으면 자신의 모든 행위를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을 맞이할 때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지만 잠자고 있으면 상황을 놓친다. 그러므로 의식이 그 순간의 상황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불행이 결정된다.

이러한 알아차림을 심리치료에 접목한 영국의 임상심리학자 존 티스데일(John Teasdale)은 인간의 삶을 두 가지의 방식, 즉 행위모드와 존재모드로 구분한다. 인간의 행·불행이 자신의 삶의 방식에 달려있다고 본 것이다.

행위모드(doing mode)는 미래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행위에 몰두하는 마음 상태를 뜻한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추구하며 부지런히 활동하는 삶으로서 마음은 늘 분주하다. 현재 행동은 잘 하고 있는지,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과거에는 왜 실패했는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평가하고 계산하기 때문이다. 행위모드에서는 마음이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로 옮겨 다니기 때문에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 채 불안과 초조 속에서 항상 쫓기며 바쁘게 살아간다.

반면에 존재모드(being mode)에서는 어떤 목표를 추구하기보다 그 순간의 상황에 몰입한다. 현실에 대한 어떠한 평가나 계획도 하지 않으며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다. 마음이 편안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과도 싸우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허용한다. 현재에 머물며 몸과 마음에 다가오는 다양한 경험들을 충분히 알아차리고 느낀다. 그 어떤 경험도 붙잡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우리의 삶이 행위모드보다 존재모드를 선택해야 더 행복할 것이라는 택일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세계에서는 누구나 행위모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행위모드 중심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차릴 때 빡빡한 일과에서 벗어날 수 있고, 양혼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모드와 행위모드라는 양 측면의 삶을 병행하여 추구할 수 있는 영혼의식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당신은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진정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이 물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인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은 행복의 세 가지 구성요소를 △안락한 삶 △자기실현적인 삶 △의미 있는 삶이라고 제시하였다. 하나는 돈을 벌고, 종교를 믿고, 명예를 얻는 일 등 모든 활동을 함으로써 편안하고 즐거우며 안락한 삶을 위한 것이요, 둘은 안락추구와 더불어 개인이 지닌 재능과 잠재능력을 발휘함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것이요, 셋은 자신의 존재를 넘어 더 큰 것을 위해 기여하는 의미 있는 삶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선순환 구조를 지닐 때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행복의 요소는 우리의 삶이 추구해야 할 지대한 목표이지만 티스데일의 말처럼 존재모드가 되기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경험되어야 한다. 오늘 아무리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어도, 살기 위해서는 내일 또 먹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음식으로 인한 쾌감은 사라져야 한다. 쾌감 수준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초기화(reset)과정이 있어야만 그 쾌감을 유발시킨 그 무엇을 다시 찾는다. 이 무한 반복의 생존 사이클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쾌감의 소멸이다. 행복은 ‘단 한 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쾌락은 곧 소멸되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껴야 한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인간은 변화에 민감하고 반복에 둔감한 존재다. 새로운 변화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자극에는 둔감하다. 행복의 상태도 지속되면 그 감정이 저하된다. 그러므로 쾌감의 소멸과 반복은 행복을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한다.

양혼과 음혼의 반복은 우리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며, 누구에게나 어느 때나 찾아온다. 양혼의 상태를 좀 더 지속하기 위해서는 양혼을 선택할 수 있는 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 의식의 깨어있음, 매 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힘, 이러한 의식을 갖는 것이 바로 명상의 비결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