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종지를 최후까지 계승한 양기파(楊岐派) 법맥은 원나라 말기에 이르러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에 의해서 다시 한 번 선풍(禪風)을 드날리게 된다. 고균비구(古筠比丘)라고도 알려진 몽산은 〈육조단경(六祖檀經)〉을 편찬하여 덕이본(德異本)을 남긴 인물로 육조의 법을 널리 유포시키려고 심혈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몽산은 제방을 다니면서 당시의 여러 선사들을 참방하다 나중에 복주(福州) 고산(鼓山)의 환산정응(?山正凝)을 참방하고 그 밑에 수학한 후 그의 법을 이었다. 그가 다시 〈육조단경〉을 편찬한 것은 1290년이었다. 이 덕이본이 나오고부터 〈육조단경〉 오본(五本) 중 덕이본이 가장 널리 유통되었다.

몽산이 남긴 저술로는 〈불조삼경서(佛祖三經序)〉가 있고, 〈몽산화상수심결(蒙山和尙修心訣)〉과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이 있다. 삼조삼경은 〈42장경〉과 〈유교경〉, 그리고 위산대원선사의 경책문을 합하여 부른 이름이다. 육도보설은 일체유심조의 대의에 입각하여 사성육범(四聖六凡)의 십법계(十法界)를 설하여 수행을 통한 범부를 버리고 성인에 들어가는 사범입성(捨凡入聖) 이치를 설하여 도를 닦기를 권장하는 내용이다. 수심결은 몽산의 법어집으로 대중에게 설한 법문인 시중(示衆)과 법어약록(法語略錄)이 들어있다.

이 가운데 법어약록은 고려 말의 나옹 선사가 초역한 책으로, 책 뒤에 보제존자법어부(普濟尊者法語附)라는 말이 붙어 있다. 보제존자는 나옹 스님의 시호이다. 이 책이 고려 말부터 많이 보급되어 불가(佛家)에서 즐겨 읽는 책이 되었다. 특이한 것은 몽산의 어록이나 저술은 중국에는 남아 있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여러 차례 간행되어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부터 간행되었는지 정확한 연대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선조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것으로 추증되는 언해본이 있고, 선조 때에 이르러 순창의 취암사(鷲岩寺)에서 간행된 것도 있다. 뿐만 아니라 몽산화상법어약록본이 보물로 지정된 것이 4본이나 있다.

몽산의 선풍이 고려에 수용된 배경에는 〈삼국유사〉를 쓴 일연 선사의 상수제자인 보감(寶鑑)국사 혼구(混丘)와 혼구의 제자 여찬, 경초, 충탄 등의 노력이 있었다. 여찬과 경초는 중국에 가 제방을 순력했고 특히 여찬은 당시 중국 천목산에 주석하고 있던 임제종의 고승 중봉명본(中峰明本)을 참방하고 온 인연이 있었다. 이리하여 이때부터 몽산의 선풍이 고려에 수용되어 고려불교, 특히 선불교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 몽산의 제자 철산소경이 고려에 다녀간 적도 있고 하여 당시 선종을 주도하고 있던 수선사계 뿐만 아니라 가지산문계의 후손인 일연의 제자 혼구와 그의 문도들이 몽산 선풍을 수용하는데 앞장을 서게 된 것이다.

또한 여말(麗末)에 이르러서 몽산의 선풍과 함께 중국의 고봉원묘(高峰原妙)의 선풍도 함께 수입된다. 고봉 역시 간화선의 요지를 설한 〈선요(禪要)〉를 남긴 사람으로 몽산의 간화선법과 같은 임제종계의 정통이었다. 이러한 선풍이 태고를 비롯한 나옹, 백운의 려말 삼사(三師)에 의해 널리 퍼지면서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태고는 석옥청공의 법을 이어 왔으며, 석옥청공의 스승인 금암선사가 고봉원묘의 도반이었다. 고봉은 〈선요〉에서 참선의 삼요(三要)를 제시한다.

대신근(大信根), 대분지(大奮志), 대의정(大疑情)이다. 이는 간화선에 있어서 화두타파를 위해 제시해준 공부법이다. 몽산은 그의 법어에서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중시하면서 오후인가(悟後印可)를 주장한 특징이 있다.

그러나 비록 간화선의 거장들인 몽산이나 고봉의 선법을 수용한 고려선법이지만 간화선 일변도로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태고는 지눌이나 나옹, 혹은 경한보다 간화선 쪽으로 기울어진 경향을 보이기는 했으나 나옹은 지공의 법을 이어 법맥 계승 면에서 임제종 정통이 아니었고, 경한은 석옥의 법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오히려 무심선(無心禪)을 주장하였다. 나옹 역시 몽산법어를 초록했으나 간화보다는 무심 쪽에 가까웠다. 지눌은 중국의 규봉종밀의 사상을 이어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였다. 이는 송대의 영명연수의 사상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연수는 염불선을 내세우며 선정일치(禪淨一致)를 주장하였는데 원래 법안종의 조사였던 그가 나중에는 정토종의 조사로 추앙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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