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야 청춘이고 흔들려야 인생이다. 옳은 말이다. 청춘은 아파야 성장하고 인생은 흔들려야 철이 들기 때문이다. 어린나이에 부처님 곁으로 온 나는 어지간히 숱한 어려움을 몸으로 부딪치며 마음의 키를 키워왔다. 타고날 때부터 수상쩍게 생긴 얼굴 탓만은 아니었다. 성깔도 지랄이고 고집도 거친 편이어서 부드러움을 등지고 살아왔다. 미운 놈이 미운 짓만 하니 어른 스님들은 별종취급을 했고 선배, 동료들은 우주에서 날아온 외계인 마냥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접근을 꺼려했다. 황소고집을 지닌 이단자로 아웃사이더가 되어 외톨이로 살았지만 워낙 눈물이 많아 혼자서 자주 울었다.

책벌레라는 또 하나의 별명이 따라다닐 만큼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책 속의 주인공이 되어 빛과 어둠사이를 윤회하며 나만의 세계를 즐겼다.

부처님 유훈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간절함,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등불


그 당시 통도사 후원엔 웬 놈의 학력 좋고 실력 좋은 행자들이 그리도 많던지 사미계 수계명단에서 몇 년을 두고 나는 항시 밀려난, 선택받지 못한 패배자였다. 그러다가 뒷방의 어느 승적도 없는 노스님이 구제해주어 사미계를 받고 행자 수업을 마쳤으나 엄밀히 말하면 나는 이미 백양사에서 수계한 사미승 이었다. 다만 당시엔 백양사는 비구, 대처승의 대립으로 통도사에서는 인정이 안 되어 행자생활을 재수한 셈이었다.

읽고 쓰는 작업에 몰입해 동아일보, 중앙일보의 독자란 글에는 ‘향봉’이란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찾아가 만난 스님이 조오현, 김정휴, 석성우, 석지현, 이병석 스님 등이다. 내가 심부름꾼이 되어 만든 게 ‘승려시인회’였고, 회장은 오현 스님이 간사는 내가 맡았다. 동인지도 여러 차례 발간했는데 재정 담당도 향봉이었다. 1969년 겨울의 ‘해인사 수행승들의 난동사건’의 주동자가 황소고집 향봉이었기 때문이다. 큰스님들의 법상(法床)을 까딱하면 엎어버린다는 소문이 자금동원력으로 연결되는 해프닝이 되었던 것이다.

군종병으로 3년 만기 제대 후 불교신문사에서 심부름꾼이 된다. 첫 직책이 편집국장으로 시작해 부사장으로 불교신문과의 인연을 접게 된다.

어느 해 어느 날 뼛속까지 파고드는 의문부호로 배낭하나 달랑 매고 인도로 날아간다. 커피를 마시고 커피 맛을 말하면 커피 맛이 아니요, 김치를 먹고 김치 맛을 말하면 김치 맛이 아닌데 그렇다면 부처는 깨달은 진리의 내용을 설법에서 얼마만큼 담아낼 수 있었을까?

사람의 기억은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당시의 제자들이 얼마만큼을 기억해 문자로 옮길 수 있었을까? 영혼의 존재, 내생(來生)은 허구일까? 참 일까?

인도에서 머문 3년째 되는 어느 날, 나는 천지개벽하듯 모든 의혹이 한 순간에 풀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 행복인이 되는 것이다. 종교적인 아름다운 체험, 깨달음을 통해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 착한 벗이 되는 순간이었다. 누가 무엇을 물어도 머뭇거리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남도 속이지 않고 나도 속이지 않는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 후, 네팔과 티베트를 거쳐 중국에서 7년 동안 머물며 중국어도 익히고 경전과 어록을 살피게 된다.

불교의 핵심사상은 연기법칙(緣起法則)과 중도사상(中道思想)이다. 연기법칙과 무아사상(無我思想)은 결코 둘이 될 수 없는 하나이다. 불교는 오늘의 종교이며 당생윤회(當生輪廻)에 방점을 찍어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중도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한 선지식이 임제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이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가운데(中)가 아니라 누리는 중(中)이기 때문이다. 중(中)에는 변두리와 모서리가 없는 것이다. 발길 닿는 곳이 정토(淨土)요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중도(中道)는 양변불락(兩邊不落)이 아니라 양변무애(兩邊無碍)이며 무변중심(無邊中心)인 것이다.

중(中)은 정(正)이다. 대(對)와 변(邊)에 걸림없이 자유로운 것이 중(中)이요 사(邪)와 미(迷)에 치우침없는 머묾없는 머묾이 정(正)인 것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이다. 게으름은 병이자 어둠이다. 정진(精進)은 깨달음에 이르는 바른길이자 빛인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며 몸과 마음을 송두리 채 던지는 간절함만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등불이 된다. 진리의 등불, 마음의 등불로 오늘의 주인공으로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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