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日隨想 - ③ 문답(問答)

기러기가 푸른 하늘 수 놓고,
개구리는 아무 먹은 마음 없이
‘첨벙’ 물속으로 뛰어든다.
두두물물이 입처개진이다

1. 어느 해 봄, 나는 벚꽃이 만개한 도쿄의 에도가와 강변을 따라 바쇼(松尾芭蕉1644~1697)의 오두막을 찾은 적이 있었다. 옛날 집은 스러지고 문경구(文京區) 교육위원회가 세웠다는 표지판이 문 앞에 있었다. 파릇한 잔디위에 굽어진 돌길, 그걸 딛고 들어서니 이내 아담한 바쇼암이 나타났다. 신발을 벗고 들어선 곳은 크지 않은 다다미방이었다.

정면 도코노마에는 바쇼의 자필화로 된 개구리 그림과 시가 적힌 족자가 걸려 있었다. 시는 언필칭 그의 대표시라고 하는 ‘개구리…’였고 족자 밑에는 자그마한 바쇼의 목상(木像)이 놓여 있었다.

해묵은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古池や 蛙飛こむ  水の音)

그가 고향 우에노를 떠나 이곳에 온 것은 1680년경. 그의 나이 37세 때로 인근의 닌센(臨川) 암자를 찾아가 붓쵸(佛頂)선사에게 가르침을 받곤 했다. 어느 날의 일이다.
“오늘은 어떠한가?” 붓쵸선사가 물었다.
“비 지나가며 푸른 이끼를 씻었습니다.” 바쇼가 답했다.
붓쵸는 다시 물었다. “푸른 이끼가 아직 생겨나기 전, 봄비가 아직 내리기 전의 진리는 무엇인가?”
“해묵은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라고 그는 답했다.

그곳을 다녀온지 10년 세월도 잠깐, 요즘엔 독서도 힘들어 불구심해(不求甚解)로 선사들의 어록(語錄)을 천천히 넘기며 소일하고 있다. 며칠 전 TV에서 물속으로 뛰어드는 아이들의 모습, ‘첨벙!’에서 바쇼의 그 ‘개구리’시가 떠올랐고 그러자 갑자기 붓쵸선사와의 문답이 의중에 감겨들었다.

“오늘은 어떠한가?” 오늘의 일이란 지금의 마음 상태, 즉 경계를 묻는 것이리라.
 “비 지나가며 푸른 이끼를 씻었습니다.” 여기에서 지나간 ‘비’는 무엇이며, 씻었다는 ‘푸른 이끼’는 또 무엇인가.

비에 씻긴 푸른 이끼. 이끼는 씻겨서 없어져야 할 대상이고 비는 그것을 소멸시키는 감로수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비와 이끼는 아직까지 상대적인 분별의 세계이다. 이런 메타포의 유추쯤은 누구나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다음의 두 구는 쉽지 않았다.

“푸른 이끼가 아직 생겨나기 전, 봄비가 아직 내리기 전의 진리는 무엇인가?”
붓쵸는 즉석에서 바쇼의 말을  받아 푸른 이끼, 봄비 전의 소식인 ‘진리’에 대해 물었다.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던지는 활구(活句)였다. 이때 바쇼의 답은 열 일곱자로 압축된 위의 게송(偈頌)이었다. 게송이란 오도(悟道)의 경지를 뜻하는 바 그러므로 내게는 하이쿠 형식을 취한 그의 오도송으로 읽힌다.

하이쿠의 특징은 선가에서 표방하는 불언(不言)의 언(言)과도 상통한다. 여기에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에 대해 “가까이 하기 쉬운 세계이면서 그러나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 이중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문예”(〈기호의 제국〉)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하이쿠의 시 세계는 극도로 압축된 언어로 어느 한 순간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여 아무런 설명 없이 이와 같이 불쑥 내던진다.

‘해묵은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별안간 ‘첨벙’하며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에 그만 정적이 깨어지고 마는 느낌. 동(動)으로서 정(靜)을 깬 선적(禪的) 파격이다. 해묵은 연못의 고요는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않는 본래적(本來寂)의 도(道) 자리. 그것을 본체(本體)라고 한다면, 첨벙 뛰어드는 개구리의 동작은 현상적인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有)으로써 본체(無)가 드러난 것이다.

본체는 해묵은 연못의 고요다. 그러니까 푸른 이끼가 아직 생겨나기 전, 봄비가 아직 내리기 전의 진리는 개구리가 정적을 깨기 전의 해묵은 고요, 본래적(本來寂)의 그 자리다. 도는 덕의 작용으로써 드러나고 무(無) 유(有)에 의해 드러난다. 그러니 있음과 없음은 둘이 아닌 하나로 보아야 한다. 연못의 공(空)과 개구리의 색(色). 그 또한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즉(卽)해 있지 않은가.

공안에는 원래 답이 없다. 분별을 넘어선 자신의 체험을 직시(直示)하는 것이 공안이기 때문이다. 바쇼는 ‘이끼와 비’의 상대적 분별을 떠난 절대적 체험으로써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의 그 자리를 확인한 것뿐이다.

중국의 양나라 무제가 달마 스님께 물은 것도 ‘진리’에 대해서였다. “무엇이 가장 근본이 되는 성스런 진리입니까”라고  했을 때 그의 대답은 ‘확연무성(廓然無聖)’ 넉 자 였다. ‘텅 비어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뜻이다. 활짝 개인 드넓은 하늘(廓然)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부처님의 진리 또한 텅 비어 공(空)한 것이니 성(聖)스럽다 할 무엇조차 없다는 것이다. 본래 적(寂)의 그 자리를 점두(點頭)로써 수긍 할뿐, 다른 무엇이 더 있겠는가 싶다.      
 
2. 아주 오래전 통도사 극락암에 계시던 석정(石鼎) 스님께 족자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선이 굵은 그분 특유의 달마도에 붙은 찬시는 이러했다.

산당 고요한 밤에 말없이 앉아있네.(山堂靜夜 坐無言)/ 고요하고 또 고요한 것은 본래 자연의 모습.(寂寂寥寥 本自然)/ 무슨 일로 서풍은 임야를 흔들어(何事西風 動林野)/ 찬 기러기 외마디 소리를 내며 긴 하늘을 울며 나르게 하는가.(一聲寒雁 ?長天)

족자는 늘 내 눈 높이에 걸려 있었다. 어느 날, 그림 속의 달마 스님이 내게 물음을 던지시는 것 같았다. “왜 찬 기러기가 긴 하늘을 울며 나르는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누가 바람을 보았을까요? 아무도 그것을 보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나뭇잎이 흔들릴 때 그것은 빠져나가지요. 라고 했듯이  나뭇잎이 흔들릴 때 비로소 바람의 존재가 드러나고, 기러기 외마디의 울음(現像)에 산당의 고요(本體)가 드러난다. 마치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에 해묵은 연못의 고요가 드러나듯.

앞의 두 구는 도의 본체요, 뒤의 두 구는 도의 작용이다. 1, 2행은 자연의 본체요, 3, 4행은 자연의 현상이다. 본체와 현상, 정(靜)과 동(動), 공과 색, 이러한 구조는 바쇼의 시에도 또한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아무래도 걸리는 건 왜 하필 서풍이 불어 기러기가 울며 떠나야하는가 였다.

아직 살아 있음의 업풍(業風)이여! 아득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장천(長天)을 울며 나르는 한 마리의 찬 기러기, 남 같지 않았다.

맹난자/수필가

젖은 갈대는 서풍에 흔들리고 구만리 하늘을 울며 나르는 기러기의 고단한 날개짓.  지난 날 나는 서툰 솜씨로 ‘노안도(蘆雁圖)’ 한 폭을 화선지에 옮기고 기어이 그 위에 이 시구를 적었다. ‘何事西風 動林野/ 一聲寒雁 ?長天’

아린 자화상처럼 오랫동안 나를 지배하던 이 구절과의 문답.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긁어 부스럼처럼 괜히 한 생각을 일으켰던 것이다. 자기 연민에 기인한 중생심이었다. 마음이 멎으니 서풍도 그치고 사위도 고요하다.

찬 기러기가 연고 없이 목청을 뽑아 ‘끼르륵’ 푸른 하늘을 수(繡) 놓고, 바쇼의 개구리는 아무 먹은 마음 없이 ‘첨벙!’ 물속으로 뛰어든다. 두두물물이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푸른 이끼가 아직 생겨나기 전, 봄비가 아직 내리기 전의 소식인 바로 그 진리인 것이다. 아무런 작의(作意) 없는 개구리의 동작에서, 나는 연고(緣故)없는 기러기의 일성(一聲)을 짚어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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