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日隨想 -② 시간의 강가에서

해질녘 적막한 강가에 나와 선다. 유장(流長)하게 흐르는 저 금빛 물살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간다는 것’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잔잔한 물살위에 흐르는 시간, 물 수()와 갈 거(去)를 합하면 법(法)자가 된다. 법(法)이란 진리, 물이 흘러가는 ‘흐름’이 진리가 아닐까. 돌이킬 수 없는 그 흐름의 원형은 시간일 터이다.

내 남루한 시간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젊은 날 나는 발길이 막힐 때면  남몰래 강가를 찾곤 했다. 유유히 흐르는 물살에 한참 눈을 주다보면 먼 데로 사라지고 마는 자잘한 근심 따위. 텅 빈 마음이 되곤 했다. 강물은 그때 내게 많은 걸 들려주었다.
 
“위험하게 살아라. 전쟁의 상태에서 살아라. 운명을 사랑하라.”  -〈오디세이아〉中

그리스의 작가 카잔차키스(1883~1957)는 과외선생처럼 일러주었다. 그의 소설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에 참가했다가 고국 이타카로 돌아오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이다. 나 또한 그들처럼 풍랑과 맞서 몸으로 견딘 세월이 얼마인가. 그러나 월계관 없는 고된 시간들이었다. 이제 귀향의 닻을 내려야 할 지점에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본다. 승리도 패배도 없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시간.

시간의 없음을 여실히 볼 때
시간 따라 변한다고 생각하는
自我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 자아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가는 자 이와 같은가”라고 했다는 공자의 나지막한 탄성이 울려온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새삼스럽게 시간의 의미를 뒤좇게 된다. 참으로 많은 작가와 철학자들이 시간을 규명한 바 있다.

‘시간은 지속적’이라고 말한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1959~1941)은 시간이란 다양한 연속성 안에서 과거에 흘러갔던 시간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흐르고 있는 시간을 의미하며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체이며 무엇보다 “우리의 내면 속에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의식의 흐름 자체”라고 했던 말을 나는 다시 주목하게 된다.

‘베르그송 철학을 내면화한 최초의 예술가’라 칭해진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는 자신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시간을 기억으로 환원한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라는 물질을 따로 떼어 냈고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피력한 바 있다. 필자 역시 시간을 기억으로 환원하는 것이 문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가시적 시간을 실제적 시간으로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이야기로 형상화할 때 그 시간은 존재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광맥을 캐는 광부’라고 자칭했던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의 문학의 주제도 ‘인간의 정체성’과 ‘시간’이었다. 그는 에세이 ‘시간에 대한 새로운 반론’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시간은 지속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이 되는 것이며 우리들이 바로 시간입니다. 시간은 존재의 핵심이기 때문에 시간 없이 인간은 살 수 없어요. 우리들의 의식은 끊임없이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옮겨가고 있는데 그 지속이 바로 시간입니다. 우리 또한 강처럼 흘러갑니다.”

흐르는 강물에서 나도 시간을 바라본다.
“시간은 나를 이루고 있는 본질이다. 시간은 강물이어서 나를 휩쓸어가지만 내가 곧 강이다.”

보르헤스의 말을 곱씹어 본다. 내 눈앞에서 자맥질을 하던 보르헤스가 불쑥 솟아올라 포효하듯 내게 외친다. “내가 곧 강이다.”                                       

내가 왜 강인가? 곰곰이 생각한다. 저 강폭을 키워가는 강물이 때론 나를 휩쓸어가지만 내가 곧 강인 것은 내가 태어난 시간과 함께 저들도 태어났기 때문이며 내가 죽으면 저들도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시간과 강물은 나와 함께 태어났고 나와 함께 죽을 것이다. 이것을 철학자 다니엘 폰 체프코는 “시간은 나 이전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나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고백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시간이란 무엇이냐’에 대해 “시간이란 과거·현재·미래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라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간은 바로 지금 존재하는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 독일의 철학자 니체나 하이데거도 이 시간의 현존성을 강조했지만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이런 명구를 우리에게 선물한다.

“이 물은 흘러 영원히 흐르고 있으나 언제나 그곳에 있다는 것을. 항상 그곳에 있어 어느 때와 같은 물이면서도 또한 순간마다 새로운 물이라는 것을.”

강가에 나와 나 또한 얼마나 이 말을 되뇌었던가. 그는 영원에서 순간을 본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살 수도, 미래에 살 수도 없다. 우리에게 허용된 시간은 현재뿐이다.

독일작가 토마스 만(1875~1955)은 그의 소설 〈마의 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을 즐겨라. 시간이란 이용하도록 인간에게 빌려준 신의 선물이다.”

허용된 시간은 현재뿐임을 나 또한 숙지한다. 눈을 감는다. 그러나 발원지를 알 수 없는 내 시간의 출발점, 그 아득한 영겁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물길을 더듬어본다, 137억년 전 빅뱅으로부터 우주가 형성된 그때 시간이라는 것도 만들어졌다. 불덩어리 같은 지구표면이 굳어 생명이 출현하게 된 것은 39억년 전 일이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를 별들의 기원과 진화에서 그 뿌리를 찾는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1934~1996)을 따라 시공을 뛰어넘어 우주를 선회하다가 눈을 뜨니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 무량한 시간도 한 생각, 법(흐름)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이 되는 것이다. 우주도 시간과 함께 태어났다. 모든 존재는 생멸(生滅)하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고 또한 시간이 경과하기 때문에 생멸한다. 존재와 시간은 서로 인대(因待)한다. 만약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시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보르헤스가 그의 에세이 ‘시간에 대한 새로운 반론’에서 시간을 부정했던 것처럼, 1700여년 전, 인도의 학승 나가르주나(N쮄g쮄rjuna, 150~250)도 자신의 저서 〈중론(中論)〉에서 다음과 같이 시간의 공성(空性)을 제기한 바 있다.

“존재로 말미암아 시간이 만일 있다면/ 존재를 떠나서 시간은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런데 어떠한 존재도(실체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에 시간이 있을 것인가. (因物故有時 離物何有時 物尙無所有 何況當有時)”

시간은 없다는 것이다. 시간의 없음을 여실히 보게 될 때, 단지 시간의 없음만을 보는 것이 아니고 시간에 따라 변해간다고 하는 생각하는 자아(自我)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시간과 자아는 실체가 없는 하나의 허구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하나의 환상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생각난다. 아인슈타인은 또 어떠했는가. “시간은 시계로 측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리학에서는 시간이 새로운 것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은 환상일 뿐이다.”

시간은 왜 환상인가? 시간이 인대(因待)한 존재 자체가 자성(自性)이 없는 환(幻)이기 때문이다. 일어난 것은 전부 연기(緣起)로 일어났고 본성으로 볼 때는 하나도 일어난 것이 없다. 물이 흘러가듯 법성(法性)으로 보면 아무리 많은 것이 일어나도 본성(本性)에서는 일어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아일랜드의 작가 사뮈엘 베케트(1900~1989)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본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았던 것이다.

“시간이 머무는 것도 없고, 시간이 가는 것도 없다. 시간이 없는데 어찌 시간의 모습을 설명하겠는가”라던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가고 오는 것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이미 간 것’에는 감(去)이 없다./ ‘아직 안 간 것’에도 감(去)이 없다./ 과거 미래 이 두 경우를 떠나/ ‘가고 있는 현재’도 감이 없다. (已去無有去 來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  

맹난자/ 수필가

이와 같이 감이 없다면 가고 있는 현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된다.
“감 때문에 가는 자를 알 수 있다고 하지만 ‘가는 자’가 자신에게 속해 있는 ‘감’을 사용할 수 없다. 가는 자에 앞서서 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는 자는 감이 없다. (因去知去者 不能用是去 先無有去法 故無去者去)” 

이런 까닭에 간다는 것과 가는 자와 갈 곳도 존재하지 않는다. 환언하자면 저 물과 시간과 나는 모두 가는 곳이 없다. 실체 없는 우리의 존재는 공성(空性), 무(無)이기 때문이며. 존재를 떠난 시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질이 시간이라면 개인의 정체성이란 시간의 환영일 뿐”이라는 보르헤스의 말에 나는 그만 덜미를 잡히고 만다.

시간과 함께 인간은 하나의 마야(幻影)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자성(自省)이 나를 잠시 무력하게 하지만 그러나 도도한 흐름 위에 실린 저 무주(無住)의 시간. 없으면서 지속하는 다르마, 그 법성의 법(法)자를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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