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돈황 막고굴과 장경동 보물

돈황 막고굴의 전경. 석굴은 현재 492군데로 집계되고 있으나, 원래 천불동이라고 불렸듯이 더 많은 석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돈황! 가슴을 뜨겁게 하는 말이다. 세계 제일의 불교미술관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고비사막 한가운데 위치하면서도 돈황은 중심부였다. 돈황하면, 막고굴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돈황석굴은 막고굴, 유림굴, 서천불동, 동천불동, 묘(廟)석굴 등 5군데를 말하며, 총 550여 군데의 동굴, 그리고 약 5만㎡의 벽화를 자랑하고 있다.

막고굴의 석굴은 현재 492군데로 집계되고 있으나, 원래 천불동이라고 불렸듯이 더 많은 석굴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어마마한 분량의 벽화가 있는 바, 4만5천 평방미터 정도이다. 세계제일의 벽화미술관이기도 하다. 석굴 안에 불보상 등 2,300여 조소작품이 있다. 다시 한번 반복하여 강조하자면, 돈황 막고굴은 고비사막에 있다하여 중국의 주변문화라고 부를 수 없다. 한마디로 돈황예술은 동에서 간 것도 아니고, 서에서 온 것도 아니다. 돈황은 중심부이다. 그만큼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 바로 돈황 막고굴 예술이다.

고비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돈황
中 주변 문화 아닌 독자성 가져
20세기 이르러 ‘돈황학’ 정립돼

서구 열강들 약탈사가 담긴 곳
〈왕오천축국전〉도 서구로 유출

4세기 중엽(366년) 낙준 비구가 삼위산 산책 길에 ‘금빛’을 보고 석굴을 뚫기 시작했다. 그래서 막고굴이 생기게 되었다는 설이다. 초기의 석굴은 대개 절벽 중간에 집중화되었다. 석굴은 돈황 관청 번호를 비롯 펠리오 혹은 장대천(張大千) 번호 등 편의에 따라 각기 다른 석굴번호를 갖고 있다.

어떤 곳은 교실 서너 개보다 크고, 또 어떤 곳은 아주 작은 것도 있다. 대개 사각형 모양으로 4벽과 천정부분에 벽화로 가득 채웠고, 중앙에 불상을 봉안했다. 석굴사원의 승리를 보는 것 같다. 막고굴의 예술적 평가는 따로 논할 정도이다. 여기서는 제17굴 즉 장경동 이야기를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20세기 세계 학계에 새로운 독립학문을 수립하게 했으니, 그것은 바로 ‘돈황학(敦煌學)’이다. 돈황학이 탄생되게 된 배경, 거기에 장경동이 있다. 제17굴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석굴 속에 또 다른 석굴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보물창고였다. 오랜 세월 숨어 있다가 우연히 발견된 석굴, 바로 막고굴 가운데서도 장경동이라 부르는 조그마한 제17호 석굴. 1899년 어느 날 도사 왕원록은 숨어 있는 석굴을 발견했다. 왕 도사는 ‘풍골이 자유분방하며, 일찍이 속세를 벗어나고자’ ‘서방 극락세계가 바로 여기’라면서 막고굴에 새로운 ‘궁전’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천년 비밀의 창고를 발견하게 되었다. 20세기의 위
대한 발견으로, 바로 ‘돈황학’이란 독자적 학문체계를 수립하게 한 첫걸음이었다.

장경동에서 발견된 ‘돈황 유서(遺書)’의 숫자는 약 5만여 두루마리이다. 약간의 목각본이 있지만, 대부분은 사본이다. 서적은 대부분 불경이고, 도교경전 이외 일반생활 속의 자료 등 다양하다.

장경동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시기는 동진(東晋)시대 353년의 필사본 〈불설무상경(佛說無常經)〉이고, 가장 늦은 시기의 것은 북송(北宋)시대 1030년의 초본 잡사(雜寫)이다. 앞의 것은 현재 소련에 있고, 뒤의 것은 파리에 있다. 이는 돈황 유물의 약탈 역사를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세기에서 11세기까지의 문헌 자료. 이는 막고굴의 역사적 위상을 증명해주는 자료이다.

장경동 안에 홍변 초상작품이 있다. 홍변이 주인공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홍변은 누구인가. 그는 오 씨 가문으로 어려서 출가했고, 티베트 언어 등 이민족 언어에 능해 역경승으로도 활약했다. 9세기 중엽의 일이다. 장경동은 홍변의 영당(影堂) 혹은 기념실로 꾸민 공간이었다. 영당이라면 제사를 올리기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주인공 홍변 조각 뒤의 벽화는 보리수와 그 나뭇가지에 정수병과 자루가 걸려 있다. 그 옆에 비구니와 시녀가 그려져 있다. 이러한 홍변 기념관 안에 비밀창고를 별도로 두었다는 것,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수수께끼의 해답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다만 유력한 추측은 이렇다.

우선 장경동 유물 가운데 하한선 자료는 송나라 10세기 무렵까지 이어진다. 그렇다면 동굴 폐쇄는 11세기 전반일 수 있다. 그 시기의 돈황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서하의 난, 막고굴 거주자들은 난을 피해 서둘러 피난 갔다 돌아오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피난설, 폐쇄의 이유이다. 비슷한 시기에 이슬람의 동진(東進)도 검토하게 한다. 불교 파괴를 앞세우면서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이슬람 때문에 동굴이 폐쇄되었다는 주장이다. 사실 이슬람의 하라간 왕조는 잔인한 전쟁 끝에 11세기 초 타클라마칸 남쪽 호탄을 점령한 바 있다.

돈황 막고굴 입구 모습. 서구에 의해 발견된 돈황 막고굴은 이제 ‘돈황학’이라는 학문이 정립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폐쇄의 원인으로 외부 세력 침입에 의한 피난이라는 주장이 많다. 하지만 장경동 소장품 가운데 온전한 대장경 같은 귀한 자료 대신 대부분 잔권 단편(斷片)이어서 실용가치가 적다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물품 폐기 장소로 일종의 쓰레기 처리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파지 활용을 위한 폐기장이라 해도 출입구를 일반 벽처럼 막고 벽화까지 그려 위장해놓았다는 점이 의심스럽다. 아무튼 장경동은 예사스럽지 않게, 뭔가 숨기고자 특별하게 조성한 비밀창고임은 분명하다.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서둘러 문을 봉쇄하고 그림으로 위장해 놓았다. 그리고 꼭 1천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왕 도사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장경동. 누가 돈황 보물을 세상에 알리게 했는가. 우선 헝가리 출신 영국인 마크 오렐 스타인(Mark Aurel Stein)을 주목해야 한다. 페르시아 언어에서 산스크리트에 돌궐 언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던 그는 간다라의 라호르 동방대학교 총장에 이어 1899년 인도 캘커타 마란라스대학교 총장에 취임했다. 그는 중국 탐사를 진행하면서, 1906년 스벤 헤딘 조사의 누란 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대장정에 올랐다. 그런 와중에 돈황 보물 소식을 듣게 되었고, 서둘러 현지에 도착했다.

스타인은 왕 도사를 설득했고, 드디어 장경동 문을 열게 했다. 스타인은 은자 2백냥을 왕도사에게 지불했을 뿐, 사실 돈황 유물을 약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타인 컬렉션은 오늘날 런던 브리티쉬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두루마리 자료를 마이크로 필름에 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바, 영국 소장 돈황 유서(遺書)는 약 1만5천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대단한 분량이다. 이런 ‘성과’ 때문이었을까, 스타인은 영국 국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았고, 케임브리지대학의 명예박사학위도 받았고, 거액의 현찰도 받았다.

영국의 스타인 이외 프랑스의 펠리오의 역할도 주목하게 한다. 그는 1900년 프랑스 극동아카데미의 수석위원으로 중국 베이징에 파견되기도 했다. 동양학 전문학자인 펠리오는 1908년 돈황에 도착했다. 스타인은 장경동 문을 열고 들어간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1908년 3월 3일 새벽 무렵에 천년간 은밀하게 숨겨져 온 보고(寶庫)로 들어갔다. 발굴된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벌써 8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실로 많은 무리들이 왕래하며 수색했기 때문에 문서들은 크게 줄었을 것이다. 석굴 안으로 들어가 보고서 경악했다. 석굴의 세 모퉁이에 쌓여 있는 문서와 유물은 깊이가 2미터에 이르렀고, 또 50권씩 쌓인 것이어서 높이가 사람 키보다 컸다. 두루마리는 두세 개의 큰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고, 거대한 티베트어 필사본은 경판과 함께 그것들을 감싸고 동굴의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이런 자료를 적당히 보는 데만도 최소 6개월은 필요할 것 같았다는 것. 하지만 펠리오는 3주간에 걸쳐 선별작업을 했다. 동양 고대 언어에 능숙했던 그는 자료의 가치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최고의 수집품을 해외로 반출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문화재를 팔 자격도 없는 왕도사에게 불과 백은(白銀) 5백냥(약 90파운드)을 건네고, 다량의 보물을 배에 실을 수 있었다. 펠리오가 확보한 돈황유서는 총 6천 두루마리 정도였다. 수량은 스타인보다 적었지만 가치는 훨씬 높았다. 펠리오 컬렉션은 376장의 사진으로 촬영되어 〈돈황의 동굴(1924)〉이란 책으로 출판되었다. 돈황 예술의 첫 출판물로 역시 ‘돈황학’ 수립에 기여하게 되었다.

서방세계로 유출된 돈황 자료의 85%는 불경 두루마리이다. 흥미로운 점 하나. 펠리오 컬렉션 가운데 신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두루마리는 앞과 뒷부분이 없는 닥나무 종이의 필사본이다. 처음에는 저자와 책명조차 알 수 없었으나, 뒤에 연구에 의해 혜초의 인도 기행문임을 알게 되었다. 막고굴 비밀창고에 신라 스님의 책이 보관되어 있었다니, 이는 놀라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인도를 여행했던 신라승의 체취, 이러고 보면 우리에게도 돈황은 예사스러운 곳이 아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혜초 기행문을 비롯 돈황학에 대한 국내 연구자의 미비함이다. 혜초의 이름을 확인한 것은 중국에 이어 일본 학자들에 의해 연구성과를 이룩했다. 돈황은 우리 문화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돈황학의 연구에 우리도 박차를 가할 때이다. 아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돈황 예술은 왜 쇠퇴하게 되었을까. 당나라 시대 토번(티베트)은 돈황을 점령, 60여 년간 통치했다. 토번은 불교국가여서 돈황에서도 불교 흥성을 불러 와, 인구 3만명 수준에 승려 1천명이상의 수준을 보이기도 했다. 장안에서 불교 탄압의 칼바람이 불 때도 돈황은 ‘외지’여서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1천년간 폐허로 숨어 있었다. 돈황의 위상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세계적 불교미술관 돈황 막고굴. 우리와 보다 친해질 이유는 너무 많다. 이제 관광 수준에서 한 단계 진전시켜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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