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학교현장의 교육질서가 무너졌다는, 탄식의 소리가 많았지만 얼마 전 보도된 32세 여교사와 12세 초등학생 간의 일탈행위는 자못 충격적이었다. 사제지간에 일어난 유사한 사건이 없지는 않았지만 주로 남자교사와 중·고등학교 여학생 사이에 벌어진 성적 비위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의제강간사건이라고 규정된 이번 사건은 가해자가 20살 연상의 같은 학교 여교사이고 피해자가 불과 12세의 초등학생이라는 점에서 일반국민들이 느낀 당혹감은 상당했다. 의제강간죄란 19세 이상의 성인이 13살 미만의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거나 성추행을 하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강간’이나 ‘유사강간’ 혹은 ‘강제추행’ 등의 혐의로 형사 처벌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6학년 男초등생과 성관계한
32세 여교사의 일탈 충격적
사랑했다는 변명, 이해 안돼

‘사랑’이란 말 남발해도 되나
취향의 이성 유혹한 도구일 뿐
상식 안의 사랑만이 아름답다

불사음계를 수지한 불자라면
사랑의 오남용 경계하며 살자

 

아무리 성의 장벽이 무너진 현대사회라고 해도 어머니뻘인 여교사와 초등학생 간의 성적 사랑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용서받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애써 무시해버려도 좋을 지극히 예외적인 일종의 터부(taboo)사건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여교사가 학생에게 보냈다는 ‘사랑한다’는 문자메시지만은 한번쯤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감히 ‘사랑’이란 말을 그런 방식으로 사용해도 좋은가라는 인간적 물음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언론에 따르면 두 사람은 교내 체험활동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저학년 담임을 맡고 있던 여교사는 이 6학년 남학생에게 호감을 느꼈고 ‘사랑한다’는 문자를 여러 차례 보냈다. 그러나 상대가 선생님이라는 부담감을 떨칠 수 없었던 남학생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진 여교사가 자신의 반나체 사진을 찍어 보내고 만두를 사줄 테니 나오라고 하는 등 노골적인 추파를 던졌다. 마침내 두 사람은 학교 교실과 자동차 안에서 여교사의 주도로 수차례에 걸쳐 성관계를 맺는 관계로 발전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아무래도 행동거지가 부자연스럽게 보였을 아들의 휴대폰을 검색해 본 부모가 사건의 내용을 파악하고 학교에 신고하면서 여교사의 잘못된 행동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의 여교사는 두 자녀와 함께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었으며 학부모와 동료교사들로부터도 평판이 꽤 좋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무도 그가 제자인 남학생을 상대로 성적 비행을 저지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여교사는 자기보다 20살이나 적은 초등학생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버젓이 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벗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전송했다. 이는 글자 그대로 의제강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성적 일탈행위 그 자체임에 틀림없다. 여교사는 형법 제 305조 ‘미성년자에 대한 간음, 추행’ 조항에 적시된 범법행위를 했기 때문에 법의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미 인터넷상에서는 여교사와 그 가족의 신상정보가 빠른 속도로 유포되고 있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의 인권침해 등 2차 피해가 심각하게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시 한 번 더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20살이나 나이가 많은 성인 여교사가 자신이 근무하는 초등학교 6학년 남학생을 대상으로 ‘사랑’이란 말을 그렇게 남발해도 좋은가를. 결과적으로 보면 그 여교사는 사랑이란 단어를 자기취향의 어린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달콤한 수단으로 오남용했을 뿐이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말은 곧 섹스를 의미하는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사랑이란 말을 그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감히 경고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도 상식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 아름다운 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32세 여교사와 12세 초등학생 간의 비상식적 행동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의제강간이란 범법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따가운 비판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이란 말의 오남용을 경계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불사음계를 수지한 모든 불자들의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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