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부터 틔우고 똑바로 보고 똑바로 듣고 똑바로 행하라!

여러분과 오래간만에 이렇게 한자리를 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나오고서도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조차도 모르고 애타는 고통과 쓰라린 눈물로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것도 바람결같이 돌아가서 잠시 잠깐이고, 고(苦)로 인해 아프고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혀 가며 우리는 인생을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나와 더불어 같이 이렇게 한자리를 하게 되었으니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만이 인생을 올바르게 걸어갈 수 있는지, 또 어떻게 걸어가야만이 올바른 건지를 잘 들으셔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부터 알아야 제 눈이 떠지고 제 귀가 트여서

모든 것을 실천궁행하는 데에 역점을 둘 것이니라.

실천을 못한다면, 실천궁행이 아니라면 부처님 법이 아니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 비유해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오조 홍인 선사가 금강경 강의를 하시니까 육조 스님께서 그 대답으로 이렇게 말했죠. “불성이 스스로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내 마음이 내 불성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불성이 스스로 끄달리지 않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일체 모든 생활이 걸리지 않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이 말입니다. 그다음에 “불성이 스스로 일체 만법을 갖추어 가지고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요건 내가 알아듣기 쉬우라고 조금 더 보태서 말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불성이 스스로 만법을 들이고 내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이랬습니다. 그것을 종합해서, 즉 이 세상 이치를 종합해서 말하자면 삼천대천세계 우주 천하가 다 근본이 있습니다. 그 근본이 어디에 직결돼 있느냐. 마음의 근본에 직결이 돼 있다 이겁니다. “천지의 근본은 마음의 근본이니라. 태양의 근본도 마음의 근본이요, 시공이 없이 돌아가는 이치의 진리는 인간 마음의 근본으로 돌아가느니라.” 이랬습니다.

이 마음공부를 하는 데는 대승 소승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 하면 잘살고 못사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듯이 ‘사람’ 하면 그냥 사람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사람이라고 하죠. 그런데 좀 전에 육조 스님 말씀에 나왔듯이 우리 참인간의 마음, 여러분이 지금 생활하는 그 마음, 청정한 마음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어떠한 대(對)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음을 청정한 마음이라고 그러죠. 그게 뭔지 일러 드리겠습니다.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이니라.” 한 것은 무슨 뜻인가? 고정됨이 없이 찰나 생활을 하는 것을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어저께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마는 아내가 “여보, 인제 오세요?” 하면 남편이 됐습니다. 그랬는데 아이가 “아빠!” 그러고 들어오니까 남편 됐던 건 없어지고 금방 아버지가 됐습니다. 그런데 “얘, 아비야! 인제 오니? 나 좀 보자.” 하거든요. 그래서 얼른 또 어머니한테로 가니까 고만 아들이 돼 버렸습니다. 이렇게 화하는 세상입니다. 화해서 찰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고정되게 보는 거, 고정되게 듣는 거, 고정되게 가고 오는 거, 고정되게 먹는 거, 고정되게 만나는 게 있습니까? 이것이 고정되게 머물러져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니 이것이 진리고 도요, 길이고 참선이고 참입니다. 이 공부 하는 데는 대승이다 소승이다 이런 게 없습니다. 왜? 간편하게 얘기합시다. 상을 차려 놓는 데에 접시도 있고 종지도 있고 사발도 있고 대접도 있고 큰 접시도 있습니다. 손님들이 많이 오시겠으니까 상에다가 온통 다 차려 놨습니다. 그런데 거기 대승 소승이 있을까요? 여러분! ‘종지는 안 쓸 거다, 대접만 쓸 거다’ 이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종지만 써야겠다, 이게 옳다’ 이런다면 종지만 가지고 어떻게 상을 차리며 ‘대접만 쓸 거다, 큰 그릇만 쓸 것이다’ 한다면 큰 그릇만 가지고 어떻게 쓸 것이며 ‘접시만 쓸 것이다’ 한다면 접시만 가지고 어떻게 쓸 것입니까? 이걸로 비유합시다.

일체 만법을 일심으로 들이고 낼 때에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느니라.” 하는 뜻입니다. 이거는 걸리지 않게 몽땅 버려서 몽땅 갖추어 가지고 있게 만드는 실천궁행하는 법입니다. 실천이 아니라면 부처님이 정법을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론으로만 경을, 팔만대장경을 달달달달 외우고 위로 꿰고 옆으로 꿴다 하더라도 목마를 때 시원한 물 한 그릇 마시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먹느냐, 먹기 위해서 사느냐?’ 이거는 이차적인 문제죠. 진짜 배고프고 정말 목마르고 갈증이 날 때는 냉장고 문을 턱 열곤 한 그릇 쭉 마시는 겁니다. 그런 뒤에야 죽고 사는 것이 생각나는 것이니 그건 이차적이죠.

목마를 때 그냥 마시는 것이 그대로 찰나의 행이요, 정법이요, 중용입니다. 우리 인간들 사는 것이 바로 불법이요, 참선이며 그대로 행선입니다. 아주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는데 거기 무슨 이론이 들어갑니까? 거기 무슨 이의가 붙습니까? 비행기가 날아가는데, 프로펠러가 막 돌아가는데 거기 먼지 앉을 게 있습니까? 이것을 잘 판단해서 여러분이 자기 몸과 가정과 사회, 국가는 물론 세계, 우주까지도 한 손에 넣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원통력을 길러서 원심력으로써 행을 하셔야 합니다. 내가, 즉 말하자면 ‘아내다’ 하면 벌써 가설이 된 거고 ‘자식이다’ 하면 가설이 된 겁니다. ‘남편이다’ 하는 것도 가설이 된 겁니다. 전선의 가설이 됐으니까 전기 스위치를 올리면 거기까지 다 불이 들어오거든요. 이것이 바로 만법의 근원입니다. 그렇게 간편한데도 불구하고 이유를 따지고 이게 옳으냐 그르냐 하는 시비가 왜 붙습니까?

예전에 뉴욕에서 온 병자가 있었는데 그것도 부축을 받고 왔습니다. 10년이나 그렇게 앓고 있어서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아프면서도 이 마음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그래도 꼭지가 안 떨어져서 서울까지 나왔답니다. 서울에 와서 날더러 “병이 이렇게 한 10년이 가도 안 낫습니다.” 하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병을 나한테 내놔 보세요. 그러면 병을 고쳐 주리다.” 이랬습니다. 그랬더니 그 길로 가서 병이 나았습니다. 그 사람 생각이 거기서 탁 트여졌단 말입니다. 병을 내놓으면 고쳐 주겠다고 했더니 말입니다.

한생각에 자기를 구덩이에다 넣을 수도 있고 한생각에 자기를 구덩이에서 건져 낼 수도 있는 그 마음의 한 도리 한생각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꿈을 꾸고도 ‘이것 참 잘못 꿨으니까 오늘 조심해야지. 이것 참 나쁜 꿈인데….’ 하고 걱정 근심을 하면 꼭 나쁘게 돌아옵니다. 그거는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합니다. 그런데 아까 말했듯, 아버지가 됐다가 또 금방 남편이 됐다가 자식이 됐다가 이러듯이 우리 살림살이는 시공이 없이 돌아갑니다. 머물러 있지를 않아요. 안 되는 것도 한 찰나요, 되는 것도 한 찰나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이것은 주인공이 나를 깨치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지. 내 주인공이 있으니까 그런 거 뭐, 금방 좋게 할 수도 있는 거니까.’ 하고 믿으란 말입니다. 못났든 잘났든 자기 자신, 자성을 믿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습니까? 허공을 믿겠습니까, 이름을 믿겠습니까, 형상을 믿겠습니까? 이 세상에 누구를 믿을 겁니까?

그리고 모든 착을 주인공에다 놓으세요. 착을 떼시라 그러는 건 말입니다, 여기 제주의 여러분은 부적도 써다 붙이고 누구를 찾아가서 잘된다 못된다 하는 소리도 많이 들으셨을 테고 그렇게 기복으로 많이 다니셨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찔러 녹여 버려라 하는 것은, 찰나의 생활이니까 잘못된다 잘된다 이것을 떠나서 주인공에다 모든 걸 놓으라는 말입니다. 내가 있으니까 세상이 벌어졌습니다. 내가 있으니까 가정도 있고 우주도 있고 부처도 있고 그렇지 내가 없으면 다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믿지 않아요? 나부터 알아야죠! 각자 여러분이 모두 나부터 알아야 남에게 주기도 하고 참, 보살행으로써 모든 걸 행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깁니다. 원심력이 생겨요. 이게 아주 좋은 공부입니다. 두루 모가 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원심력입니다. 그래서 첫 번에 나의 물질적으로 살던 습을, 수억겁 광년을 거쳐 나오면서 인간이 되기까지 진화되면서 살아온 그 습을 녹여야 합니다. 인간이 됐으니까 부처가 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 습을 떼려면 ‘아! 내 주인공은 용광로와 같다. 일체 우주와 천지가, 태양이, 월세계가, 혹성들, 별성들 일체 모두가 다 인간의 마음에 직결이 돼 있으니 직결이 돼 있는 내 주인공만이 해결을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셔야 됩니다.

가정만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도 모든 것이 직결돼 있으니까 내가 마음먹는 대로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나부터 알게 되면 차차차차 실험을 통해서 체험하게 되고, 그러면 나를 진심으로 믿게 되고 ‘아하, 나뿐이 아니로구나! 역대 조사들도 일체제불도 다 나한테 직결돼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깨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말을 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자와 같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색경을 보시죠. 그 그림자가 나일 수는 없습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죠. 어느 어머니가 자식을 잃었는데 묻어 줄 사람도 없어서 갖다가 놓고선 엉엉 울었습니다. 묻으려고 해도 땅이 얼어서 손으로 팔 수도 없고 그러니까 포대기로다 둘둘 말아 놓은 위에 나뭇가지를 꺾어서 걸쳐 놓고 솔가지로 덮어 놨습니다. 그렇게 해 놓고 울고 있었습니다. 또 거기다가 죽은 아이가 춥다고 자기 두루마기까지 벗어서 더 덮어 주면서 어머니는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스님이 가시다가 그걸 봤습니다. 그러니까 행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행이든 육신의 행이든 똑같단 얘기죠. 행이 없으면 그건 부처님 법이 아니라 죽은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울고 있는데 “왜 부인께서는 이렇게 우십니까?” 하니까 “9대 독자인데 이 어린애가 이렇게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먹을 게 없어서 일하러 나갔고요.” 하고 울거든요.

이 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죽을 때가 돼서 죽은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보살님! 이 촛불이 꺼지지 않게 지키고 계십시오. 이 촛불이 꺼지면 나는 오지 못합니다.” 하고서는 턱 거기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그냥 삼매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스님은 어딜 갔느냐 하면, 환상천을 들러서 무명천을 들러서 불사천을 갔는데 거기에 그 애 이름이 안 나와 있는 겁니다. 불사천을 거쳐서 생사천을 가야 천도가 돼서 다시 이리로 오든지 어떻게 뭘로 되든지 하는데 그 불사천에 이름도 들어와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이름이 없으니까 이 스님이 관리인을 찾았습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사천왕을 찾았죠. 그래서 물어보니까 “여기는 들어와 있지 않으니 다시 무명천에 가 보십시오.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은 무명천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거든요. 그래서 거기 가서 그곳 관리인한테 그 어린애 영혼을 받아 가지곤 나왔는데, 나와 보니까 초가 거의 다 타 버리고 달랑달랑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찾아온 혼백을 넣으니까 그 어린애가 다시 살아났답니다. 참, 공부가 그만큼 되어 있어서 직결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자재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못하죠.

그래서 아이를 어머니 품에 다시 안겨 준 그 스님이 “허허” 하고 웃으며 하는 말이 이러했습니다. “환상천으로 불사천으로 무명천으로 돌아다녀 보니 모든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구나! 살아생전에 불이 뜨겁다는 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사천에 가서 불이 활활 타는 걸 보면 뜨거워서 거길 지나가지 못하고, 물에 빠지면 죽는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의식 자체가 그렇게 돼 있어서 물을 못 건너가는구나! 많은 마구니들이 있으니까 그것이 환상인 줄 알지 못해서 의식적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그 환상천을 떠나지 못하고 거길 넘어서지 못하는구나!”

모든 사람들이 물질화돼서 물질, 환상으로만 살다 보면 넘어서질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은 체가 없다고 수차에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는 거기 때문에 벽도 없고 지붕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으니 여기에서 다른 혹성에도 빛보다 더 빨리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살면서 ‘불이 뜨겁다’ 이렇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의식이 남아 있어서 불사천을, 즉 말하자면 화탕지옥이라는 데를 건너갈 수가 없다는 얘기죠. 잘못되면 그 펄펄 끓는 물에 사람을 집어넣는다고 하니까 그 펄펄 끓는 물이 있는 데에 빠져 죽을까 봐, 타 죽을까 봐, 데어 죽을까 봐 못 건너가는 거죠.

마음은 체가 없다고 수차에 말했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실존하지 않는 그 그림자에 놀라서 거기를 건너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구조가 돼 있기 때문에 그렇겠죠? 그러나 엊그저께도 얘기했듯이 우리 두뇌의 구조를 보면 잠재의식으로서의 판단 기능은 바른쪽에 있고, 현재 현상세계로서의 판단 기능은 왼쪽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둘이 아니게, 즉 말하자면 한데 합쳐서 쓸 수 있는 그런 위치가 되기까지는 내가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아야만 됩니다.

그전에도 얘기했죠. “대승 소승이 따로 없다. 대승도 놓고 소승도 놓아라. 악도 놓고 선도 놔라. 동서가 둘이 아니요, 남북이 둘이 아니다. 여자 남자가 둘이 아니요 어른과 애가 둘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어느 선사가 제자들에게 아이를 보고 스승이라고 부르라고 하니까 “저렇게 어린 애를 어떻게 스승이라고 부릅니까?” 그러니까 “먼저 늙었기 때문에 그러느니라.” 그러시더랍니다. 그 시공이 없는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스님네들은 애쓰셨다 이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먼저 늙었겠습니까? 애는 먼저 늙어서 벌써 다시 애가 돼 왔으니까요. 어른은 지금 애가 되려고 가는 길이고요. 하하하…, 어떻습니까? 이것이 두루 둘이 아니기 때문에, 즉 말하자면 영령들은 수만 개가 있어도 영령일 뿐이지 그렇게 너 나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무역무(無無亦無)’ 이렇게도 말을 했죠. 또 마음의 자가발전소라고도 했습니다. 이 자가발전소에는 꺼졌다 켜졌다 하는 법이 없죠. 자가발전소에는 꺼진다 켜진다가 없기 때문에 대승 소승이 없다 이겁니다.

또 이걸 용광로로 표현을 했는데, 용광로에다 작든지 크든지 다 놓는 작업만 한다면 나가는 거는 자동적으로 재생돼서 나간다는 얘기죠. 자동적으로 돼 나가는 거니까 잘되고 못되는 건 걱정하지 말고 여러분은 놓는 작업만 애를 써서 해라 이겁니다. 내 주인공만이 나를 고칠 수가 있고 내 주인공만이 나를 형성시켜서 이끌고 다닐 수 있고, 내 주인공만이 내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있고 내 주인공만이 이 세상의 만법을 들이고 낼 수 있다. 들여도 두드러지지도 않고 내도 줄지도 않는다. 모습도 각각 용도에 따라서 내놓으면서 천백억화신으로 나투는데, 마음으로 나투니까 천백억화신으로서 어디 손 안 닿는 데가 없고 어디 안 보는 데가 없고 어디 안 듣는 데가 없다는 얘기죠. 삼십이응신으로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꾸어서 여러분한테 응해 주시되 아프다면 약사로 나투어 주시고 가난하다면 관세음보살로 나투어 주시고 산신으로 나투어 주시고 지장으로 나투시고, 수없이 나투시는 그 마음이 한군데서 나가는 거라 이겁니다.

이 모두가 우리 지금 현실에서 부닥치는 얘깁니다. 세균이 바깥에서 들어오고 영계가 바깥에서 들어오는 거를 여러분이 이 공부를 못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몸속에서 수십억 마리의 생명들이 회전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생명들의 마음들은, 보이지 않는 데 마음들은 나의 마음과 같이 한마음이요, 몸뚱이는 내 몸뚱이와 속에 든 몸뚱이들이 같이 한 몸이 돼서 움죽거린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원통력이 있는 한마음 속에다가, 주인공 속에다가 일체를 놓고 ‘거기에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는 믿음이 없다면 몸뚱이로만, 이론적으로만, 망상적으로만 돌아가서 반쪽 50%인 현상세계의 판단만 하고 사는 겁니다. 대뇌의 반쪽으로만 말입니다. 항상 들락거리고 통신은 되는데 사람의 마음이 그걸 막아 놓고, 의식적으로 막아 놓고 쓰는 거죠.

그러니 악업 선업이 나오는데, 때로 화가 지독하게 나게 하면 그거는 화탕지옥이죠. 선하게 나왔다 악하게 나왔다 하면서 천차만별로 마음을 쓰게 하는 수십억 생명들의 마음이 악업 선업으로 인과가 되어 있기 때문에 안에서도 일어나고 바깥에서도 들어오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중간에서 해결을 하느냐. 모든 것을 주인공에 놓으면 내 지배인의 마음이 그 모든 마음들을 같이 한마음으로 굴리면서,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도 안에 있으면서 들락거리는 것도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현시점에서도 두서없이 나오는 병, 두서없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병, 이 모두를 해결하는 것은 내 주인공밖에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텔레비전을 보고 연극을 보시더라도 주인공 죽는 법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주인공 죽는 법은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주인공을, 자기가 자기를 못 믿는 겁니다.

참 대법을 가지고 계신 석가세존이나 역대 조사들, 과거의 부처님들만 우러르면서 남의 나무에 과실이 잘 열려서 아주 무르익어서 만 가지 맛이 나는 것만 보고, 내 나무에 열린 거는 우습고 내 나무에 열린 거는 보지도 못하고 생각도 안 합니다. 잘 가꾸어 무르익혀서 만 가지 맛이 나게 한다면 남도 주고 나도 먹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잘 익은 남의 열매를 먹으려고 애를 쓰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렇게 한번 표현해 볼까요?

한암 스님도 말씀하셨지만, 예전에 어느 큰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자기 제자더러 하는 소립니다. “저 마을에 내려가니까 말이야, 잘 익혀서 아주 좋은 냄새가 나는 고깃덩어리를 줄에다가 탁 묶어서 개의 눈을 가려 놓고 코에다가 대 주면서 장난들을 하는데 말이지, 코에서는 좋은 냄새가 나는데 눈은 가려졌으니 그 개는 눈 가려진 것부터 풀어야 그걸 먹을 수 있을 텐데, 자기 눈 가린 거는 모르고 그걸 벗을 생각은 하지 않고 좋은 냄새가 나는 그 음식만 먹으려고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지고, 그걸 떼 먹으려고 온통 애를 쓰는 것이 얼마나 우습던지 내가 오면서도 웃었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도 우습구나. 너는 우습지 않으냐?” 이러시거든요.

그래서 그 제자가 가만히 들어 보니까 ‘아하, 스님께서 일부러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로구나.’ 싶어서 이렇게 말씀을 여쭸죠. “큰스님, 큰스님께서 지금 저더러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우스워서 죽겠다.” 그러니까 “내 눈부터 틔우고 내가 똑바로 보고 똑바로 듣고 똑바로 행하라는 말씀이고 지금 그것부터 알라는 뜻인데, 만약에 그걸 모르고 내 눈부터 뜨지 못한다면 그 눈을 가린 개와 같은 격이다 하는 것을 저한테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니까 “같은 게 아니라 그러하니라.” 하시거든요. “누구든지 자기부터 알아야 제 눈이 떠지고 제 귀가 트여서 모든 것을 실천궁행하는 데에 역점을 둘 것이니라. 실천을 못한다면, 실천궁행이 아니라면 부처님 법이 아니니라.” 그러시더랍니다.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지금 요상하고 때로는 아리송하게, 이 말 들으면 이 말이 옳은 것 같고 저 말 들으면 저 말이 옳은 것 같지만, 계율이 350계율이 있고 280계율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공부한다면서 단 5계, 10계도 못 지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기 이전에 나 하나만 죽는다면 계율이 다 떨어지죠. 나 하나만 죽는다면 말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내가 죽기 위해서는 모든 착을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인공에 모든 것을 맡겨 놔라 하는 말입니다. “맡겨 놓으니 습이 떨어질 것이요, 습이 떨어지니 나를 발견할 것이요, 나를 발견하니 모든 것 어느 하나도 버릴 게 없을 것이요, 하나도 버릴 게 없으니 둘이 아닐 것이요, 둘이 아니니 둘이 아니게 나툴 것이요, 이것이 바로 이름해서 대도(大道)니라.” 이런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 주인공에 놓는 데에 대해서 참으로 여러분한테 너무나 강조를 많이 해 왔습니다. 이것은 내가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스님이라서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것이 아니다’ 하고 다 가셔도 할 수 없는 거고요. 나는 그렇습니다. 이날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갈 테면 가고 올 테면 오고, 자유니까요.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져 나와야 대도를 이루지 만약에 누가 하래서 한다면 이건 강제성을 띄었기 때문에 망상에 끄달려서 도저히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이것이 옳은가 이럭할 게 뭐 있습니까. 석존이 여기 계신다 해도, 못났든지 잘났든지 내 마음부터 알아야 석존의 마음을 꿰뚫어 보죠. 내 집의 전화부터 놔야 남의 집에 전화도 할 수 있고 전화도 받을 수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나부터 알기 위해서 나에게 모든 걸 일임해서 놓으라는 겁니다. 믿고 말입니다. 못났든 잘났든 말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9년 9월 24일 제주지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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