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산 대사

“많은 선(禪)수행자들이 생사 해탈에 실패하는 반면, 정토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쉽게 생사를 해탈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선에서는 생각을 끊어야 하지만, 염불에서는 생각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 〈감산대사몽유록(?山大師夢遊錄)〉

 

참선보다 염불이 더 쉬운 생사해탈법

명나라 최고 고승이자 등신불(육신보살)인 감산덕청(감山德淸, 1546~1623) 대사는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방편으로 염불이 참선보다 수승하다며, 그 이유를 〈?산대사몽유록〉에서 이렇게 풀이했다.

“중생은 무량한 세월에 걸쳐 허망한 생각에 골몰해 왔으므로, 이들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염불은 청정하지 않은 생각을 청정한 생각으로 바꾸고, 독을 독으로 다스려 여러분의 생각을 청정하게 한다. 진실로 생사를 해탈하기 위해 염불에 전력을 다한다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감산 대사는 윤회를 벗어나는 가장 쉽고 빠른 지름길인 정토법문을 권하면서도 참선 수행자를 위해서는 이른바 ‘참구(參究)염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염불과 선을 같이 수행하는 사람은 아미타불 명호를 화두로 삼아야 한다”며 구체적인 수행법까지 가르쳤다.

“부처님 명호를 외울 때, ‘누가 염불하는가?(念佛者是誰)’ 하고 스스로 물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묻고 또 묻고를 지속해 나가면, 모든 망상이 갑자기 끊어지는 때가 온다. 망상들이 생기지도 않고, 또 생겨도 곧 없어진다. 마음속에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단 하나의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마음의 부침(浮沈)을 놓아 버리면,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이 깨어지면서, 여러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된다. 몸과 마음과 온 세상이 즉시 평화로워 진다. 이때 허공의 꽃들(환영의 세상)이 사라지고, 거대한 광명이 도처에 빛나 시방의 모든 것들이 밝아진다.”

유식·화엄의 대가이지만

선·정토 겸수 사상 펼쳐

유불도 합일 융합의 근간

 

선종 중흥조로서 정토법문 선양

임제종 문하에서 선종을 중흥시킨 조사인 동시에 유식(唯識)과 화엄(華嚴)의 대가로서 유불선의 고전에 대한 역사상 가장 방대하고 깊이 있는 저작을 남긴 감산 대사는 정토종 제8조 연지(蓮池) 대사의 11세 연하의 도반이자, 제9조 우익(藕益) 대사의 정신적 스승이었을 정도로 정토종과 인연이 깊은 선지식이다.

이 세 고승은 자백진가(紫栢眞可) 선사와 함께 명나라 4대 고승에 속하기도 한다. 〈감산노인몽유집〉에 들어있는 ‘감산대사전’에 기록된 대사의 삶을 따라가 보면 선과 교, 정토가 하나로 조화된 원융불교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이다.

명나라 가정(嘉靖) 25년(1546) 10월 12일 탄생한 감산 대사의 속성은 채 씨(蔡氏), 자는 징인(澄人), 호는 감산(?山), 시호는 홍각선사(弘覺禪師)이다. 안휘성(安徽省) 전초(全椒) 사람으로, 부친의 성함은 언고(彦高)였고, 평생 ‘관세음보살’ 염불을 한 모친의 성은 홍(洪)씨였다.

대사는 12세에 남경 보은사(報恩寺) 서림영녕(西林永寧) 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주요 불경을 모두 암송하고, 유교와 도교의 경전까지 함께 배웠다.

 

염불할 때마다 서방삼성 나타나

19세가 되자 서하산(棲霞山)의 운곡법회(雲谷法會) 선사를 알현하고 〈중봉광록(中峰廣錄)〉을 배운 뒤, 참선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수행의 요령을 잘 몰라 오로지 ‘아미타불’ 염불만 하였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염불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아미타부처님이 서쪽 하늘의 공중에 서 계신 모습으로 나타났다. 눈부시게 빛나는 그 얼굴을 바라본 뒤 부처님의 발을 손으로 만지고 절을 했는데, 한없는 자비심이 마음속에 가득 찼다. 다시 관음ㆍ세지 두 보살님을 뵙기를 원했더니, 두 분이 즉시 상반신을 드러냈다. 이때부터 대사가 염불할 때마다 수시로 세 분의 불보살님이 눈앞에 눈부시게 나타났다. 이로써 대사는 염불수행이 성공하고 있음을 자신할 수 있었다.

같은 해, 감산 대사는 보은사로 돌아와 무극명신(無極明信) 대사에게서 화엄현담(華嚴玄談) 강의를 듣고 구족계를 받았다. 〈화엄현담〉 가운데 십현문(十玄門)의 ‘해인삼라상주처(海印森羅常住處)’라는 구절에 이르러, 홀연히 마음이 열리면서 법계가 원융하여 다함이 없는 도리를 깨달았다. 대사는 당나라 청량징관(淸凉澄觀) 스님의 경지를 실감했고, 그를 본받고자 호를 징인(澄人)으로 지었다.

 

염불공안 참구로 공삼매에 들어

이듬해(20세) 10월, 천계사에서 안거를 날 때 운곡(雲谷) 선사로부터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는 염불공안 참구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대사는 일체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여기에 집중했는데, 석달이 되지 않아서 마치 꿈속에 있는 것같이 되었다. 대중 가운데 있어도 대중이 보이지 않았고, 일상의 행위를 하고 있을 때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대중은 그가 멍하다고 여겼지만 실은 깨어있었다.

28세에 오대산에 갔을 때, 북대(北臺)에 위치한 감산(?山)의 풍치가 마음에 들어 호를 삼았다. 같은 해 반산(盤山)의 한 석실에서 홀로 수행하는 은자를 만나 함께 수행하다가 공정(空定; 공삼매)을 체험했다. 산하대지와 몸과 마음, 온 세계가 텅 비어버린 체험을 했지만, 은자의 가르침대로 그런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고 더욱 향상일로를 걸었다.

이근원통 증득하고 여환삼매에 들다

30세에 대사는 오대산 용문사에서 관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증득했다. 어느 날 물소리가 시끄러운 계곡 위 외나무 다리에 앉아 있었는데, 생각이 움직이면 물소리가 들리고 움직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홀연히 몸을 잊어버리고 고요한 상태로 들어갔다. 이때부터는 어떤 소리를 들어도 모두 고요하기만 했다.

31세에 연지 대사가 오대산에 오자 감산 대사는 며칠 동안 밤을 세우며 대화를 나눠 그의 선과 정토의 겸수(兼修)사상을 들었다. 같은 해, 5일 동안 삼매에 들었다가 깨어난 후 감산 대사는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체험했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꿈속의 일같이 보였다. 이때의 경계는 마치 비가 그치고 구름이 밀려간 뒤의 광활한 창공처럼 깨끗했다.

혈서사경 시 몽중에 미륵보살 친견

33세에 대사는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며 피와 금물(泥金)로 〈화엄경〉 한 부를 쓰는 데 집중했다. 일 점 일 획을 쓸 때 한 번 붓이 갈 때마다 한 번씩 염불을 했다. 손님과 대화를 하면서도 사경에 방해가 되지 않았고, 획 하나 틀리지 않게 쓸 수 있을 정도로 사경삼매에 들어 있었다. 혈서 사경 중에는 몽중에 청량 대사와 미륵보살,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가르침을 받는 등 상서로운 꿈을 많이 꾸었다.

38세에 대사는 동해 뢰산(牢山, 산동 勞山)에 가서 움막을 짓고 안거했는데, 정토종 초조 혜원(慧遠) 대사 계통의 염불수행에 전념하면서 대중을 교화하였다. 대대로 도교가 융성했던 이 지역 주민들은 처음으로 불교를 알게 되었고, 12년 후에는 세 살 먹은 아이들까지 염불할 줄 알게 되었다.

 

공삼매에 들어 무량광을 체험하다

41세에는 신종이 대장경 15부를 명산의 사찰로 보냈는데, 태후가 그 중 한 부를 뇌산에 있는 감산 대사에게 보냈고, 조정에서는 뇌산에 해인사(海印寺)를 건립하고 대사께 주지를 맡아주기를 청했다. 같은 해 11월, 하루 저녁에 선실에 앉아 있다가 밖에 나와 바다를 바라보니, 바다는 고요하고 허공은 깨끗한데, 눈의 흰색과 달빛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었다. 이때 홀연히 몸과 마음, 그리고 세계가 그 자리에서 고요히 가라앉더니, 마치 허공 꽃의 그림자처럼 떨어져 내렸다. 바로 이 순간 큰 광명의 바다가 펼쳐졌고, 일체가 사라져 아무것도 없었다.

50세에는 조정의 정쟁에 연루되어 광동의 뇌주(雷州)로 유배당하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불법을 널리 퍼뜨리면서 선종과 화엄종의 융합 및 유불도 삼교의 합일을 주장하였다.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 그가 옛 오나라 땅에 머문 5년 동안 강남과 강북의 불교가 흥성해졌다.

 

육조대사 선종본찰 남화사 중창

56세에는 100여 년 동안 엉망이 된 선종의 본찰 보림산 남화사(南華寺)를 1년 만에 회복했다. 사람 다니는 길과 물길을 새로 내고 스님을 선별하여 계를 주고 사미들을 길러냈다. 청규를 새로 제정하고 사중의 땅을 회복했다.

61세(1606)에 이르러서야 황제는 황손 탄생을 축하하는 뜻에서 대사를 사면시켜 주었으며, 1614년 태후가 죽자 비로소 승복을 다시 입도록 허락하였다. 대사는 그 뒤 많은 저서를 쓰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중을 교화하였다.

74세가 되자 정월에 오유봉에서 목석암을 짓고 〈화엄경〉 〈법화경〉 〈능엄경〉 〈금강경〉 〈기신론〉 〈유식〉 등의 경론을 가르쳤다. 8월 보름에는 폐관(閉關)하고 혜원 대사의 법을 본받아 마음을 오로지하여 정업(淨業: 염불수행)을 닦았다.

 

4년간 폐관 염불수행 후 육신보살로

1622년 소양 태수 장공의 청에 응해서 감산 대사가 조계(남화사)에 들어간 이듬해인 천계(天啓) 3년(1623) 10월 병에 걸렸다. 11일 목욕재계하고 불전에 분향한 후 대중에게 유훈을 남겼다. “생사의 문제가 크고, 죽음이 금방 닥쳐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간절하고 실답게 염불을 해라.”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단정히 앉아 입적하니, 세랍이 78세였다. 21년이 지난 뒤에도 살아계신 듯 손ㆍ발톱과 모발이 길게 자라 있었고, 살색은 선홍색일 정도로 육신이 그대로인지라, 남화사 조전(祖殿)에 육조 대사의 육신상 옆에 나란히 안치하였다.

‘오묘하게 밝은 참마음(妙明眞心)’을 깨달아 명말의 선종을 중흥시키고 정토법문을 선양한 감산 대사는 사후에까지 육신보살로서 말 없는 법문을 설하고 있으니, 중국 남화사를 방문하는 분들은 꼭 조전에서 대사를 친견하고 가르침을 받으시길 바란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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