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하게 믿고 진실하게 해야만 대뇌로 통신이 된다

공부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사후

질문 스님들께서는 이 마음의 공부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기에 생명을 걸고 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우리 인생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면, 마음공부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사후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 것인지 궁급합니다.

칠석날에 내가 닦아서 백종일에 넓고 광대무변한 부처님 자리에

한자리 할 수 있게끔, 그 의식이 확 트이게 이끌어 주는 것이

진정 부모의 은혜를 갚는 길일 것입니다.

답변 다른 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얘기해 드릴까요? 우리가 꼭 공부는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공부를 한 사람에 한해서 그래도 진실하게 내 안으로, 낱낱이 안으로 굴려서 안으로 돌리는 거, 이 생활하는 모든 거, 죽고 사는 거, 생사윤회를, 모든 거를 내 마음 안으로 돌리는 데에 묘미가 있는 거죠. 지금도 돌려놓으라고, 놓으라고 그러듯이 말이에요.

그렇게 해 가지고 가는 사람이 만약에 죽을 때는, 죽기 전에 자기 갈 자리를 자기가 다 마련해 놓고 가요. 이건 죽는 게 아니거든요.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죽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거기에 요점이 있어요. 공부를 그렇게 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몸을 벗을 때도 벗기 전에 자기가 자기를, 벌써 정자와 난자를 쫓아서 어디를 자기가 선택해요. 자기가 선택해서 자기가 열 달 내내 길러요.

그래서 여기서 생명이 딱 끊어지면요, 사람뿐만 아니라 저런 다른 큰 생명이 된다든가 이래도 말이에요, 그걸 꼭 사람으로만 비유하지 마세요. 사람 이외의 정말 벗어난 선인들이 된다 하더라도 그걸 정망해서 다 해 놓고, 또 사람이 된다 하면 만 아홉 달이 되지만 이 만 아홉 달은 우리 지구에서 쓰는 거지 딴 데서는 만 아홉 달이라는 게 똑같이 쓰여지질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단 순간에, 우리가 생각할 때 이 목숨이 떨어지기 전에 벌써 그쪽으로 가고 이 옷은 벗어요. 또 사람으로 내가 화한다 할 때는 거기 배 속에 들어가서 아홉 달 내내 길러 가지고 내가 목숨이 한 찰나에 딱 떨어질 때 벌써 그리로 가요. 이건 벌써 미리 가 있어요. 여기는 사는 습만 있다 뿐이지 그리로 가서, 바로 자기가 길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선처해서 벌써 자기를 기르고 있어요. 그래 길잡이는 자기죠. 자기 이외에 길잡이가 없어요. 그걸 아셔야 돼요.

또 공부를 안 한 사람에 한해서는 자기가 자기 개척을 못하고 자기가 길을 모르고 컴컴하고 그러니까 죽어도 누가 인도할 사람이 없단 말이에요. 살던 자기의 습이 있어 가지고 눈이 캄캄하니까. 그래서 살던 습에 의해서 자기가 착을 두고 있는 데에 그냥 머물러 버리죠. 거기에 머물러져 버리니까 때에 따라서 그 영계는 집에서 뱅뱅뱅뱅 산 사람한테 도는 거죠. 자식과 부모 뭐, 누구를 막론하고 얘기예요. 집안의 친척은 다 알지 않습니까, 자기가? 죽기 전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길은 몰라도 그 길은 알거든. 그러니깐 그 습에 의해서 뱅뱅뱅뱅 돌아다니죠, 자기에게 잘해 준 사람 앞에 또는 자기 친구한테. 그래서 그 친구로 인해서 남의 논 등에 주저앉는 법도 있죠. 저희 집 식구들이 시원치 않고 그러면 친구한테로 가거든요. 이게 참, 문제가 여기에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안 한 사람에 한해서, 바깥으로만 만날 돌고 다니던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길을 자기가 인도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 타의에 의해서 내가 길을 인도받아야 할 텐데 그 은사도 똑바른 사람을 못 뒀다면 그마저도 또 없는 겁니다. 그러니 캄캄하고 그래서 결국은 개집이나 뭐, 새 둥우리나 무슨 쪽제비 소굴이나 돼지 소굴이나 소 외양간으로, 뭐 이런 데로 그냥 떨어지는 거죠. 또 자기가 마음이 착해서 참, 요행히 걸려서 간다면 그 사람이 어떤 차원을 가진 줄도 모르고 그냥 그런 데로 가는 거죠. 그러니까 그건 십중팔구란 말입니다. 아니, 열 번에 한 사람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열 사람이라면 그 도리를 공부하지 못한 컴컴한 사람으로서는 사람 되기가 열 명 중에 두 명 되기가 어렵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이 공부를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왜 우리에게 이득이 없느냐 하면, 인간에게도 이득이 없고 사회에도 이득이 없고 국가적으로도 이익이 없고 세계적으로도 이익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여러분이 너무 잘 알아요, 세계를. 예전보다도요. 예전엔 그렇게 알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안방에 앉아서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 알고 있는 자기가 벌써 계발이 된 겁니다, 본래.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인식하기를, 예를 들어서 평상시에 ‘난 저게 좋다, 저게 좋다’ 이렇게는 그냥 우리가 보고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잠재의식 속으로 가서 컴퓨터에, 자연 컴퓨터에 정해져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이 도리를 모르면 그렇게 박혀 있기 때문에 그 박혀 있는 대로 길을 갈 것이고, 자기가 자유권을 갖고 자유자재한다면 그대로 자기 가고 싶은 대로 미리미리 그렇게 다 해서 자기가 한 찰나에 딸칵하면 그냥 옷만 벗는 거뿐이에요. 우리가 옷을 벗으려면 훌훌 그냥 벗죠. 그 순간뿐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옮겨 놓는 거뿐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우리 공부 못한 사람은 ‘길다, 짧다’ 이런 것이 있는데, 한 찰나다 이거야. 이쪽에서 한 찰나는 이 집으로 들어가느냐 이 집으로 들어가느냐의 문제, 즉 한 찰나는 한 찰난데 이 집으로 들어가느냐, 이 집으로 들어가느냐야!

그러면 열 달이 걸리고 한 찰나가 걸리고 일 초가 걸리고 열흘이 걸렸다 또는 아홉 달이 걸렸다 이래도,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됐대도, 만약에 본래 이렇게 믿고 다니던 데에 아는 사람이 길잡이로 있다면 벌써 그것을 알게 돼 있어요. 왜?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믿고 다녔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즉시 그것을 막아 줄 수 있는 겁니다, 즉시! 막아 줄 수도 있는가 하면 그것이 아홉 달이 됐다 하더라도 일 초로 축소한단 말입니다, 이건 체가 없는 거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눈뜬 사람 하나 만나기가 극히 어렵다. 하나 만나면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이 있는 것이죠. 사람 하나 만나기가 그렇게 쉽습니까, 어디? 그러고도 또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못난 사람 하나 만나기 참 어렵습니다.

북두칠성을 보라고 하신 뜻은

질문 예전 어느 선사가 제자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네 공부가 조용한 중에는 그만한 편이나 움직이는 중에는 아직 멀었구나.” 하시면서 북두칠성을 보라고 했답니다. 그렇다면 ‘남쪽으로 얼굴을 돌려 북두를 보라’ 함이 무슨 뜻인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우리가 얼른 쉽게 말하면 발은 하늘을 보고 머리는 땅속을 본다 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모든 물질이 다 허망한 것이니 그 허망한 물질의 움죽거림이 움죽거림이 아님을 알면 바로 남쪽으로 얼굴을 돌려서 북방을 볼 수 있다 이런 겁니다. 이 북방을 볼 수 있다 하는 것은 마음세계를 보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움죽거리는 것이 여러분이 움죽거리시는 겁니까? 네? 이 물질을 가지고 허망하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 허망한 것이 움죽거리는 것이 움죽거림이 아님을 알라 한 것도, 그것도 바로 마음으로부터 움죽거림이 나오지, 마음이 아니라면 움죽거림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깐 마음의 주인이 하자는 대로 육신은 움죽거리게 돼 있으니 그러한 겁니다.

그러니 누구나가 “아, 칠성이 참 잘 생겼다. 아! 고놈, 아주 칠성이 곧잘 생겼는데….” 이러기도 하죠. 그러니 이 밝은 마음, 이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닌 도리를 그 밝음에서 보라 하는 이 소리나 똑같습니다. 남쪽으로 얼굴을 돌려서 북두를 봐라. 내 마음의 제일 높음을 말하는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인간은 머리가 제일 위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위가 아니라 정신이 위란 얘기죠. 북두, 이 모든 것을 “남쪽으로 얼굴은 돌리되 그 내면의 북두를 봐라. 그걸 볼 줄 알아야 어느 일을 하더라도, 어느 걸 하더라도 함이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움죽거려도 움죽거림이 아니니라. 그게 움죽거려도 움죽거림이 아니요, 움죽거리지 않아도 움죽거림이요, 그 가운데 묘미가 있느니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모두 이것은 우리가 깨달음을 가진 여러 조사들도 부처님들도 다들 그렇게 앉아서 이 얼굴을 여기다 두고도 팔방미인이었지요. 뒤도 보고 옆도 보고, 땅속도 보고 위도 보고, 다 보기 때문에 어느 거 하나 안 보이는 게 없어서 면경 알 같다. 면경에 자기가 비치는 게 자기가 아니고 그 팔방미인이 바로 보여야 된다 이런 거죠. 그러니 사무 사유(四無四有) 이 모두를, 한꺼번에 시공을 초월해서 걸림 없이 돌아가는 이 소용돌이를 바로 우리는 고개를 이리로 두고도 뒤를 볼 수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과거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바로 현실에, 미래에 이 삼세가 바로 일심(一心), 현실 지금 이 자리라는 겁니다.

삼세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항상 얘기했죠. “바로 삼세가 있으니 네가 태어나기 이전을 찾아라.” 이러니까, 내가 태어나기 이전을 찾느라고 바깥을 그냥 헤매고 도는데 그게 아니에요. 즉 과거도 자기요, 현실도 자기요, 미래도 자깁니다. 그래서 표현을 그렇게 했죠. 작년 씨를 갖다가 올봄에 심었더니 싹으로 화했더라. 싹으로 화했는데 작년 씨를 어디서 찾는고? 그래서 싹으로 화해서 벌써 열매가 맺히고 열매가 익어서 그냥 그 열매가, 씨가 그 속에 들어 있는데 아니, 작년 씨를 작년에 가서 찾다니! 그래서 그 표현을 그렇게 했습니다. “작년 씨를 올봄에 심었더니 싹으로 화해서 태어난 것을 작년 씨를 어디 가서 되찾노?”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가정에 어떠한 문제가 닥쳐온다 하더라도 한생각을 잘 내서 새 물로 바꿔 쓸 수만 있다면….’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

질문 큰스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참다운 시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청년 법우입니다. 우리가 미생물에서부터 지금 사람 몸에 이르기까지 계속 나고 죽고 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이 자리까지 정말 귀중한 생명을 얻어서 오게 됐다고 스님께서 자주 말씀하셨는데요,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 뭐라고 해야 되나, 그렇게 변하면서도 뭔가 찾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어떻게 표현을 할까요? 저 콩나무로 표현을 할까요? 콩이 말입니다, 콩씨가 있어서 땅에다 심었더니 콩싹이 났어. 뿌리로 화해 가지고 싹이 났다고요. 싹이 났는데 그 싹은 그 뿌리에 의지를 해야죠. 그렇죠? 뿌리에 의지를 해야 싹이 잘 되죠? 그리고 또 콩씨가 열리죠? 콩꽃이 피고. 그럼으로써 또 콩나무는 내년을 기약한다는 생각도 없이 영원히 지속해서 이어 가는 겁니다. 그 생각도 없는데 자연스럽게 그냥 자연적으로 그렇게 이어 가게 돼 있단 얘기예요. 그러면 자기 뿌리는 자기 싹을 위하고 자기 싹은 자기 뿌리를 연상하고, 즉 붙들고 믿고 나가야죠. 그런데 그 콩이 말입니다, 뿌리로 화했는데 그게 무슨 콩이냐고 그럴 거냐 이겁니다. 그래서 무슨 콩이냐고 한다면은 과거로 돌아가서 찾으려고 아무리 뿌리를 헤쳐 봐도 콩이 없더란 얘기죠.

여러분이 아무리 과거로 돌아가서 콩씨를 찾으려고 그래도 콩씨는 없고 자기 몸에, 즉 콩나무 안에 콩씨가 있다 이런 거지요. 그러니까 콩씨가 아직 안 열린 콩나무는 콩씨가 잘 되게 꽃이 피고 콩씨가 열리게끔 뿌리에게 거름을 줘라. 이런 거는 뭐냐 하면 모든 거를 믿고 거기에 의지하면은 콩나무는 거름이 된다. 그 마음이 말이에요. 거름이 돼서 그 콩나무를 푸르르게 만들고 꽃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고 그 나무에서 무르익게 하고, 그래서 모든 만민을 또 먹이게 하고, 되남게 하고, 되남아서 또 심어서 또 먹이게 하고…. 그러니까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러하다 이겁니다.

새들도 뭐 자기가 꼭 그렇게 해야만 된다 이런 것도 없이,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려고 애를 쓰고 주워다 먹이느라고 애를 쓰고, 그러다가도 누구한테 알을 뺏기면은 속수무책으로 그냥 쳐다보고 울고 서게 되는 거죠. 우리도 자식을 기르다가 어쩌다 그냥 보이지 않는 데서 만약에 채 갈 때 그냥 누가 채 가는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수밖에는 없죠. 어떡해요? 보이는 사람이 때려서 죽였다면 그냥 사생결단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데서 채 가는 거는 어쩔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 공부,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사는 날까지는 꼭 편안하게 살게끔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콩씨가 다 여물어 심을 수 있게끔 된 연에 콩깍지가 벗겨져야지 정상인 거거든요. 그러니깐 인간도 그렇게 되게끔 하기 위해서, 사는 날까지 꼭 틀림없이 편안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그 나무를 정상적으로 기르려면은 이 도리를 알아야 한다 이겁니다. 새알 잊어버리듯이 자식들도 잊어버리고 새 새끼가 죽거나 또 채여 가고 먹히듯이 그렇게 당하고 살지 않으려면 이 도리를 알아야만 되는 거죠. 새 새끼만 그런 게 아닙니다. 그렇게 강하게 스스로서 자기가 해결해야 될 문제를, 즉 소임을 꼭 해야 지키고 간다 이겁니다.

연어나 뭐 뱀 새끼나, 뭐 뱀도 여러 종류지마는 종류대로 자기 몸을 희생해서 새끼를 살려서, 즉 말하자면 자기 몸이 아니라 자기 자식이 자기 몸이라고 생각하는 짐승은 다 자기가 희생하고 들어가요. 자기 껍데기, 즉 옷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딱 자기 새 옷을 많이 내놓고는 자기 헌 옷은 그냥 죽어 버리는 거, 즉 부모가 죽어 버리는 거 이런 거 있지요? 껍데기를 벗고선 또 새 알맹이가 나오고 말입니다. 또 다른 벌레가 또 다른 벌레로다가 진화하고 이러는 거 많이 보지 않습니까? 그러면 인간도 역시 그렇다는 걸 알아야 돼요. 마음이 차원에 의해서 바꿔짐으로써 모습도 바꿔져요. 현재 모든 사람들이 그걸 몰라서 그렇지 내 체질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 낳는 사람이 “순산하게 해 주십시오.” 그랬는데 순산치 못하게 될 때는, 즉 말하자면 거꾸로 있거나 뭐 잘못됐거나, 태반이 기울어졌다거나 이런다면 벌써 거기다가 관하면은 그 태반도 올바로 세워지고 또 거꾸로 있던 아이도 바로 세워지고 이렇게 되는 수가 있죠. 그렇게 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 속에 소임 맡은 공장에서들 다 너 나 할 거 없이 통신이 정수에서, 대뇌에서 사대(四大)로 통신이 가면 다 그렇게 작용을 해 주게 돼 있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하게 믿고 진실하게 해야만 대뇌로 통신이 된단 얘기죠. 이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그냥 무턱대고 생긴 인간이 아닙니다. 이것도 과학적이고 이것도 벌써 자동적인 컴퓨터가 머리 위에 달려 있어요. 대뇌가 인간 컴퓨터예요. 오신통이라고 하는 바로 머리의 누진(漏盡)에서 가지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자동 컴퓨터거든요. 그러니까 입력된 거를 지울 수도 있고 입력된 거를 입력된 대로 나오게 할 수도 있는 게 바로 누진이에요. 컴퓨터를 만지는 주인이다 이 소리입니다. 이렇게 소상히 말을 해 줘도 아리송할지 몰라요. 그러니 그저 잘못되든지 잘되든지 내가 떡 그릇에 들어가 보고 그냥 아무 데라도 들어가 보고 그걸 체험을 하고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백 가지 음식 차려야 하는지요

질문 저는 불교를 믿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불자입니다. 얼마 전에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는데, 백종날 백 가지 음식을 만들어서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면 돌아가신 조상님께서 좋은 곳에 태어나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을 위해서 백 가지 음식을 모두 차려야 어머님이 좋아지실 수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뜻으로 표현하신 것인지 그 의미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극락왕생하실 수 있으려면 백종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답변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상인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자식들을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자식들을 길렀습니다. 근데 그중 한 아들이 결혼을 해서 또 두 아들을 낳았는데, 남편이 죽고 나서 혼자 자식들을 기른 그 어머니가 손자를 봤으니 얼마나 손자가 귀여울 것이며, 아들들을 기르느라 얼마나 손발은 다 터지고 못쓰게 됐겠습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홀연히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서 절에 나갔습니다. 절에 나가서는 부처님 전에 시주도 많이 할 수 없는 형편이니까 그저 쌀 서너 되 짊어지고 올라가고, 또 무슨 음식이라도 새로 나는 거 있으면 깨끗하게 고르고 골라서 가지고 가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단지 이런 말만을 했습니다. “어머니의 은공을 다 갚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부처님! 어머니의 은공을 꼭 갚게 해 주소서.” 하고선 항상 그렇게만 하고 내려오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무를 해서 지고 내려오다가 너무 무거워서 앉아서 쉬고 있는데 어느 스님께서 옆에 턱 앉으시면서 “더워서 식혀 가느라고 이렇게 앉았느냐.” 하시더랍니다. “네.” 하고 대답을 하니까 “참 자네는 효성이 지극한데 한 가지 모르는 게 있네.” 그러시더랍니다. 그래서 “어떠한 것이 모르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자네는 자네 턱 밑에, 자네를 사랑하던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당신 마음에 있고, 어머니의 은공을 갚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바로 당신 마음에 있으니, 어머니도 당신 마음에 있는 것이고 당신 마음도 바로 당신 마음에 있는 것이니 어머니가 어디에 계신지 마음 안으로 항상 지켜보라.” 하시더랍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마음 명경에 당신 어머니가 비칠 때에 바로 당신은 어머니의 은공을 갚을 수 있느니라.”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 항상 ‘내 마음 안의 명경이 어디 있어서 어머니를 뵐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저 자나 깨나 마음에 관했답니다. 마음의 명경이 있어서 우리 어머니를 좀 뵙게 해 주며, 은공을 갚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랬는데 어느 날 문득 명경이, 정말 마음의 눈이 뜨여서 보니까 어머니가 바로 자기네 집 연못의 큰 구렁이가 돼서 자기들을 지켜 주고 집을 지키고 계시더랍니다. 그 연못 속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통곡을 했습니다. 세상에! 어머님이 그 모습을 벗지도 못하신 채 여기에서 그렇게 계시다니, 우리를 떠나지 못하시고 그 모습을 이렇게 쓰면서까지 우리를 위해서 여기에 계시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하고 통곡을 하면서 그냥 연못에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의 말씀이 자기 속에서 나왔습니다. 말하자면 둘이 돼서 나온 게 아닙니다. 바로 그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그 마음이기 때문에 한마음 속에 어머니도 계시고 나도 있고 모두 있는 것이죠.

그렇게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얘야, 네가 나를 봤으니 나는 인제 한이 없다. 너는 너의 두 아들을 위해서 길을 밝게 인도하기를 바란다. 네 마음속에 명경이 있는 거를 봤으니 나는 인제 홀연히 떠나도 손색이 없으리라 믿는다. 너를 믿고 이젠 떠난다.” 하면서 말이 끝나자마자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겁니다.

그 마음속에서 나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뒤를 돌아다보지 마라. 너는 모습이 있는 것이요, 나는 모습을 벗느니라. 이 생사의 교차로에서 돌아다보지 마라.” 하는 목소리가 그냥 요란하게 들리더랍니다. 그래서 돌아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서 엎드려서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간 곳이 없고 그렇게 요동치던 날이 환하게 밝으니 얼마나 좋았던지 그냥 춤을 추었더랍니다.

그러니 우리가 백 가지 음식을 해 놓기보다는, 왜 백 가지만 해 놓겠습니까? 부모의 은공이라는 것은 백 가지 해 놓고 백 가지를 다 스님들한테 해 드린다고 해도 그건 부족합니다. 그렇게 한다는 건 너무 욕심이 많아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떡을 둥글게 하나 해다 놓고, 이 속에 천 가지 만 가지, 백종이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또 돌아가신 부모나 죽은 자식이나, 스님네들이나 유생 무생이 다 먹고도 남을 떡 하나를 해다 놓는다면, 그 속에 다 들어 있으니 그 속에 먹고 싶은 게 다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보물이 그 속에 다 있지 않습니까. 칠보가 가득 차 있어서, 우리의 한마음이 그쯤 된다면 어느 누구도 덜 먹었다 더 먹었다 할 게 없이 두루두루 몽땅, 내 부모 네 부모 따로 없이, 내 자식 네 자식 따로 없이 전부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법입니까?

그러니 예전에 살던 대로 여러 가지 차려 놓고 그 의식을 잡아 두지 말고, 칠석날에 내가 닦아서 백종일에 넓고 광대무변한 부처님 자리에 한자리 할 수 있게끔 그 의식이 확 트이게 이끌어 주는 것이 진정 부모의 은혜를 갚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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