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세상과의 소통 18

청소년들의 性문제 고민
인간의 성적행위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감각적 자극에 영향을 받는다. 그 중에서도 시각적 자극은 가장 영향이 크다. 지나간 여름은 유별나서 사람들은 더위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자신의 몸을 드러내고자 하였고, 그 자연의 몸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더위를 씻겨줄 뿐만 아니라 오감을 넘어 성적 감각까지도 자극하였다.

특히 청소년들은 성에 대해 민감하기 때문에 이러한 성적 자극에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상담을 받으러온 대학생 내담자는 자신의 고민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저는 때때로 두 남녀가 성관계하는 장면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장면을 떠올리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 주위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공부를 하다가도 옆에 있는 친구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마치 저의 이상한 생각이나 행위를 알고 흉을 보는 것 같아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대화하기 싫고, 공부나 일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이 내담자는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만화방에서 성인만화를 보게 되었고, 처음에는 호기심 때문에 보았으나 차츰 그 만화의 성행위장면을 보고 충동을 느껴 자위행위를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내담자는 그러한 성행위에 대한 생각이나 체험을 자기만이 하고 있으며, 자기 또래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깨끗하고 밝게 사는데 자기만이 불결하여 어두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은 자위행위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번민으로 보내야 했으며, 지금도 자위행위와 관련된 죄의식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기 성적 욕구 인해
다수 청소년 번민 휩싸여
자위 바람직하지 않아도

과정 알아차리면 벗어난다

청소년들의 고민 중 하나가 성(性)문제다. ‘신나는 전화’에 걸려온 상담내용 중 가장 많은 것이 성문제라고 했다. 아마도 드러내놓고 말을 할 수 없어서 그렇지 성문제만큼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의 성욕은 아동기의 자기중심적인 행위로부터 청소년기로 바뀌면서 차츰 이성에게 집중함으로써 이성과의 연인관계를 통해 성적욕구를 충족하고자 한다. 이 시기는 급격한 신체적 변화와 더불어 부모로부터의 심리적 독립과 자기정체성 확립이라는 과중한 발달과제를 안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발달과정에서 청소년들은 성숙된 모습으로 성에 대한 경험을 하기보다는 여전히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데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성적 행위과정이나 행위 후 두려움과 죄의식으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내담자가 말한 자위행위와 같은 성적충동으로 인한 행위는 삶의 전시기를 통해 일어난다. 성적인 충동 외에도 울적할 때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지나치게 긴장이 쌓였을 때도 이와 같은 성적 행위를 하게 된다. 따라서 청소년기의 자위행위는 성장과정에서 일어나는 삶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어서 수치스럽거나 불결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부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자위행위가 약간은 의식적인 죄의식을 초래한다고 말한다. 자위행위가 의식적으로 추구된다면 개인의 심리적인 발달을 방해할 위험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적 욕구가 자위행위로 나타나는 것은 이성과의 만남에서 일어날 성적욕구가 자신을 통해 일어난 성적행위라고 볼 수 있다. 청소년들의 성적 행위가 심리적 성장을 방해하는 이유는 그들이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나 이성에 대한 상호존중이라는 의식을 갖기도 전에 개방된 성적 환경 속에서 성적 행위에 몰입하는데 있다.

일시적인 만족감
충주 달래강 전설에서 보듯이 성에 대한 충동은 근친 간에도 일어날 수 있다. 두 남매가 길을 가다가 강가에 이르자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에 불어난 강물을 건너기 위해 남동생이 누나를 업고 강물을 건너게 되는데, 누나의 탐스런 몸을 보고 성적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오누이라는 근친 간의 윤리의식이 가로막아 성적충동을 자제하지만 그 성욕을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성기를 돌로 쳐 자결하게 된다. 비록 전설이긴 하나 청소년 시기의 성적 충동이 이처럼 가혹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만일 이러한 순간에 적절할지는 몰라도 자위행위라는 대안행동을 하였더라면 최소한 자결에 이르지는 않았으리라.

물론 자위행위가 성적욕구를 해결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성인들도 자위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자위행위의 금지는 그 행위를 포기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동시에 자위를 금지시킨 사람에 대한 반항의 동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위행위는 남성성을 향한 길을 열어 주고, 자위행위에 대한 금지와 더불어 갈등이 시작되지만, 그때부터 성기능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정상적인 성 목적은 성교라는 행위를 통해 생식기가 결합되는 것으로 간주되며, 그 행위는 성적인 긴장을 완화시키고 성본능을 일시적으로 해소시킨다. 이것은 마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과 유사한 만족감이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은 이러한 자위행위와 같은 성적행위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방법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드가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는 그 근원을 이렇게 말한다. 남아가 태어나서 3-5세가 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자신이 아닌 아버지에게 성적 행위의 특혜를 제공하는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不貞)한 행위로 간주한다. 만일 그러한 충동이 재빨리 지나가지 않는다면 환상에 빠지는 것 외에는 다른 출구가 없으며, 그 환상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서로 다른 별개의 환경 속에서 성행위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정신적 긴장이 소년을 자위행위로 이끌며, 그런 행위 속에서 소년은 위안을 찾는다. 욕망과 복수에 대한 갈망이라는 두 가지 충동이 계속적으로 결합되어 작용하게 되면 그의 어머니의 부정에 대한 환상이 뚜렷하게 자리 잡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가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상대역은 거의 항상 소년의 자아의 모습이거나, 더 정확하게는 그가 아버지처럼 성장하고 자랐을 때의 자신의 이상화된 인격이라고 보는 것이다.

알아차림으로 멀어져
이러한 자위행위와 같은 성적 욕구도 통찰명상, 알아차림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은 성적욕구를 실제로 행하면서 그 과정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매 순간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리듯이 성적욕구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허탈한 마음까지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과정은 지극히 깨어 있고 순수한 알아차림이므로 처음 행동부터 마지막 행동, 결과까지 충분히 바라보아 깨달음을 얻는데 있다.

따라서 반드시 지켜야 할 계율이 있다. 행위과정이 자신이나 다른 누구에게도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대상이 성욕을 발산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관한 행위를 하면서 전 과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가령 성욕이 일어날 때 간절한 마음이라든가, 손으로 성기를 만지는 행위를 할 때, 마음 상태, 주의, 몸의 느낌, 그 과정에서 생기는 마음의 위축이나 열림을 알아차린다. 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경험, 몸의 느낌, 그 결과들을 행위자 자신의 안내자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깨달음을 얻을 탁월한 기회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나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달래강 전설에 나오는 소년의 경우 강물을 건너는 동안 등에 업혀 있는 누나의 체온, 부드러운 피부, 내려놓으면서 눈에 들어오는 물에 젖은 옷이 달라붙은 몸매 등에서 강한 성욕이 일어났다면 옷을 갈아입고 뒤따라간다고 말한 뒤 자위행위를 하면 된다. 다만 그 과정을 단순한 성적 쾌감만을 느끼는 데서 끝나면 다음에도 계속 그러한 행위를 생각하거나 그 욕구를 또 경험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욕구가 일어나는 마음부터 행위과정, 느낌의 변화, 끝난 뒤의 허탈한 마음상태 등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위행위를 하나의 학습과정으로 여기면서 느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어떤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고 싶어서 그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마주 대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선 그 음식을 간절히 먹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음을 바라본다. 오래전부터 그 음식을 그려보고 먹고 싶어 했던 욕망을 이제는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 감사한다. 그러면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뜨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입에 넣고 씹으면서 행복한 기분에 들뜨는 마음을 바라본다. 점차 음식이 뱃속을 채우고 포만감을 느끼면서 이제는 그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난다. 그러면 ‘모처럼 이런 기회를 가졌는데 마음껏 먹어 보자’고 마음이 속삭인다. 그때 그러한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순간을 선택한다.

이 순간이 최고로 만족스럽지만 욕구는 더 큰 만족을 원한다. 욕구에 따라 더 먹게 되면 그 때부터 만족이 서서히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숟가락을 놓지만 지금까지의 만족감은 사라지고 고통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결과 다시는 그 음식을 향한 불타는 욕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성욕이나 식욕이라는 강렬한 욕망은 우리의 몸, 마음, 정신이 열리도록 이끄는 안내자가 된다. 영적 열림의 과정에서 우리는 그 욕망들이 우리의 진정한 내가 아님을 발견한다. 우리를 욕망으로 이끈 모든 쾌락 뒤에는 온갖 고통과 불안이 있으며, 그것을 넘어섰을 때 우리는 자유, 기쁨, 그리고 온 생명 앞의 평안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떠한 행위도 그 과정을 알아차리면 아름답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