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사랑하지 않을 용기

그룹 ‘어반 자카파’의 노래 ‘널 사랑하지 않아’를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멜로디가 편안하고 서정적이어서 좋았는데 점차 가사가 귀에 들어오더니 가슴에 새록새록 담기기 시작했다.

“널 사랑하지 않아. 다른 이유는 없어. 미안하다는 말도 용서해 달란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그게 전부야. 그게 내 진심인거야.” -‘널 사랑하지 않아’ 中

사랑은 늘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 하지만 동시에 아픔도 가져다준다. 사랑만큼 좋은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잔인한 것도 없을 것이다.

‘사랑’에는 아픔도 공존해
많은 경우 집착도 뒤따라
불교에서는 ‘갈애’라 표현
사랑ㆍ관계서 중도 찾아야


사랑을 추구하는 일이 우리의 본성이라면 그것이 주는 ‘기쁨과 아픔’이라는 이중성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우리의 본래적 기능이다. 우리의 마음은 늘 사랑으로 영원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사랑 때문에 마음이 한 없이 커졌다가도 급격하게 작아지기도 한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우리를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 일까?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들을 살아 있게 하는 원동력이며 존재의 이유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사랑과 그로인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출발한다고 한다. 즉,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사랑으로 인한 것이다.

네모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상징하는 부호라면 네모 안에는 들어 있는 동그라미는 보이지 않는 마음이 된다. 그것은 또한 둥글둥글한 사랑의 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네모 안에 든 것은 둥근 마음과 사랑’이 된다. ‘모 안에 든 것이 사랑’이라는 말은 ‘모든 것은 사랑’이라는 말로 정리된다. 부호로 표현하면 ‘네모 안에 들어가 있는 동그라미’가 되는 것이다. 모든 존재에는 사랑이라는 생명력이 자리한다는 이치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부터 벗어나기 힘든 족쇄가 채워진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본래 사랑 그 자체는 아름답고 숭고하다.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문제다. 우리는 많은 경우 그것에 집착한다. 집착하는 그 상태를 불교에서는 갈애(渴愛)라고 하는데, 사랑을 갈구하는 그 목마름이 고통을 만든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에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본질적인 사랑의 가치는 훼손되고 변질되며 그로인해 고뇌가 따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반가운 손님 ‘어반 자카파’의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노래가 갈애에서 벗어 날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해 주었다. 거기에는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팁이 숨어 있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고 단순했다. 그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마음인 것이었다. 이 간단한 메시지는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묵직한 하나의 힘이 되었다. 마치 청량감을 주는 시원한 사이다를 한 모금 들이킨 기분이 들었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미움받을 용기’를 내야하고 그 목적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행복을 위한 모든 행동에는 자신의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용기’를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 학교를 못 가게 되었다고 해 보자. 아이가 배가 아파서 학교를 못 갔다는 것이 인과법칙에 맞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아들러는 거꾸로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서 배가 아파진 것이라는 원리를 주장한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학교를 가지 않겠다는 ‘목적’을 만들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배가 아픈 ‘상태와 행동’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우리에게 목적의식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인연이라고 한다면, 그 인연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좌우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감정’이며 그 감정의 핵심은 ‘사랑’인 것이다. 어반 자카파의 노래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는 ‘감정’이 헤어지고 싶다는 ‘목적’을 만들었고, 헤어지기로 ‘결심’을 한 다음 상대에게 ‘통보’를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흐름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은 무엇으로 인해 발행하는 것인가. 불교에서는 이것을 까르마(Karma) 또는 업식(業識)이라고 한다. 전생부터 만들어지고 쌓인 업의 무더기가 나의 현재의식과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 감정은 내가 어떠한 목적의식을 갖도록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의식이 나의 행동을 결정짓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업식에 사랑이라는 깊은 원천적 의식이 자리한다. 그래서 사랑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에 집착한 나머지 상대방을 구속하려 들고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감정에 치우친 채 상대방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 집착은 자기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나와 남에게 모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 단순하게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다’는 마음을 내거나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떨까? 마음을 비우고 단지 심플하고 쿨하게 상대방을 놓아 주는 것이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상대방을 구속하고 못살게 굴어서야 되겠는가? 결정이 섰다면 용기를 내어 나의 진심을 상대에게 전달하면 된다. 단, 결정에 책임을 져야한다.

반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갑작스런 이별통보에 가슴이 아프고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 마음과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것이다. 나는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정으로 대하고 있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너무 차갑게 마음을 접어버리고 표현하는 것도 매정한 것 같아서 조금 꺼림직스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다. 이러한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늘 신음하고 갈등하면서 지혜를 강구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과하지도 지나치게 모자라지도 않게 살아가는 것을 중도(中道)적 삶이라고 한다. 한 쪽으로 치우친 삶이 편협하고 조화롭지 못한 삶이라면 중도적인 삶은 균형 잡히고 아름다운 삶이다. 중도적인 삶을 위해 나는 어떠한 마음가짐을 갖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나와 가까운 사람과 어떤 감정적인 트러블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중도적인 마음을 가져 보자. 기존에 내가 가진 습관적인 생각이 아닌, 상대방과 그 중간의 적절한 균형감을 찾아보자. 오히려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행복의 문이 열릴 수도 있다. 이렇게 사랑 때문에 울고 웃으며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힘찬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