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日隨想- ① 몸을 붙들고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더워 들뜬 마음과 몸을 정리할 시기다. 한국을 대표하는 수필가인 맹난자 작가가 본지에 가을 맞이 수상을 4회 연재한다. 그는 연재를 통해 몸과 죽음, 시간의 공성(空性) 등에 대한 깊은 사유를 유려한 문체로 전달한다. 깊어가는 가을, 문인의 수상를 통해 독자 제호들도 성찰의 시간을 갖길 바란다.  〈편집자 주〉

짧은 봄밤보다 나는 여름날의 긴 하루해를 좋아 하였다. 더구나 별안간 쏟아지는 장대비에 갇혀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일(夏日)의 그 여가 시간이란 얼마나 선물같은 것이던가. 그런데 이제는 눈만 뜨면 긴 하루가 제한 없이 주어진다.

일흔에서 여든에 이르는 시간은 아이 때의 일주일 정도에 해당하는 것 같다고 말한 이가 있지만, 그 나이 때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몸이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루 중 반나절밖에 살지 못하는 노년의 시간은 사라짐으로 가는 휴지(休止)의 시간, 어느새 하릴없는 노인이 되어 땅거미가 내려앉는 뜰을 우두커니 내려다  보고 있다. 어쩐지 저물녘의 뜰도 슬퍼 보인다. 성하(盛夏)를 지나고 있지만 소멸로 가는 그 푸른 것들의 발자욱을 알기 때문이다.

죽음은 나를 쉬게 하는 것이니
소로처럼 포근한 땅의 감촉을
나는 맨몸으로 느끼고 싶다.
진정한 휴식은 자연에의 복귀
망상 끊어진 침묵, 적멸이다.


몸보다 무상(無常)한 것이 다시 있을까. 감꽃 같던 계집애는 등 굽은 노파가 되었고, 풍우를 막아주던 몸도 시간의 부식으로 닳아져 오늘 새벽에는 무릎과 손가락 뼈마디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관절마디의 통증, 신경세포가 숨을 참고 통증을 견디느라 애쓸 때 비로소 내 몸의 존재가 절실하게 체감되던 것이다. 엉거주춤 이런 몸을 붙들고 나는 노후의 과정을 지나고 있다.

생에서 노사(老死)로 바로 가면 좋으련만 그 과정에 매복하고 있던 온갖 질병이 나타나 몸을 괴롭힌다. 사고가 아니라면 우리 대부분은 아프다가 죽는다.

몸이 떠날 때가 되었는데도 죽어지지 않는 사람의 몸처럼 괴롭고 끈질긴 것이 있을까. 보스톤의 한 호텔방에서 “왜 빨리 죽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고함을 치던 유진 오닐의 모습이 떠오른다. 파킨슨병으로 그는 2년 가까이 그 방에 유폐되어 있었다. 인고의 한계를 감당한 그에게 머리가 숙여지기도 했다.  

‘봄의 첫날 가을의 끝을 생각한다’는 어느 시인처럼 나는 가을의 끝에 붙잡혀 100여 명 인물들의 마지막 순간을 채집하여 책상 위에 한가득 부려 놓았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졸저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였다. 남산이 북산에게 건네는 생사의 은밀한 눈짓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역사 속으로 떠나는 죽음 기행’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이 나온 후 사람들은 내게 “어떻게 죽을 것이냐?”고 물어왔다. 모 방송국 PD가 찾아왔을 때 “글쎄, 좋은 죽음의 모델들을 제시할 수는 있으나 과연 그것대로 죽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답했다.

“오! 주여.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게 하소서”라던 릴케의 말대로 어떻게 하면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내겐 화두라고 말하며 의료행위를 거절하고 타계한 제클린 케네디 여사의 존엄사를 거론한 뒤, 나의 경우 다만 어떠한 연유에서건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게 되었을 때, 그때 죽음이 찾아와 준다면 더없이 좋으리라는 생각이며, 떠나려는 시간과 끊어지는 시간이 적절하게 맞추어지기를 바랄뿐이라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그것은 죽음을 몇 미터 앞에 둔 20년 전의 일이다. 죽음은 전적으로 몸의 소관, 몸의 일인걸 몰랐던 것이다. 떠나려는 시간에 목숨이 때맞춰 끊어질리 있겠는가. 억지로 목숨을 끊어 시간을 맞추기 전에는 어려운 일이지 싶다. 폐기종을 앓던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은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발가락을 다쳤다. 그는 주먹으로 땅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곧 갈 건데 왜 이렇게 야단이냐?”

죽음의 시간을 알리는 신들의 예고라고 생각한 그는 그 자리에서 목을 맸다. 92세였다.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낙스도 107세가 되자 곡기를 끊고 아사를 택했다. 미국의 사회개혁자이던 스콧 니어링도 100세가 되자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의 아내가 남편 곁에서 독려해 준 그 속삭임을 나는 내 것으로 삼고 있다.

“몸이 가도록 두어요. 썰물처럼 가세요. (…) 당신은 훌륭했어요. 당신 몫을 다했어요. (…) 빛으로 나아가세요.”

스콧 니어링은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도 몸이 가도록 두는 일이 아닌가 한다. 약을 쓸 때도 있지만 통증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노라면 경허 스님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스님은 길가는 아이들을 불러 놓고 지게막대로 자기를 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많이 때리는 사람에게 돈을 많이 주겠다고 하니 아이들은 신바람이 나서 스님을 두들겨 팼다. 그때마다 스님은“나는 안 맞았다 안 맞았다”고 외쳐댔다. 매를 맞은 것은 허깨비 같은 몸이요, 언젠가는 사라질 육체이고 청정한 진아(眞我)는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허깨비 같은 몸을 붙들고 ‘안 아프다, 그래 아픈 게 아니다’라고 되뇌며 어떻게 하면 그분들처럼 몸을 버릴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일체 변하는 법은 그 실체(實體)가 없는 것./ 모양이란 원래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이 같은 임종게를 남긴 부산의 혜월(慧月)스님은 안양암 뒷산에 올라 한 손으로 솔가지를 잡은 채 호흡을 접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경통(景通)선사는 촛불을 켜들고 스스로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제자들의 우는 모습을 보며 열반에 들었다. 불교에서는 원래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 불교에서는 죽음이 없다고 하는가?

우리의 존재는 인연에 의해 연기(緣起)상황으로 존재하다가 조건이 다하면 돌아가는 무아(無我)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연기에 의해 가합(假合)된 이 몸은 본래 공(空)한 것. 따라서 이 몸에는‘나’도 없고‘주재(主宰)’도 없다. 그래서 붓다의 제자 바칼리 비구가 몸의 극심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살을 결행 했을 때 붓다는 “그는 내 설법을 듣고 분명히 깨달아 알았고, 법(진리)에 대해 두려움 없이 반열반에 들었다”고 말했다.

바칼리는 ‘오온(몸을 구성하는 色受想行識의 5요소)이 공(空)하다’는 것을 이미 터득하여 탐애로 구하는 업(業)이 멈추었다. 색(色, 몸과 물질)은 무상하며 변하고 바뀌는 것. 그로해서 생겼던 번뇌가 끊어지고 집착할 것이 없게 되자, 안락에 머무르게 되어 반열반(般涅槃)을 얻게 된다는 붓다의 말씀을 그는 믿고 따랐던 것이다. 그가 반열반에 들었다는 붓다의 기별은 그러니까 ‘윤회(再生)’의 문제를 해결한 인증표인 셈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그분들의 열반을 자살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살과 열반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마음 없음(心無常)과 무아(無我)를 알지 못하고서 집착과 원한을 품은 채, 현실 도피로 자살을 감행 한다면 거기에는 묵은 빚(宿債) 이 남게 되고 업(業)이 따라 붙어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열반은 그와 반대가 되지 않을까.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금기시하여 왔다. 생명은 오직 신의 특권이므로 우리가 마음대로 지배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자신의 에세이 〈자살에 관하여〉에서 우리의 영혼은 필멸이며 죽는 순간 육체와 더불어 사라지며, 우리를 체벌할 신(神)도 없는데 자살을 반대할 명분이 있을까를 묻는다.  이상적인 자살이란‘금식(禁食)’이라고 언급했던 쇼펜하우어가 생각난다. 107세의 데모낙스나 100세의 스콧 니어링은 떠나려는 시간과 목숨이 끊어지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금식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그들의 몸은 이미 기운이 소진할대로 소진하여 자연에 동화되는 자연사에 가까운 죽음이었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은 모방하지 않기를 바란다.

 “살 만한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삶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삶이 우리가 짊어 질 수 없는 짐이 된다면 우리가 자살을 택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흄은 또 적고 있다.

나는 그것의 정당 여부를 쉽게 결론 내리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최대의 고유한 선택이므로. 나는 다만 이 몸의 실체 없음(無我)을 알면서도 생인손 같은 통증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통증은 현실이다.

인도의 유마힐 거사는 번뇌를 떠나지 않고도 열반에 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온갖 상념 속에 이 몸을 붙들고 있다. 아니 서서히 자살하고 있는 중이다. 늙는다는 것만으로도. 이것은 1980년 교통사고로 죽은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자주 인용하던 말이다. “늙는다는 것, 이는 서서히 자살하는 것”이라고.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다만 그것으로 가는 과정이 길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죽음은 드디어 나를 쉬게 하는 것이려니, 나는 기쁘게 땅을 껴안을 수 있었다는 헨리 데이빗 소로처럼 포근한 땅의 감촉을 맨몸으로 느끼고 싶다. 진정한 휴식은 자연에의 복귀(復歸)이다. 망상(妄想)이 끊어진 침묵, 적멸(寂滅)이다.

땅거미는 정령(精靈)처럼 사뿐히 지상에 내려앉고 푸르스름한 어둠이 사위를 감싼다. 이 고요한 시간에 나는 대지와 하나가 되고 싶다. 심장마비로 혼자 눈을 감은 어머니처럼 긴 여름날 하오에.

미물들조차 생명의 번식이 왕성한 여름, 그 조용한 숲그늘 한 켠에서 사위어가는 목숨들. 아름다운 우주의 균형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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