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동업중생의 삶이란?

勝施他苦品第十九
菩薩見他苦時卽是菩薩極苦。見他樂時즉是菩薩大樂。以是故菩薩恒利他。凡愚生見他苦時自己樂。見他苦不以苦。賢人者自苦以樂樂他不以己苦。凡愚生己少樂而大苦他。賢人者與他少樂自受大苦。惡行者修少樂因得大樂時雖生歡喜。不及菩薩以少樂利他人時心大歡喜倍過於是。菩薩見他受苦以身代之。身雖受苦不以苦。心中快樂生大歡喜。菩薩悲心得自在樂。不三有諸苦之所逼惱。菩薩飮悲甘露故不諸苦所苦。不苦所苦故能他受苦。凡愚生見他苦時心中生樂。見他樂時心中生苦。菩薩見他苦時則苦樂時則樂。無悲心者見他苦時如月極冷。有悲心者見他受苦如夏盛日。不問愚智見他苦時。皆生厭離生憂惱因。有悲心者深生憐愍作決定心。一切生苦是我苦。

번역|
승시타고품 제19.
보살은 타인의 괴로움을 보면 즉시 보살도 극히 괴롭고 타인의 즐거움을 보면 즉시 보살도 크게 즐겁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항상 타인을 이롭게 합니다. 범부 어리석은 중생은 타인의 괴로움을 볼 때 자기가 즐겁고 타인의 괴로움을 보면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현인은 자신은 괴로워도 타인의 즐거움을 즐거워함으로써 자신은 괴롭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범부 어리석은 중생은 자신의 적은 즐거움을 위해 크게 괴롭고, 현인은 타인에게 적은 즐거움이라도 주려고 스스로 큰 괴로움을 받습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이는 적은 즐거움을 닦은 인연으로 큰 즐거움을 얻을 때 비록 좋아하지만, 보살이 적은 즐거움이라도 남을 이롭게 할 때에 미치지 못하며 마음에 기쁨은 이보다 배나 더합니다. 보살은 타인이 고통 받는 것을 보면 자신이 대신 받으려 하고 자신의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아 심중에 즐겁고 큰 기쁨을 냅니다. 보살은 자비심으로 자재락(自在樂)을 얻되 삼계의 모든 괴로움으로 핍박받지 않습니다. 보살은 자비의 감로수를 먹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으며,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기에 타인을 위해 고통을 받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은 남의 괴로움을 보면 심중에 즐거움을 내고, 타인이 즐거울 때 심중에 괴로움을 내지만, 보살은 타인의 괴로움을 보면 괴롭고 즐거울 때 즐겁습니다.

자비심 없는 이는 타인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달처럼 차갑지만, 자비심 있는 이는 타인이 괴로움 받는 것을 보면 여름의 해와 같습니다.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을 불문하고 타인의 괴로움을 보면 모두 싫어 떠나며 근심과 번뇌의 원인을 일으키지만, 자비심 있는 이는 깊은 연민을 내며 결정심(決定心)을 지어 일체 중생이 괴로우면 즉시 나도 괴롭습니다.


해설|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윤회가 없다.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이에게 윤회가 없다는 말과도 상통하는데, 이 말을 보살은 ‘윤회 속에 뛰어들어도 윤회한다는 괴로움이 없다’는 말로 달리 해석하고 싶다. 보살은 자신의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에게 괴로움이 있다면, 오로지 중생이 괴로울 때다. 보살이 보리(菩提)를 이룸은 오로지 한 가지 목적뿐이다. 바로 중생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이끌기 위해서다. 나는 청정한데 너는 잘못이라는 이분법적인 대처가 아닌, 타인의 과보에 함께 책임을 지는 동업중생의 삶을 놓지 않는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연기적 존재는 상호 연관성의 존재이며, 상호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령 아프리카의 어느 오지에서 한 아이가 굶어죽는 일이 발생했다면, 이 지구라는 곳에 함께 사는 지금의 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연기적 존재다. 그러니 보살이 바라보는 세상은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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