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겸손과 친절

법정 스님이 달라이라마를 만날 계획이 있다고 하시기에 내가 “달라이라마는 어떤 분입니까”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참으로 겸손한 분”이라고 말씀했다. 달라이라마는 법정 스님처럼 언어감각이 뛰어난 분이 아닌가 싶다. 유럽의 어느 신부가 달라이라마에게 “불교의 자비가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친절입니다”라고 말했다. 언어감각이 아니라 언어혁명에 가깝다.

어떤 분은 법정 스님이 달라이라마를 ‘참으로 겸손한 분이다’라고 평했다고 해서 박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21세기의 살아 있는 부처님’이라고 해도 모자랄 정도인데 말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르다. 법정 스님이 말씀한 ‘겸손’은 ‘하심(下心)’이란 말과 동의어일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심이란 불가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내 마음을 상대의 밑에 둔다는 뜻이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상대 밑에 내려놓는다는 뜻이니 순도 100%의 겸손과 다를 바 없다.

일러스트 정윤경.

달라이라마가 ‘자비’를 ‘친절’이라고 말한 바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자비란 나와 남이 한 몸이라는 깨달음에서 우러나는 마음이나 태도이다. 나와 남이 한 몸이니 남에게 친절한 것은 나에게 친절한 것이기도 하다. 깨달음 없이는 결코 하기 쉬운 표현이 아니다.

우리나라 선방 원로스님이 어느 잡지에 달라이라마는 포교사라고 폄하하여 인터뷰하셨는데 나는 그분의 단정에 동의할 수 없다. 심지어 부끄럽기까지 했다. 나와 남이 한 뿌리라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신 분이 어찌 그렇게 평가했을까 싶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수행자가 읊조리는 깨달음의 노래, 즉 오도송(悟道頌)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나와 남은 물론이고 세상과 자연이 한 몸이라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송광사 방장이신 보성 스님께서 몇 해 전에 나의 산방을 들르셨다. 나의 산방도 송광사 관내에 있기 때문에 들르셨다고 말씀했다. 스님께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마지막에 달라이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1991부터 달라이라마를 다람살라에서 여러 번 만났는데 다음과 같은 대화 끝에 친구가 되었다고 말씀했다. 달라이라마가 “조국 티베트에서 쫓겨난 뒤에야 세상의 평화를 위해 법문을 하고 다니고 있으며, 이제는 자신을 탄압한 사람들을 용서하게 됐다”고 말하자 보성 스님이 “당신은 당신을 탄압한 사람들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했다는 것이다.

선문답 같은 말에 달라이라마가 “왜 고마워해야 합니까?”하고 되묻자 보성 스님이 “당신을 탄압한 사람들이 있어서 세계 평화를 이야기하게 됐고, 그들이 없으면 용서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하셨다고 한다. 이에 달라이라마가 크게 웃으며 서로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밀었다는 말씀이었다.

어느 날 법정 스님께서 차를 마시다가 ‘좋은 절은 친절이고, 가지 말아야 할 절은 불친절’이라고 하신 말씀도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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