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베제클릭 천불동 벽화

베제크릭 천불동 전경. 협곡 사이에 흙탕물은 흐르고, 녹음이 우거져 천불동을 이룩하게 했다. 베제클릭 석굴은 원래 80여 곳이었지만, 현재 벽화가 있는 석굴은 50곳 쯤 된다.

붉은 불꽃, 이글이글 타고 있다. 불꽃은 그대로 지상으로 내려와 쭈글쭈글·이글이글 정착했다. 불꽃의 땅. 게다가 산은 붉은 사암이어서 불타는 모습과 잘 연결된다. 확탕지옥에 가면 이럴까. 땡볕 더위는 숨 쉬기조차 어렵게 한다. 지열은 가마솥처럼 높아도 다만 습하지 않아 견딜 만하다.

사막 석굴사원은 법열의 상징
투르판 천불동 이에 대한 증거
수려한 작품성으로 수난 겪어
日약탈 벽화, 지금 서울에 수장


상대적으로 땀이 덜 흐르기 때문이다. 붉은 불꽃, 바로 화염산(火焰山)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으로 만년설을 끼고 있는 천산산맥 아래에 있다. 투르판의 북녘자락이다. 해발 마이너스 저지대, 투르판의 병풍이다. <서유기>의 현장이다. 인도로 불경을 가지러 가던 삼장법사가 손오공과 함께 했던 스토리텔링의 현장이다. 나는 이곳을 1988년 처음 방문했다. 서울올림픽 때이다. 당시 일기가 남아 있어 옮겨 본다.

“우루무치에서 약 190km 거리의 투르판으로 향하다. 교통편이 마땅치 않아 택시를 이용하다. 사막지대임을 실감시켜 주는 좌우의 풍경들. 산세가 독특한 것도 그렇지만 나무 한 그루 없는 알몸뚱이의 민둥산들이다. 척박한 땅. 저 멀리 왼편으로 천산의 만년설이 보이고, 그 아래에 전개된 평원은 누렇기만 하다. 우루무치는 천산에서 녹은 눈이 지하수 되어 ‘물’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연평균 강우량 1.6cm. 물이 매우 귀한 곳. 식물이 자랄 수 없는 천형의 땅이다.

중간지점에서 택시가 고장 나 2~3시간을 길가에서 우두커니 천산 자락이나 늘어지게 감상케 하고, 낙타들 먹이 찾아 떠도는 모습이나 보게 하다. 다시 투루판을 향해 달리다.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 들판, 하지만 나무 한 그루 없는 빈 공간, 과연 사막인가. 포장도로는 자로 대고 그은 듯 일직선이다. 어쩌다 짐을 실은 트럭만이 지나칠 뿐 썰렁한 길이다. 시속 100km로 달려 보는 사막의 어스름이다. 보름달이 하늘을 좁게 하고, 천지는 고요할 따름이다. 아, 이렇게 황량할 수 있을까. 중간지점에서 호수를 지나다. 소금물이란다. 이곳 신강(新疆)은 소금 산지로 이름 있다. 바로 염호(鹽湖)때문이다.

투르판은 분지이다. 하루 종일 직선 길의 아스팔트를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뿐이다(면적 50147평방 km). 오아시스가 있어 마을을 이루고 있는 투르판 시(인구 20만 명)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는 빈 땅이다. 게다가 이 분지는 저지대이다. 해발 마이너스 156m, 세계적 저지대이다. 이렇게 기이한 곳에 인간의 역사와 고대 문화가 있다니, 놀랄 따름이다. 불꽃과 같은 화염산. 이글거리는 태양과 함께 경이로움을 안겨준다. 이는 고창고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폐허의 옛 도시. 흙벽돌로 쌓은 마을은 모두 무너지고, 옛사람들의 자취만 남겨놓았다.

베제클릭 천불동 계곡에 가다. 황량하고 기이한 산의 모습들. 역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다. 협곡 사이에 흙탕물은 흐르고, 녹음이 우거져 천불동을 이룩하게 했다. 깎아내린 절벽, 그 절벽을 파고 들어가 만든 석굴사원. 폐허의 문화는 텅 비어있다. 아무도 없는 베제클릭 석굴이다. 멀리서 관리인 듯한 초라한 행색의 남자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 볼 뿐이다. 나는 석굴 안에 들어갔다. 파괴의 현장이다. 전성기의 화려했을 분위기는 물론 수행승 하나 없는 폐허이다. 아름답기 그지없었을 벽화마저 마구 뜯겨 파괴되었다. 서구 ‘악마들’의 약탈이리라. 폐허의 석굴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베제클릭 석굴은 6세기 고창국에서 14세기까지 전성기를 이룩했다. 이슬람 문화가 정착하면서 불교사원은 파괴의 대상으로 가치전환되었다. 그런 베제클릭은 19세기에 이르러 약탈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1898년 러시아 학자 클레멘츠가 석굴의 존재를 발견한 이래 독일의 고고학자 르콕 그리고 그륀베델 탐험대 등은 베제클릭을 약탈의 현장으로 삼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벽화를 뜯어갔다.

20세기 초 서구열강의 ‘탐험’은 역사의 현장을 폐허로 만들었고, 뒤에 문화혁명 당시 다시 한번 수난을 당해야 했다. 오늘날 런던, 베를린 등 해외의 30여 군데 박물관에서 약탈 문화재를 확인할 수 있다.

“1928년에 그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는 영국인 여행가 레지널드 숍버그 대령은 어떤 유적에서 폰 르콕이 프레스코 벽화 대부분을 뜯어갔다고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것은 정말 신이 도우신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무슬림들이 그 뒤로 남아 있던 벽화 거의 모두를 수치심도 없이 망가뜨려 놓았기 때문이다. 투르크 무슬림들의 광신적인 문화재 파괴 행위에서 그나마 라도 투르키스탄의 불교 유물을 구출한 것은 전적으로 유럽의 고고학자들 덕분이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른 유적에 대해서도 ‘벽화들이 입은 피해는 참담했다. 부처의 얼굴이 칼로 마구 그어져 있었고, 몇 안 남은 조각상들은 거의 다 파괴돼 버렸다’고 그는 썼다. 투르판 근처의 베제클릭 대사원을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은 중국 당국이 몇 점 남지 않은 프레스코의 보호를 떠맡기 전에 이미 광신도들에 의해 (그리고 아마 홍위병에 의해서도) 자행됐던 파괴의 현장을 증언할 것이다.”
- 피터 홉커크, <실크로드의 악마들>中

약탈이 아니면서 투르판 문화를 소장하고 있는 유일한 도시가 있다. 바로 우리의 서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서역 전시실에 가면 우리는 벽화를 비롯 서역문물을 관람할 수 있다. 어떻게 서울 한 복판에 서역 유물이 있을까. 이는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현지에서 가지고 온 것을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남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시절의 산물이다. 아주 이례적인 박물관 사례에 속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베제클릭 제15굴 공양보살상. 일본 오타니 탐험대가 들여왔다 가지고 나가지 못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베제클릭 제15굴 공양보살상을 보자. 무엇보다 이 벽화는 현장에서 뜯기 위한 상처 즉 칼질의 선이 강하게 남아 있다. 상처를 감안하고 그림을 보면, 얼굴을 약간 들어 올려 뭔가 간절히 갈구하고 있는 표정과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합장하고 있는 자세,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다. 짜임새 있고, 견고한 구성, 그리고 난하지 않게 적절하게 구사한 색채감각, 정말 걸작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서울 소장의 ‘서원화(誓願畵)’는 붓다 전생에 이미 후생에 붓다가 될 것을 서원한 모습이다. 후덕한 얼굴과 풍만한 신체, 그리고 붉은 색조의 옷과 멋있는 장신구들, 이 그림 역시 걸작임을 확인하게 한다. 베제클릭 벽화의 서울 소장.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베제클릭 석굴은 원래 80여 군데였지만, 현재 벽화가 있는 석굴은 50군데 쯤 된다. 정말 아름다운 벽화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베제클릭이란 말은 위구르 언어로 ‘호화로운 집’ 혹은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란 뜻이란다. 정말 아름다운 불교회화의 보고(寶庫)가 아닐 수 없다. 이들 석굴은 대개 장방형의 구조이고, 천정은 궁륭형이다. 이들 벽화는 바탕의 회반죽이 마른 이후에 그린 세코 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축축한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과 다르다. 세코 기법으로 붓다의 전생담을 비롯 다양한 불보살상을 벽에 그렸다. 제17굴의 본생도는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벽화 소재로 불교 내용 이외 현지 인물이나 풍속 등을 그린 곳도 많다.  

해발 마이너스의 투르판 저지대를 지나, 불꽃의 화염산을 지나, 무자터 강의 협곡에 이르는 척박한 땅. 붉은 열사의 대지에 물이 흘러 녹음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협곡의 녹음 덕분에 절벽을 뚫은 석굴사원들. 어떻게 이런 불사가 가능했을까. 사막의 오아시스가 생명의 상징이라면, 사막의 석굴사원은 법열의 상징이 아닌가. 석굴사원의 아름다움은 깨달음을 도와주기 위한 훌륭한 안내원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벽화. 어떻게 사막에서 이렇게 훌륭한 명품을 볼 수 있는가.

베제클릭은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다. 약탈의 현장은 현재 폐허로 남아 있다. 뜯겨간 부분은 사진으로 대신 붙여놓기도 했다. 또 뜯긴 원화는 구미의 여러 미술관에서 단편적으로 볼 수 있다. 묘한 생각이 교차하는 장소이다. 베제클릭, 석굴이 많다하여 천불동이라는 명칭까지 얻게 되었지만, 명암의 양면을 생각하게 한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