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선문의 개산조 가운데 범일(梵日: 810~889) 국사는 사굴산문을 열어 그의 독특한 선관(禪觀)을 내세웠다. 그는 특히 진정한 깨달음은 조사선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고 그 뒤 진귀조사(眞歸祖師)를 만나 깨달은 것이 진실한 깨달음으로 이것이 바로 조사선의 경지이다”라고 말했다.

진귀조사설은 선의 원류를 석가모니에게 두지 않고 진귀조사에게 두고 석가모니가 진귀조사에게 선법을 전해 받았다고 보는 설이다. 이는 조사선의 우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으로 중국의 조사선의 종지를 당시의 우리나라에 새롭게 천명하고자 한 주장에서 나온 말이다.

진귀조사설은 〈선문보장록〉에 나오는 이야기로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고도 히말라야에 있는 진귀조사를 찾아가 선을 전수받았다는 것으로 좀 황당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인데 선종의 우월을 나타내기 위하여 만들어진 말로 밖에 볼 수 없다.

조사선이란 말 자체도 〈조당집〉에서 쓰기 시작한 말로 여타의 경론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또 진귀조사설를 내세우는 것도 우리나라에서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용모를 지녔던 범일은 부처님의 상호 가운데 하나인 정상육계상이 있었다 한다. 15세에 출가할 뜻을 자지고 절에 와 20세에 비구계를 받았다. 흥덕왕 6년(831년) 입당 유학의 원을 세우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마침 왕자 김의종(金義琮)이 배를 타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적에 그 배를 타고 함께 당나라로 들어갔다.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선지식을 참방하던 중 염관제안(鹽官濟安)을 친견하였다. 염관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동국 신라에서 왔습니다.” “배를 타고 바다로 왔는가? 육지로 걸어왔는가?” “바다도 건너지 않고 또한 육지도 밟지 않고 왔습니다.” “두 길을 다 밟지 않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해와 달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데 발로 밟지 않으나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문답을 하고나서 염관이 범일을 동방의 보살이라고 칭찬하였다. 범일이 또 물었다.

“어떻게 하면 도를 이루어 부처될 수가 있습니까?” “도란 닦을 것이 없는 것이니 다만 자성(自性)이 오염되지 않게 하고 부처라는 견해나 보살이라는 견해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평상심이 곧 도이다.”

이 말에 범일은 다시 크게 깨우치고 염관의 문하에서 6년을 정진하였다. 그 후 또 다시 제방을 순력하다 약산유엄(藥山惟儼) 선사를 찾아갔다. 유엄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강서의 마조 스님 회상에서 왔습니다.” “무엇 하러 왔는가?” “스님을 친견하고자 왔습니다.” “여기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찾아왔는가?” “스님께서 다시 일보를 전진하시면 되지만 저는 화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약산도 범일을 칭찬하였다.

마침 무종(武宗)이 파불(破佛)을 저지른 회창사태(會昌沙汰:884년)가 일어나 한동안 피신을 하면서 산속에 숨어 선정을 닦았다. 그후 소주(韶州)로 가서 육조혜능의 탑을 참배했는데 학이 와서 울고 하늘에 오색의 서운(瑞雲)이 나타났다고 한다.

문성왕 9년(847년)에 신라로 귀국하였다. 명주(溟洲) 도독(都督)의 청에 의해 굴산사로 가 40년을 조사선법을 진작하였다.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의 세 왕으로부터 존숭을 받았고 887년에는 진성여와이 어례(御禮)를 갖추어 국사로 모시려 했으나 끝내 국사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범일의 법을 이은 대표적인 제자에는 개청(開淸), 행적(行寂) 등 10대 제자가 있었다. 이리하여 사굴산파가 흥성하여 보조 국사 지눌에까지 이어진다. 사굴산 지역의 풍습 가운데 대관령국사서낭신의 제사를 해마다 단오날 모시어 왔는데 범일 국사를 서낭신으로 신격화 하여 모시는 특이한 풍습이 있다. 이는 신라왕족 가운데 강릉김씨 시조가 된 김주원의 자손들이 같은 강릉김씨인 범일을 정신적 지주로 받들다가 점차 민간에 그 영향이 커져 서낭신으로 숭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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