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두 번째 이야기, 용장사 계곡과 신선암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만나러 가는 길에 선 내 몸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한사람이 발을 겨우 디딜만큼의 벼랑길을 따라 가니 삼면보관을 쓴 보살상이 구름 위에 앉아 우리를 반겼다.

부처의 또 다른 모습, 불상

남산 능선 곳곳에 남아있어

당시 염원과 종교정신 전해

 

경주 남산에서 가장 높은 금오봉468m를 지나 용장사 계곡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지는 위치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용장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세속 앞에서 묵묵히 자기 세계를 견지하는 모습이다.

상층부가 없긴 하지만 벼락과 인간의 폭력을 피해서 옛 모습이 온전히 살아있다. 이 삼층석탑 옆에 서 있으면 손금 내려다보듯 세속이 보인다. 반대로 세속의 어디에서 올려다봐도 이 삼층탑이 잘 보인다.

삼국유사가 기술한 세속도시의 풍요로움과 달리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서라벌이 겪은 속세의 고통을 단말마처럼 기록하고 있다.

‘기근이 일어나 자녀를 파는 자가 있었다. 황룡사 장륙상에서 눈물이 흘러 발꿈치까지 내리었다. 흰 개가 대궐 담 위로 올라왔다…….’

서라벌에 흉년이 들었거나 내란이 일어났으리라 짐작되는 시기를 불길함이 질펀하게 묻어나는 문장으로 전하고 있다.

김부식의 흉흉한 문장과 달리 용장사 삼층석탑은 몸돌과 지붕돌의 체감률이 매우 안정된 삼각형 구조물이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내면을 들여다보는 삶에는 고요가 흐를 뿐이다.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 이치를 수행자는 안다.

탑은 부처의 또 다른 모습이다. 탑의 원형인 인도의 스투파(Stupa)는 부처의 사리를 담고 있다. 부처가 입멸하자 말라족은 뜨거운 불에도 타지 않은 부처의 사리를 수습하고 일주일 동안 공양을 올렸다.

용장사 계곡 미륵장육상을 도는 도반들의 모습.

그 사이 쿠시나가르에 도착한 각국의 사신은 치열한 다툼 끝에 사리를 나누어 가진다. 그들은 각자의 나라로 가서 사리탑을 세웠다. 그 수백 년 후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 왕이 최초의 탑들을 연다. 그는 부처의 사리를 수천 개로 쪼개 마우리아 제국 전역에 사리탑을 세워 봉안한다.

용장사는 조선시대의 방랑자 김시습이 머물며 ‘금오신화’란 소설을 썼던 절이다. 금오산과 고위산 사이, 남산에서 가장 깊은 계곡에 있던 이 절은 지금은 비록 폐사지이지만 삼층석탑을 비롯해 석불좌상, 마애여래좌상, 세 가지 보물을 품고 있다.

바위에 양각된 마애여래좌상과 자연석 기단 위에 연꽃 장식의 둥근 지붕돌 세 개로 쌓아올린 탑 사이를 오간다. 내 눈길이 맨 위의 지붕돌에 안치된 목 없는 불상에 오래 머문다. 삼국유사에서 신라의 고승 대현이 이 탑을 돌자 불상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고 묘사한 그 불상이지만, 목이 있어야 할 자리에 빈 하늘이 보인다.

부처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곧바로 사리탑을 세웠다. 불상은 그보다 부처 입멸 500여 년 후에야 등장한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가 인도 서북쪽을 점령하면서부터였다. 그 이전까지 불상은 인도인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했을 뿐, 성자를 조각하는 일을 신성모독이라 여겨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알렉산더를 따라온 그리스 문화가 전파한 신의 형상은 인도인들에게는 일대 사건이었지만, 성스러운 부처를 가까이하는 데 그만한 빌미는 없었다.

불상은 부처의 겉모습인 동시에 부처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상은, 불상을 가까이하려는 사람들의 염원과 그 시대의 종교정신을 담고 있다. 용장사의 석불좌상은 목이 잘리기 전 신라인의 풍요로운 정신문화를 유감없이 보여줬을 것이다. 공허하다. 지금은 그 절단된 목의 단면으로 현대인이 도저히 떨쳐내지 못하는 상실감만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현대인이 추구하는 촘촘한 사고와 시스템을 비웃듯 석불좌상 위를 공허가 꽉 채우고 있다.

이제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만날 차례였다. 나는 이영재와 삼화령을 넘기 위해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갔다. 칠불암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에서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마치 신선이라도 만나 둘이 함께 하늘나라로 날아가기로 약속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안내표지도 없어 두리번거리는 내게 기왓장에 쓴 글씨가 보였다.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땅에 널린 기왓장에 흰색 물백묵으로 쓴 글씨, 그것이 내 눈엔 신선이 보낸 초대장 같았다.

한 사람이 겨우 발을 디딜 만큼 좁은 길 아래는 천길 벼랑이었다. 그 좁은 길을 따라가다가 모퉁이를 돌자 아! 머리에 삼면보관을 쓴 보살상이 오른손에 꽃가지를 쥔 채 구름 위에 앉아 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도, 땅으로 내려오는 것도 아닌 동작, 신선암의 관세음보살은 그 중간계에서 구름을 타고 멀리 보이는 토함산으로 수평이동 중이었다. 목하, 신라인은 날아다니고 있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찬탄하고 운위하는 그들의 모습은 비천상의 그것을 빼닮았다. 대관절 신라인은 무엇을 놓아버렸기에 저토록 즐거이 날아다닐 수 있는가!

벌써 날이 기울어 신선암 보살상의 미소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경주 남산은 등산객의 걸음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시간이 걸린다. 봐야 하고 느껴야 하고 알아야만 하는 시간이기에 며칠을 걷는다 해도 다 걸을 수 없다.

칠불암 마애불상군은 이곳이 불국토임을 느끼게 한다.

서둘러 칠불암으로 내려갔다. 칠불암은 암자 이름이 아니라, 일곱 부처를 모신 두 개의 바위이다. 전면의 바위에 새긴 사방불(四方佛)과 뒷면의 병풍바위에 새겨 놓은 삼존불을 합하여 일곱 부처를 이룬다. 샤카무니 싯다르타 부처와 더불어 지난 시절에 생멸했다는 과거칠불(過去七佛)이 문득 생각났다.

불국토는 어디에 있는가?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의 포교사 아도화상은 인도인이거나 중국 오나라 사람으로 엇갈려 짐작되는 인물인데, 어머니는 어찌 된 노릇인지 고구려 여인 고도령이다. 삼국유사는 아도를 묵호자(墨胡子)와 동일 인물로 추정한다. 아도가 신라에 들어간 것은 어머니가 권유해서였다. 고도령은 놀랍게도 과거칠불이 유행하던 곳으로 경주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하면 석사(釋祀)가 동으로 향하리라.”

과연, 서쪽이 아니라 동쪽나라 경주가 불국토였을까. 그 사실을 남산의 석불들과 마애불들은 알고 있으려니와,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그 이야기에 손을 들어주는 문장이 한 줄 기록돼 있다. 절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 서 있는 듯하다.

 

걷는길 : 삼릉 - 석조여래좌상 - 마애관음보살상 -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 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 -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 금오봉 - 용장사곡 삼층석탑 - 용장사곡 마애여래좌상 -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 신선암 관세음보살상 - 칠불암 - 남산동

거리와 시간 : 약 10km, 8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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