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차 불교와 키질 석굴

키질 석굴의 전경. 앞에 역경승 구라마집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50대에 장안에 도착하여 8년간 불경 번역에 매진해 35부 294권의 경전을 번역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걷는다. 사막의 북쪽을 병풍처럼 껴안고 있는 천산산맥, 그 만년설의 산자락 하나가 서쪽으로 길게 내려 온 곳, 거기에 꽃 한 송이를 활짝 피웠다. 쿠차, 바로 구자국(龜玆國), 서역 36개 나라 가운데 최대 국가였던 곳이다. 쿠차는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 끝자락의 거대한 오아시스 도시이다. 원래 타림 분지의 일대는 1세기 후반 오아시스 국가들이 연합하여 7세기 무렵까지 활발한 발전상을 보였다.

이들 국가는 실크로드 북로로 트루판의 고창국(高昌國), 카라샤르의 언기국(焉耆國), 쿠차국, 캬슈가르의 소륵국(疏勒國), 그리고 남로에 루란의 선선국(?善國), 호탄의 우진국 등, 사막의 나라는 화려했다. 역사의 오아시스, 바로 그 자체였다.

거대한 오아시스 도시 ‘쿠차’
1000여 사원과 불탑 존재해
토번의 침공으로 쿠차국 쇠퇴

키질 벽화, 쿠차 민족성 표현
석굴 앞에는 구마라집 동상이
중국불교의 본격적 시작 알려

카슈가르에서 북진하여 우루무치 혹은 트루판 쪽으로 가다 중간에서 만나게 되는 오아시스 도시 쿠차. 과거 쿠차 왕국의 본거지이다. 쿠차 불교가 흥성한 시기는 3~4세기 무렵이었다. 〈진서(晉書)〉 기록에 의하면, 1천여 군데의 사원과 불탑이 있었다. 이와 같은 영화는 8세기말까지 이어졌다. 7세기 현장 법사는 이곳을 방문하고 그의 〈대당서역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큰 성의 서문 밖 길 좌우에는 각각 높이 90여 척의 입불상이 있다. 가람은 1백여 군데이고 승도는 5천여 명이다. 사람들은 공덕 쌓기를 다투어하고 있다.”

쿠차 불교의 화려한 모습이다. 하지만 790년 토번국(티베트)의 쿠차 침공은 쿠차 불교의 쇠퇴를 불러왔다. 5세기부터 7세기까지 쿠차 불교의 영화는 이렇게 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게다가 12~13세기의 이슬람 침공은 불교의 종말을 불러왔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는 변화하는 것이다. 만발한 꽃도 언젠가는 시든다. 성주괴공. 쿠차를 거닐면서 역사의 영욕을 더듬어 본다.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여름마다 녹아주는 만년설의 존재도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생명수’를 제공한다. 고마운 일이다. 타클라마칸 서쪽 언저리에 거대한 호수도 있다. 요즘은 쾌속 보트를 타고 한 시간 이상 뱃놀이도 할 수 있다. 음악과 무용의 나라였던 쿠차 왕국.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에 쿠차 음악을 재현한 민속 공연을 관람한다. 과거의 벽화를 참조하여 복원한 내용이다. 민속가무는 이국적 정취를 듬뿍 안겨준다. 특히 사막의 밤을 풍요롭게 도와준다.

쿠차 지역은 석굴사원의 꽃을 활짝 피웠다. 쿠차, 거기에 키질석굴이 있다. 무자트 강을 끼고 동서 2km의 절벽에 이룩한 석굴이다. 타클라마칸 지역의 8백여 곳 석굴사원 가운데 쿠차 지역은 키질의 334곳 석굴, 112곳 석굴의 쿰트라, 그리고 52곳의 심심 석굴 등으로 분포되어 있다. 무자트 강의 왼쪽 절벽을 파고 만든 키질 석굴, 현재 236개의 굴이 확인되고 있다. 그 가운데 135개는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그 중 90개 정도는 예배와 설법의 차이티아 석굴이고, 나머지는 승려의 생활공간인 비하라 석굴이다. 같은 울타리 안에서 수행과 생활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구성이다.

키질석굴 가는 길. 공상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 거대한 사막을 벗어나면 바위산을 끼고 돌게 한다. 그 산자락은 나무 한 그루 허용하지 않고 있는 무채색의 바위이다. 그것도 결 따라 날카롭게 서 있어 칼날처럼 보이는 곳도 있다. 무채색의 풍경. 이런 바위산을 넘고 또 넘어야 키질석굴에 도달한다. 거기 무자트 강, 그렇다, 강물이 있어 생물이 있을 수 있다. 움직이는 속성의 물은 뭔가를 움직이게 한다. 사막의 낮은 지대는 수맥과 연결되어 푸른 숲을 이루고 있다. 아, 푸르른 숲, 이는 사막의 숨결이다. 하지만 푸른 숲을 품에 안고 있는 주위의 바위산은 풀 한포기 없는 벌거숭이다. 키질, 거기 절벽에 수행승들은 굴을 뚫고 ‘역사’를 일구었다. 키질은 고대 실크로드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나가사와 카즈토시(長澤和俊)는 그의 저서 〈동서문화의 교류- 신 실크로드론〉에서 쿠차의 석굴과 벽화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쿠차 일대의 석굴은 간다라지역의 바미얀 석굴 영향을 받았다. 쿠차 부근의 키질, 쿰트라, 스바시, 키리슈, 심심 등의 석굴이 그것이다. 이들 석굴은 불상이나 불탑을 중심으로 한 예배용 석굴 주위에 승방용 석굴을 두어 하나의 사원으로 이루었다. 예배용 석굴은 전실(前室)과 주실(主室)로 나누었다. 실내의 사면 기둥은 건축적 기능 이외 불상을 조성하여 탑돌이가 가능하도록 했다. 이런 키질 석굴 형식은 돈황이나 운강 석굴까지 영향을 준 쿠차 건축의 특징이다.”
 
키질 벽화는 고대 쿠차의 민족적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벽화 내용은 주실 좌우 벽면에 석가설법도를 비롯 불전도나 본생도를 그렸다. 굴 안쪽에는 공양자상이나 열반도, 사리분배도 등을 그렸다. 이런 키질 벽화는 시기별 2기로 나눌 수 있다. 간다라 요소를 지닌 500~600년경, 그리고 새로운 양식의 600~650년경의 구분이 그것이다. 전자는 정방형의 평면에 본생도와 불전도를 많이 그렸다. 부드러운 윤곽선에 색채의 농담을 두어 둥그런 느낌을 자아냈다. 주요 색채는 백색, 황색, 갈색, 흑갈색 등이다.

후자는 장방형의 석굴형식으로 사각기둥 주위에 회랑을 만들고, 벽화는 2단 혹은 3단으로 나누어 석가설법도 등을 그렸다. 안쪽 깊은 곳에 열반, 다비, 사리 분배 등 장면을 그렸다. 표현방식은 윤곽선이 딱딱한 선이면서도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콘트라스트가 강한 색채를 사용했다. 특히 감청색(紺靑色) 활용이 두드러졌다.
오늘날 키질 벽화를 보면서 현대회화 같은 분위기를 느끼기도 한다. 바로 색깔이 변해 대담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검게 변색된 부분, 그 거친 붓질은 현대회화처럼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마치 조르주 루오의 종교 회화를 연상시킨다.

벽화는 주제의 배경을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했고, 다양한 소재와 표현방식으로 회화성을 높였다. 적절하게 활용한 색채와 묘사력 그리고 짜임새 있는 구성. 4면 가득 그려 넣은 벽화, 사막의 꽃이다. 황량한 사막에 이 얼마나 아름다운 꽃인가. 키질 벽화의 본생도에는 상업도시 쿠차의 분위기를 반영한 듯 상업 내용이 많다. 쿠차가 실크로드의 중심도시로 역할 했던 시기의 반영이다. 키질의 본생도는 1백여 종을 헤아릴 정도로 많다.

단골 소재는 〈금광명경〉의 사신품(捨身品)에 나오는 마하사트바 태자 이야기이다. 붓다의 전생인 마하사트바는 자신의 몸을 먹이로 주어 굶어 죽게 된 호랑이를 구했다는 이야기이다. 제38굴의 교각자세의 미륵보살과 도솔천의 기악천(伎樂天)은 눈길을 오랫 동안 이끈다. 쿠차는 음악의 도시가 아니었던가.

쿰쿠라 석굴의 주악비천벽화. 오늘날 키질 벽화를 보면서 현대회화 같은 분위기를 느끼기도 한다.

키질 석굴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검은 색 동상이 맞아준다. 내가 처음 이곳에 갔을 때는 관광객 하나 없는 황량함 그 자체였는데, 관광지로 각광 받으면서 이런 동상도 세워졌다. 바로 구마라집 동상이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앉아 명상에 잠긴 고승의 모습이다. 병풍 같은 회색조 바위 산자락을 배경으로 하여, 바닥의 푸른 녹음 위에 우뚝 자리한 역경승의 모습, 묘한 느낌을 안긴다.

구마라집(鳩摩羅什, Kumarajiva, 344~409), 현장법사와 더불어 유명한 역경승이다. 쿠차국 출신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불교학과 어학 실력이 뛰어났다. 오죽하면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7만 병사를 동원하여 서역을 정벌하고 구마라집을 초빙해 오라 했을까. 결국 그는 50대에 장안에 도착하여 8년간 불경 번역에 매진했다. 하여 〈반야경〉, 〈법화경〉, 〈아미타경〉, 〈유마경〉 등 35부 294권을 번역했다.

중국불교의 본격적 출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구마라집은 유언을 통하여, “만약 내가 번역한 것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의 주검을 화장했는데 혀만은 재가 되지 않았단다. 구마라집의 사리탑은 장안 남쪽 초당사에 봉안되어 있다. 부조가 아름다운 승탑, 나도 몇 차례 배관한 바 있다.

현장법사는 40대 중반에 인도로 들어가 17년간 구도여행을 하고 귀국하여 〈대당서역기〉를 남겼다. 그가 번역한 경론은 75부 1,300여 권 즉 한문 불전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방대한 업적이다. 중국의 역경 불사. 2세기 중엽부터 송대 말기까지 약 1천년동안의 경우, 목록집인 〈지원록(至元錄)〉에 약 6천권의 불전이 소개되어 있다. 역경사업의 활성화를 짐작하게 한다.

사전지식도 충분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관광지로 부상되기 이전 한적할 때, 나는 이곳 키질석굴을 처음 답사하고 놀라움을 가득 안아야 했다. 석굴과 벽화의 독특함은 논외로 하고 우리 ‘코리안의 숨결’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한락연이다. ‘조선족 한락연’은 일찍 키질 벽화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현장에서 벽화를 모사하고 연구하면서 키질 전문가로 우뚝 섰다. 특히 그는 연구와 보존을 위해 석굴마다 ‘한락연 번호’를 부여했고, 또 그런 열정을 마지막 석굴 안에 글로 남겨두기도 했다.

한락연은 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고 서울에서도 대규모의 회고전을 개최한 바 있다. 오늘날 연변의 용정에 가면 ‘한락연 공원’을 거닐 수 있는 바, 주인공을 기리는 조형물을 볼 수 있다. 물론 조선족을 기리는 중국 정부의 공공 공원의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다.

한국정부는 2005년 그를 항일독립운동가로 추앙하면서 포상하기도 했다. 한락연은 키질 연구의 답사여행에서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키질석굴에서 한락연의 숨결을 맡을 수 있음은 또 다른 홍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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