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 해도 눈도 깜짝하지 말라!

고정된 게 하나도 없고 묶어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하나도 묶어진 게 없습니다.

나쁜 거든 좋은 거든 놓고 가는 겁니다, 그냥.

 

(지난 호에 이어서)

여러분 앞에 있는 이 부처님의 형상이 여러분의 형상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이요, 그 불성 자체도 바로 여러분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이라고 했을까? 그분이 그렇게 통달을 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해서 방편으로 모습을 해 놓은 겁니다. 그런데 자꾸 그 모습에 끄달리거나 고깃덩어리를 따른다면 그건 공부를 한다기에는 너무 무색할 정도고 그건 여러분이 부처님 공부를 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론을 잘 알고 아는 게 많아서, 학식이 많고 지식이 많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예전에 기독교와 가톨릭교에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은 불로 심판을 한다고 그랬죠. 나 어려서도 그런 소리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자기가 자기하고 심판이지, 하하하, 그게 거기서 말한 것처럼 그런 심판이 아닙디다, 응. 여러분이 잘 생각하세요. 또 그런 심판이 온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는 거지, 남의 소리를 듣고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고 ‘아이고, 내일 죽네. 내일 죽는다는데 인생이 이런 거지, 뭐.’ 그러면서 다 팔아먹고 쓰고 술 먹고 온통 나가서 사치 다 하고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닙니다. 지금 금방 죽는다 하더라도 미래의 씨를 위해서, 미래의 자기를 위해서…. 아니, 자기가 죽고 없어지는 겁니까? 낙엽이 떨어졌을 뿐이지 봄이 오면 다시 잎이 피는데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수박을 놓고 보세요. 수박이 여러분이라고 본다면 수박씨가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과거의 수박씨는 수박으로 됐습니다. 그 수박 속에 든 수박씨는 미래에 또 먹을 겁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을 해 보면 다른 교(敎)에서도 떡 하나 가지고 일체 사생(四生)을 다 먹이고도 되남았다고 그랬는데 “부처님께서 밥 한 그릇을 가지고 유의 생명들이나 무의 생명들을 다 먹이고도 되남았느니라.” 이런 말하고 뭐가 다릅니까? 그런데 그것이 바로 수박씨를 봄이 오면 심어서 먹고요, 일 년 내내 먹이고 수박이 열려서 또 내년에 먹이고 또 후년에 먹이고 이러니까 내년이다 작년이다 미래다 지금 현재다 이런 말 할 게 없죠, 그대로. 그러니 여러분은 수박이 돼 가지고 수박 안의 수박씨를 진짜로 믿어야지, 그래야 미래로도 참 광대무변하게 공덕이 되지, 만약에 내 씨 찾으려고 바깥으로 돌아다닌다면은, 벌써 이미 수박으로 됐는데 뭐가 있습니까, 바깥에.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잘 알아서…, 아까 얘기했죠. 우주 천지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의 근본에 직결돼 있고 세상의 근본은 전부 인간의 마음에 가설이 돼 있다 이런 거요. 그러니 여러분이 아무리 작지만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상대도 있고 부처도 있고 종교도 있고 모두 있는 거지, 사랑도 있고 말입니다, 미움도 있고 그런 거지 아니, 여러분이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부터 믿고 참 맡겨 놓고 거기서 실험을 하고 체험하고 그래야지 어디서 합니까?

그런데 옛날 부처님 당시에 유마힐 거사, 그 일승 대장부하고 부처님하고 동시에 그때 시절에 한마음으로서 자꾸자꾸 해 가면서 유발 제자나 또는 입산 제자나 다 똑같이 가르쳤단 말입니다. 그것을 방편으로뿐만 아니라, 진실하지만 방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렇게 유발 제자와 입산 제자를 똑같이 가르치게 된 것은 부처님과 유마힐 거사가 마음이 한마음으로 동시에 그냥, 오는 사이도 없고 가는 사이도 없이 그렇게 자꾸자꾸 한마음으로 돌아가니까 몸은 각각이고 이름은 각각이지만 마음은 한자리, 한마음, 그것이 바로 한 주장자가 됐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서로 약속을 한 것처럼 우정 병을 나게 해 가지고서 오게 했던 것도 바로 그런 공부 시키는 까닭이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병문안을 가라고 사리불한테 말을 했다죠. 그러니까 사리불은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요, 유마힐 거사가 그렇게 얘기했대요. “삼계(三界)에 몸과 뜻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좌선이니라. 두 번째 멸진정(滅盡定)에서 일어나지 않고 온갖 행동을 하는 것이 좌선이니라. 마음이 안에도 바깥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이 좌선이니라. 외도(外道) 사견(邪見)에도 걸림이 없이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을 닦는 것이 좌선이니라. 망상을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좌선이니 이렇게 좌선을 하는 이라야만이 부처님이 인가를 하실 것이오.” 하고 말을 했답니다. 여러분, 듣는 순간 어떻습니까? 그것은 다 읽어 보셨겠죠? 그런 소리도 들으셨겠죠?

그런데 아까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그거를 듣거나 보고 어떻게 생각을 하셨습니까? 지금 제가 이끌어 드리고 또는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이렇게 도반으로서 해 나가는 것이 틀리다고 생각을 합니까? 그때 당시에 그렇게 했던 거와 지금을 비교하면 ‘나타내지 않는다’는 뜻 그 자체는, 몸을 나타내지 않는다, 즉 “무조건 놔라.” 이러는 격이죠. 여러분한테 “무조건 당신 수박씨는 당신 수박 안에 있으니 무조건 그 수박씨에다 놔라. 거기 그냥 본래 붙어 있는 거다. 그래서 그냥 무조건 놔라.” 하는 건 그것이 나를 세우지 않고 무조건 공했으니 놓으라 하니까 나타내지 않는 거죠. 그렇게 해야만이 좌선이다.

“멸진정(滅盡定)에서 아주 일어나지 않으면서 온갖 행을 다 하는 것이 좌선이니라.” 이런 것도 보세요. 행선이 그대로 좌선 아닙니까? 여러분이 거기에다가 딱 놓고 움쭉하지 않으면서도 행을 다 해 나간다면 그냥 좌선인 것입니다. 진짜 좌선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머무르지 않는다.” 이건 공했으니까, 찰나찰나…. 내가 항상 말씀해 드리죠. “보는 것도 고정되지 않고 듣는 것도 고정되지 않고, 사는 것이 전체가 고정되지 않고 먹는 것도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이 고정되지 않으니까 그대로 안에도 바깥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이 좌선이다.” 이런 겁니다.

또 우리가 “외도, 사견” 하는데 벌써 모두가 잘못됐다 잘됐다 하는 그 층하를 두는 그런 거를 외도라 합니다. 그런다면은 이것은 이 전체의 사무(四無) 사유(四有)를 말하는데 그것을 한데 합쳐서 걸림이 없어야 된다. 모든 걸 머무르지 않고 가야 된다. 이런 것이 숙달된다면은 거기에서 아예 그냥 걸리지 않죠. 그래서 거기에 걸림이 없이, 즉 말하자면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을 닦아야만이 좌선이다. 진짜 그럭하지 않으면 좌선이 안 된다 이런 거죠.

그러면 삼십칠도품은 뭐냐? 삼십(三十) 하면 과거심·현재심·미래심 전체가 한데 합쳐진 걸 말합니다. 그래서 “삼(三)” 해 놓고 십(十)으로 돌아갑니다. 십으로 왔습니다. 삼은 십으로 한데 합쳐졌습니다, 아까처럼. 그게 시공이 없는, 바로 숫자 없는 숫자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십으로 돌아왔으니까 칠품(七品), 이것은 몸 가짐가짐과 모든 계율이라든가 사는 거 전체를 한데 합친 겁니다. 그래서 칠각(七覺)을 이루면은 거기 보배가 가득 차 있고, 팔법륜(八法輪)을 그냥 굴리면은 구정토(九淨土)가 되고 이렇듯이, 그래서 칠각을 닦기 위해서 그렇게 그 칠품을 닦는 모든 게 좌선이니라. 나는 학술적으로 읽어서 여러분한테 고대로 얘기해 줄 수 없지만 그 뜻은 다 똑같으니깐 그렇게 잘 생각하세요. 아마 알아듣긴 더 쉬울 거예요.

그러고는 “망상을 끊지 않고 열반으로 그냥 들어가는 것이 좌선이니라.” 이런 거 말입니다. 우리가 망상을 끊으려고 애를 쓰고 ‘아이구, 번뇌 망상을 끊어야 내가 부처님 법을 배울 텐데 이게 그냥 줄줄이 줄줄이 붙어 돌아가니 이거를 어떡하면 좋은가? 죽어야 이 망상을 끊지 에이, 살아 가지고는 도저히 끊을 수가 없고 이걸 다 끊는다면 우린 어떻게 살아.’ 이러는 겁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냥 지금 놓고 가는 겁니다, 찰나기 때문에. 고정된 게 하나도 없고 묶어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하나도 묶어진 게 없습니다. 나쁜 거든 좋은 거든 놓고 가는 겁니다, 그냥. 그러니까 그걸 끊으려고 애를 쓰지 않는 사람이라야만이 오직 좌선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열반 길로 들어간다. 즉 해탈 길로 들어간다 이 소리죠. 그러니 “그렇게 좌선하는 사람이라야만이 부처님이 인가를 하실 것이다.” 하는 말을 했대요.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배우고 나가는 것도 있지만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즉 말하자면 그 “몸과 뜻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좌선이다.” 하는 것도, 바로 “멸진정(滅盡定)에서 일어나지 않고 온갖 행을 다 하는 것이 좌선이다.” 이렇게 했을 때는 벌써 그게 하나입니다. 하나, 둘 했을 때 하나는 벌써 이리로 돌아왔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또 “마음이 안에도 밖에도 머무르지 않는 거다.” 할 때에 이것은 셋인데 벌써 하나입니다, 이게. 그래서 다섯도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망상을 끊지 않고 열반으로 그냥 들어가는 길이다. 그것이 좌선이니라. 그것이 좌선이기 때문에 이렇게 좌선을 하는 사람이라야만이 부처님의 인가를 받을 수 있다는 그러한 말 자체는 바로 끊지 않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찰나 생활을 그냥 자재하는 것이 그대로, 그대로 아닙니까? 그대로 인가죠.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부처님의 인가입니다.

그러니까 다섯 가지 중에 맨 끄트머리 하나에 그냥 귀착이 되는 거죠. 절대성으로요. 거기에서 자기는 인제 귀착이 되고 이게 절대적으로 내 것이 됐으니까 내 거라는 것이 없이 쓰는 겁니다, 전부. 내 거라는 것이 없는 줄 알았으니까. 전부 내 거라는 것을 알게 돼서 다시금 내 거라는 것이 없이 여러분한테 다 쓰는 거죠. 왜? 전부 나이기 때문이죠. 전부 내 자리, 나, 내 아픔, 전부 나 아닌 게 없으니 그때는 내가 나를 위해서 쓰는 거죠. 그러니 얼마나 자유스럽고 삶의 보람을 느끼겠습니까?

이렇게 말씀해 드리는 것도 여러분한테 경서(經書)를 통해서 차근차근히 질서 정연하게 말씀해 드린다면 좋겠는데 난 그렇게 못하거든요. 그러나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질서 정연하게 해 나갈 수 있고, 계율(戒律)을 지킨다는 말 없이도 한 발짝도 헛되게 떼 놓지 않으며, 한 말도 한데 떨어뜨리지 않고, 한 생각도 평등한 마음 아닌 게 없는 그러한 행을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불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가 오래간만에 이렇게 만났으니 질문할 사람은 또 질문하세요. 어떠한 질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이 느끼는 대로요.

 

질문자1(남) 저는 오늘 스님을 처음 대합니다. 오늘 처음 대하지만 오래 전부터 대한 듯한 그런 친근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스님에 관한 서적들을 읽어 보면서 스님이 말씀하신 그 사상들이나 생각들을 조금 생각해본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제가 한 가지 느끼고 여쭈어 볼 것은 스님께서는 참자기를 발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참자기는 거짓 자기를 죽이고 내세우지 않는 데서 참자기가 발견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또 알기로는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가르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아라는 것은 결국 거기서 자기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거짓 자기가 없다는 이야긴지, 안 그러면 참자기도 없다는 이야긴지, 안 그러면 둘 다 없다는 이야긴지, 참자기는 무엇이며 결국 무아는 뭘 말하는 건지 그걸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그러죠. 하하하. 없다는 것은, 아까도 ‘공(空)했다’ 그랬습니다. 지금 선생님께서는 보는 걸 고정되게 보고 사십니까? 듣는 걸 고정되게 한 소리만 듣고 사십니까? 하나도, 생활하시면서 하나도 거기에 고정되게 있는 게 없습니다. 모두가 공해서 그냥 그저 쉴 사이 없이 공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세울 게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 세울 게 없는 그 자체가 바로 다 없습니다. 다 없고 지금 마이크를 쥐고서 자기가 지금 말하는 그 장본인, 그겁니다. 순간 지금 말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누가 말했습니까?

물론 세울 게 없기 때문에 예전에 스님네들은 ‘무무역무(無無亦無)’라고 그런 말도 했습니다. 없고 없고 또 없다고 그랬는데 없는 것은 없는 것대로 지금도 모두 없습니다. 이거 뭐, 눈도 깜짝거리고 이것도 생각하고 저것도 생각하니 뭐 어떤 거 생각할 때 나라고 할 수 없으니 없는 거죠, 모두. 그러니 자유권은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중생이라는 겁니다. 자기 소견이 중생이라 그러고, 자기 소견이 나는 그렇게 못한다 그러고, 자기 소견이 나쁘다 그러고…. 그래서 그렇지 본래 나쁜 것도 없고 좋은 것도 없고 자기가 할 따름입니다. 지금 빨리 부지런히 가셔서 색경을 보시고 한 팔 들어 보십시오. 거기 그림자가 어떻게 보이나. 그래서 자기부터 알아야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되고 둘이 아닌 도리를 알아야 둘이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거부터 알아라 이런 소리입니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불(佛)은 어디 있다는 건가? “불이 어떤 겁니까?” 하니까 해골 쪽을 딱 던져 주거든. “이놈아, 이거야.” 그러고 주니까 아무리 몇날 며칠을, 몇 달을, 아니 한 이삼 년 지나니까 아, 해골이 말을 하더랍니다. “야, 이놈아! 너 나처럼 눈도 빼 버리고 귀도 빼 버리고 코도 없애 버리고 혀도 없고 네 몸뚱이도 없고 다 없어야지, 임마! 그래야 너 어떤 걸 알 거다, 임마!” 그러더라는 겁니다. 아, 그래서 그 해골을 붙잡고 “야, 임마!” 그러고 그거 가지고 몇 날 며칠 싸우다가 홀연히 알게 됐더랍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지금 의식만 빼면 송장인데 그 해골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그대로 지금 육근(六根)의 작용으로써 우리가 육진(六塵)의 모든 것을 놓고 간다면 바로 육식(六識)도 거기 포함해서 둘이 아니게 절대적으로 자기 참자기를 발견할 겁니다. 과거의 자기와 현실의 자기가 상봉할 겁니다, ‘짝’(손뼉을 한 번 치시며) 이렇게!

 

질문자2(남) 저는 제 나름대로 단학이라든가 이런 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방황을 하던 중에 제가 종교를 믿으려고 하기보다 종교를 알아보고자 했던 그 마음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분들을 만났을 때 저는 그분들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뭔가가 저한테 미심쩍은 것이 많았었습니다. 한데, 오늘은 큰스님을 두 번째 제가 친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책을 통해서, 아니면 비디오를 통해서 큰스님을 이렇게 친견하고 있는 동안은 제가 아주 왜소하게 보이고 그때 그 순간은 정말로 저의 아버지 어머니 이상으로 하나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오는 걸 느꼈습니다.

제 나름대로 느끼는 이 세상의 어떤 흐름을 볼 때 옳고 그름이 정말로 제대로 서 있지를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자신의 중심이 서 있지 않습니다. 스님의 어떤 설법이 이해는 되나 제 자신이 정착되지 못해서 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제 것이 되어야만이 저 스스로 우러나서 제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그 옳고 그름을 제가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제가 중심이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스님의 설법을 들으면서 저는 제 나름대로 말을 배우고 있고 생각을 배우고 있다고 그런 생각밖에는 들지 않고요, 제가 주인공한테 맡기면서 해 봤을 때 그것이 과연 진짜 주인공인가, 그것도 모르면서 또 그렇게 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불경이라든가 이런 쪽에 대해 잘은 모릅니다마는 불경도 하나의 끄달림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의미로 스님한테 얘기드리면서 인연에 대한 의미를 스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큰스님 이 종교라는 건 첫째, “불교” 이런다면은 어떠한 국한된 불교인 줄 아세요, 모두. 그런데 불교라는 건 그게 아닙니다. 불(佛)이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을 말하고 교(敎)라는 것은 지금 좋은 말을 하는 그 자체가 바로 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교나 기독교나 불교나 이런 거를 통틀어서 말하는 겁니다. 또 그뿐입니까?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까지도 합한 말입니다, 불교가. 그런데 거기 어떻게 국한된 어떠한 개별적인 용어가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지금 뭐라고 그랬죠, 또? 인연에 따라서도 그렇고?

질문자2(남) 예, 그걸 저는 인연에 따라서 제가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저는 그 인연도 불교의 하나의, 제가 불경의 말을 빌린 어떤….

큰스님 간단간단하게 조금씩 말을 해야 내가 대답을 해 주지. 하하하.

질문자2(남) 그냥 인연에 대한 의미를 스님한테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큰스님 인연은 뭐, 인연이라는 것, 아까 얘기했죠. 눈으로 본다면 귀로도 듣죠. 간단하게 우리 얘기합시다. 귀와 눈이 인연이거든, 허허허, 어때요? 코도 인연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한 그릇 안에, 즉 말하자면 버스 안에 타고 있는 것도 인연이요. 그게 돌아가니까 십이처로, 십이인연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우리 지금 십이인연(十二因緣)으로 돌아가는 것도 말로다가 그렇게 했을 뿐이에요. 왜? 십이인연만 되고 십이처(十二處)로만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그 용어가 어디 붙을 자리가 있습니까? 그건 사람 살아나가는 법칙 속에서 편집해서 만들어 놓은 겁니다. 우리는 비행기 프로펠러, 이 표현을 내가 잘하죠. 프로펠러처럼 막 돌아가는데 어디 거기 십이처가 붙을 자리가 있고, 어디 십이인연이 붙을 자리가 있고, 인연이 붙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죽는다고 그러는데 나는 죽는 게 아니라 가을 잎 떨어지는 거와 같다 이러는 겁니다. 가을 잎 떨어진다고 해서 나무뿌리가 죽고 나무가 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볼 때는 뿌리가 보이지마는 그 나무가 자기 나무를 볼 때는 자기 뿌리를 못 봅니다. 우리 인간도 그럽니다. 우리 인간 뿌리는 체가 없는 거기 때문에 보질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 뿌리는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 말을 하고 지금 그러고 앉아 있지 않습니까. 자기 뿌리가 없다면 어떻게 그렇게 앉아 있을 수가 있어요? 응? 자기 마음 내는 게 없다면 어떻게 그렇게 또 말을 할 수가 있고요.

그러니 불법승 삼보(三寶)가 자기한테 있지 딴 데 있는 겁니까, 어디? 남이 잘못한다 잘한다 하기 이전에 자기부터 알라 이겁니다. 지금 소용돌이 속으로 자꾸 돌아가면서 이것 보고 저것 끄달리고 그러면 거기 순응을 못해서 따라갈 수가 없죠. 그러니까 걸릴 수밖에 없는 거죠. 여러분이 살림살이하는 것도 다 그렇게 걸려서 고통스러운 겁니다. 여북하면 내가 그러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 하더라도 눈도 깜짝하지 말아라. “너 자체가 공해서 없는데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진다고 거기 개입될 게 뭐 있겠느냐?” 하는 것만 안다면 그대로 영원하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그 영원한 뜻을 모르실는지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거를 빨리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래도 갸륵하십니다.

여러분이 전부 법신(法身), 화신(化身), 보신(報身), 약사(藥師), 뭐 여기 전부들 계십니다. 그게 딴 데 계신 게 아니라 한생각에서 보현(普賢)도 있고 문수(文殊)도 있는 겁니다. 한생각에서 지장(地藏)도 있고 관세음(觀世音)도 있는 겁니다. 이 한생각이라는 거. 그래서 과거의 한생각에 다 계셨었는데 지금 한생각에도, 그것이 삼천 년 전의 한생각이 지금 한생각이고 지금 한생각이 미래의 한생각이자 지금 한생각입니다. 그러니 숙명통은 바로 과거를 알고 미래를 알고 그러는 그 내용이죠. 그러니까 그 내용 속에 자기가 산 대로, 과거에 짊어진 대로 가지고 나왔는데 거기다가 다시 입력을 한다면은 앞서의 것이 무너지고 없어지지 않느냐 이 소립니다. 여북하면 이름도 모르는 컴퓨터까지 대동했겠습니까? 하하하.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자동적으로 할 수 있게끔 해 주는 네 가지 요소가 탐지기지, 무전통신기지, 팩스지. 아, 그게 다 붙어 돌아가지 않남?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날까지 잘하니깐 내가 이렇게 하겠다’ 이래본 예도 없고, 내가 못하니까 그냥 ‘에이, 이거 못해서 어떡하나’ 이렇게 한탄을 해 본 예도 없습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누가 나쁘다 좋다 하거나 말거나 그건 나하고 상관이 없어요. 못난 대로 사는데, 진실하게 사는데 누가 뭐랍니까? 그러거나 말거나지. 그러니까 그냥 제가 느끼는 대로, 아는 대로, 체험한 대로, 실험한 대로 그대로 얘기해 드리는 겁니다. 부처님 법은 딴 데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의 백지 속에 연필을 드십시오. 그러면 쓸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0년 7월 15일 정기법회 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 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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