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종 제11조 성암 대사

 

숭복사 영취화상 문하서 참구

진적사서 치열한 무문관 수행

연지공양, 서방발원문 주해

부처님께서 염불법문을 열어 보여주심은 중생들로 하여금 육근을 거두고 깨끗한 생각으로 계속하여 아미타불 명호를 불러 생각의 경계가 고요하고 마음이 텅빈 데 이르면 불성이 저절로 드러나서 곧 부처님 지견(佛知見)에 깨쳐 들어가 자성이 저절로 드러나서 각자 자기에게 갖추어 있는 자성미타(自性彌陀)를 친견하여 한 가지 출세의 큰 인연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권수염불문(勸修念佛文)〉

 

믿음(信)과 원력(願)과 염불행(行)은 윤회계를 벗어나 정토에 나는 양식이 되는데, 양식만 준비하면 정토에 나기가 어렵지 않고, 정토에 나면 삼계윤회를 벗어나므로, 석가여래께서는 여쭙는 제자 없이 〈아미타경〉을 스스로 말씀하시어(無問自說) 염불 발기의 인연이 된 것이다.

중국 청나라 때 태어나신 성암 대사(省庵大師, 1686-1734)는 부처님께서 염불법문을 열어 중생들로 하여금 발심 염불하여 누구나 본래 갖추고 있는 불지견에 깨쳐들게 한 이러한 도리를 몸과 입과 뜻으로 여실하게 보여준 선지식이다. 청나라 강희 25년(1686) 8월 초파일 태어나 훗날 정토종 제11대 조사로 추존된 대사의 본명은 실현(實賢), 자(字)는 사제(思齊), 강소성 상숙(常熟)사람이다. 속성은 시(時)씨로서 대대로 유교의 선비 집안에서 자랐다.

 

7세에 동진출가… 15세에 불교ㆍ유교 통달

대사는 태어나면서부터 육식을 입에 대지 않았고, 어린시절부터 총명한 지혜와 온화하고 부드러운 본성을 드러냈다. 마치 여러 생을 통해 오염된 세간을 벗어나고자 하는 탈속의 뜻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부친이 일찍 사망하자 모친 장(張)씨는 아들이 불연이 깊음을 알고 출가 수도의 길을 열어 주었다. 대사는 일곱 살이 되자, 모친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청량암(淸凉庵) 용선(容選) 화상을 배알하고 스승으로 모시게 했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스승으로부터 불전의 가르침과 규율을 배우는 동시에 유교 등 세상의 학문도 함께 익혔다.

대사는 15세(1700)가 되자, 정식으로 비구계를 수지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미 불교와 유교에 두루 달통하여 시문에 능할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정밀한 기예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대사는 절대 다른 업에는 탐닉하지 않았으며 나고 죽는 큰일(生死大事)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세간의 문장과 이치에 달통한 대사는 충과 효를 돈독히 여겨 모친이 서거하자, 불전에서 무릎을 꿇고 49일간 〈불설부모은중난보경(佛說父母恩重難報經)〉을 독송하기도 했다. 더불어 매년 모친의 기일(忌日)이 되면 공양을 베풀고 경을 독송하며 어머님의 왕생극락을 발원했다.

 

성암대사 사리가 모셔져 있는 아육왕사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 화두 타파

어느 날, 성암 대사가 우연히 선인사(善仁寺)에 들렸는데, 홀연히 한 스님이 땅에 머리를 박고 입적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문득, 생명의 무상함을 깨닫고 자신을 경책하며 부지런히 수행 정진할 것을 다짐했다. 이로부터 대사는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의발(衣)을 놓지 않고 하루 한 끼 만을 먹으며 옆구리를 자리에 대지 않고 정진했다.

이후 사방으로 선지식으로 참방하러 운수행각을 다녀온 후, 25세(1710)가 되자 대사는 거성(渠成) 스님과 소담(紹曇) 스님으로부터 불교교리를 배우고, 대승의 성종(性宗)과 상종(相宗)을 연구하는 한편, 소승 방등경전을 공부하였다.

이렇게 3년의 세월이 흐르자 천태종 삼관(三觀)ㆍ십승관법(十乘觀法)의 종지와 성상(性相) 2종의 교학을 두루 막힘없이 관통하게 되었다. 이렇게 성암 대사의 경학이 경지에 오르자 소담 스님은 그에게 천태정종(天臺正宗) 영봉(靈峰) 선사의 제4세 법맥을 전했다.

강희 53년(1714), 29세에 대사는 숭복사(崇福寺)의 영취(靈鷲) 화상 문하에서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念佛是誰)?’는 화두를 치열하게 참구하다가, 120일이 지나자 홀연이 크게 깨닫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我夢醒矣)”고 말했다. 이때부터 대기대용이 자재했으며, 변재가 막힘 없이 터져 나왔다. 영취 화상이 성암 대사가 불문의 법기임을 알고 법맥을 전하려고 하자, 대사는 완곡히 사양하며 예를 갖추고 떠났다.

 

3년 무문관수행으로 염불삼매 증득

이듬해, 대사는 진적사에서 폐관(閉關: 무문관)수행에 돌입했는데, 낮에는 대장경을 열람하고, 날이 저물면 ‘아미타불’ 명호를 지송했다. 밤을 지새우며 정진한지 3년이 지나자 대사는 마침내 염불삼매를 증득했다. 이러한 삼매 증득이 정토법문에 대한 확고한 신심과 불가사의한 지혜를 낳게 되자, 대사께서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연지 대사의 ‘서방발원문(西方發願文)’에 주해를 달게 된다. 3년간의 폐관정진을 성공적으로 회향하자, 진적사의 대중들은 성암 대사에게 〈법화경〉을 강의해 줄 것을 공손히 청했으며, 대사는 법좌에 올라 막힘없는 변재와 혜안을 갖춘 설법으로 승속 대중의 진실한 찬탄을 크게 받게 된다. 이 일이 있은 후 소담 스님의 하명에 따라 항주 융흥사(隆興寺)에서 경과 율을 대신 강의하도록 했는데, 강의를 들은 대중들이 찬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로부터 대사의 명성은 더욱 커지게 된다.

 

연지공양하며 48대원 발하자 방광

강희58년(1719), 절강성 영파시 도옥에 소재한 아육왕탑(阿育王塔)의 부처님 진신사리 앞에서 손가락을 불살라(燃指) 공양하며 48대원을 세우시자, 그에 대한 감응으로 부처님 사리가 찬란한 광명을 내셨다. 이로부터 매년 부처님 열반일에 대사께서는 승속의 대중을 모아놓고 경전을 독송하며 불공을 올렸다. 이때 대사는 〈유교경(遺敎經)〉과 〈불설아미타경〉을 강의했는데, 선종의 종지인 “시심시불(是心是佛: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의 깊은 뜻을 결합시켜 예리하고 둔한 상중하의 모든 근기가 두루 이익을 얻도록 대중법문을 설하였다.

청나라 세종 옹정2년(1724), 불혹(40세)의 나이에 이른 대사는 항주 범천사(梵天寺)에 가서 주석하면서 유명한 작품인 〈권발보리심문(勸發菩提心文)〉을 짓게 된다. 이후 대사는 항주 선림사(仙林寺)에 은거하여 마음을 고요히 하며 염불에 전념하면서 절 밖을 나가지 않고 모든 인연을 단절한 채 전수염불(專修淨業)에만 매진하였다. 아울러 사중의 대중을 격려하고 지도하면서 오로지 깊은 신심, 견고한 발원, 전수염불을 통해 서방정토에 왕생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때 함께 정토수행을 한 대중들은 한결같이 성암 대사를 “(아미타불의 화신인) 영명연수 선사께서 원(願)을 타고 사바세계에 다시 오신 분(永明延壽禪師 乘願再來)”이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칭명염불 위주의 염불결사 창립

만년의 대사는 다시 대중의 간청을 받아들여 항주 봉산(鳳山)의 범천사로 돌아와 주석하면서 더욱 광범위하게 정토법문을 전하고 중생을 구제하여 이롭고 편안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대사는 옹정 7년(1729)에 전수염불 단체인 연사(蓮社)를 창립했다. 정토왕생에 뜻을 두고 신원염불(信願念佛)을 하는 이들이 명을 마칠 때까지 염불결사에 동참할 것을 문서로 기록해 서원을 하도록 하였다. 매일 수행일과를 20이라 할 때 10은 칭명염불, 9는 관상(觀想)염불, 1은 예배와 참회로 나눠 밤낮으로 쉼 없이 정진하도록 했다. 대사의 영향 아래 결사 대중이 함께 염불수행을 하니 그 이익이 결코 적지 않았으며, 재가 염불행자가 출가득도한 자도 수백 명에 달할 정도였다.

 

매일 10만 편 염불… 서방삼성 친견

옹정 11년(1733) 음력 1월 8일 성도일, 대사는 대중을 모아 말씀하시길 “나는 내년 4월 14일이면 이 세상을 떠나 왕생극락을 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대사는 향을 피우고 방 문을 걸어 잠그시고 매일 십만편(遍) 씩을 염불했다.

이듬해 4월 2일, 대사께서 출관(出關)하신 후 10일이 되자 대중에게 “내가 10일 전에 서방삼성(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께서 허공에 강림하신 모습을 친견하였고 지금 다시 보노라. 나는 정토에 왕생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곧 이어 사원의 사무를 부촉하시고는 다시 성 안의 여러 호법거사 등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시자가 유훈을 내려주실 것을 청하자, 대사는 글로써 대중에게 설했다.

“내가 14일로 왕생을 결정하였으니, 너희들은 나를 위해 모여서 염불을 해다오.”

 

“극락에서 중생구제 위해 다시 오겠다”

13일에는 음식을 들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좌선했고, 14일 새벽 3시 경이 되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염불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멀고 가까운 곳에 사는 신도들이 모여들어 눈물을 흘리며 예를 갖춰 대사는 세상에 머물러 중생을 제도해 줄 것을 간절히 청하였다. 이때 대사가 다시 눈을 뜨고 대중을 둘러보고는 “내가 왕생극락하여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고 나서 곧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 생사가 큰일이니, 각자 마음을 맑혀 염불하는 것이 가하리라”는 말을 마치시고는 합장한 채 부처님 명호를 부르시며 편안하게 왕생했다.

이때가 청나라 옹정 12년(1734) 4월 14일이었다. 세수 49년, 승랍 25세로 대사의 삶은 길지 않았으나, 정토종에 끼친 공헌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도 넓었다.

대사가 입적한 12월 8일 제자들이 대사의 영골(靈骨)을 상숙 금천의 불수암(拂水岩) 서쪽에 모셨다. 청나라 건륭 7년 2월 15일, 항주 일대의 제자 등이 다시 대사의 유골을 아육왕사(阿育王寺)의 오른 편 탑에 봉안했다. 대사의 저작으로는 〈권발보리심문(勸發菩提心文)〉 〈정토시집〉 〈성암대사어록〉 〈성암법사유서(省庵法師遺書)〉 등이 있다.

발보리심 일향전념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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