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삼릉에서 칠불암 가는 길

경주를 내려다보는 남산 상선암 마애불. 속세의 들판을 옆에두고 반개한 눈으로 맞은편 산을 바라본다. 자연에 내맡겨진 그 모습이 인생을 되돌아보게 한다.

목 없는 부처였다. 삼릉 숲길, 구불구불한 소나무들 곁을 지나면서 헐거워졌던 마음이 돌처럼 굳어진다. 경주 남산에 드는 길에서 처음 대면하는 석불 곁을 무심코 지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본래 목이 없었던 게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깨버렸다니까 정확히 목이 떨어진 석불좌상이다.

 

간을 초월한 공간, 남산

노동과 수행 흔적 뒤섞여

중생에 다가간 부처 닮아

 

삼릉계곡의 목없는 석불.

삼릉계곡의 선각마애불.

‘미스 신라’로 불리는 마애관음보살.

 

그 없는 목 위에서 부처는 미소 짓고 있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임을 아는 신라의 불상들처럼. 그러나 그것은 내 상상일 뿐, 참수의 잔혹사를 빈 페이지로 남겨 놓고 남산의 불상들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한 시대에 광범위한 훼불이 저질러졌음이 틀림없지만, 얼굴이 없으니 무엇인들 증언할 수 있을까. 얼굴 대신 허공을 올려놓았기에 바람이 전하는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

삼릉계곡의 목없는 석불

바람, 봄바람이 전하는 소리를 들으러 나온 여인처럼 마애관음보살상은 어디 먼 곳에 한눈팔고 있었다. 목 없는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기슭이었다. ‘미스 신라’라는 별명이 어울리게도 이 석조상의 입술에 붉은색이 감돈다. 화강암에서 우연하게 배어 나온 산화철분이리란 추측은 그 별명 앞에서 진부한 과학으로 전락한다. 목 없는 부처에서 립스틱을 칠한 관음보살로 건너간 야릇한 감정이 이 돌 속의 여인에게 화장할 자격을 부여한다. 눈썹이 살아나고 뺨도 발그레하게 부풀어 오른다. 이같이 육감적인 관음보살을 돌에 새긴 석공은 누구였을까?

스님도 속인도 아닌 중간 지점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을까. 문득 ‘고달’이란 석공이 떠오른다. 고달사에서 탑을 쌓는 일에 치중하던 고달은 그 사이 가족이 굶어 죽는 줄도 몰랐다. 불사를 완성하고서야 그 사실을 안 고달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자의 길을 떠났다. 가족의 아사도 모른 채 불사에 매달렸던 고달처럼 남산의 산기슭에서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삶을 살았을 석공들이 내 눈에 어른거린다. 정을 치고 끌을 잡아당기는 동안 목탁소리와 염불이 어우러진다.

삼릉계곡 선각마애불을 보면 노동과 수행이 한데 어우러진 현장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암벽을 끌로 파서 선으로 연결한 육존불은 격식을 떠난 자유로운 노동인 동시에 수행이다. 육존불의 수많은 선은 암벽을 둘러싼 구불구불한 소나무들과도 닮았다. 면 대신 선을 채택해서 선각마애불을 완성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나는 그 앞에 오래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고작 내가 생각해낸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가벼움이 무거움을 전복해버리는 세계에서 질서란 아무런 소용도 의미도 없다. 노동자의 삶과 수행자의 삶이 뒤섞인 세계에서는 모든 질서가 재편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은 무슨 책무라도 짊어진 양 세상의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기에 급급하다. 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은 그런 조바심에 두 번이나 깨어진 조각을 접합해서 얼굴을 복원했다. 예전에 고증도 없이 성급히 복원한지라 재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땅에 굴러다니던 10개의 조각을 잇고 없어진 부분은 새로 조각했다. 그렇게 해서 광배도 살려냈다.

삼릉계곡 선각 마애불

원형 복원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독 접합 이전의 얼굴을 보고 싶다. 복원한 불상이라 해서 영원한 것은 아니며, 목이 없는 불상이라 해서 잊혀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생겨난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부처는 말했다. 경주 남산의 불상이 목 없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세상은 끊임없이 변했다. 때로는 개혁이란 이름으로, 때로는 혁명이란 이름으로 변하는 세상을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사라지지 말아야 할 것은 부처가 남긴 말이지 불상이 아니다. 나는 목 없는 불상으로부터도 부처의 가르침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느낀다. 생겨난 것은 생몰을 거듭하므로 언젠가 경주 남산의 불상과 불탑들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 해도 폐허는 폐허로서 아름다울 것이다.

영원한 것이 없듯이 완전한 것도 없다. 경주 남산의 불상은 그 불완전한 모습 때문에 규격과 질서, 고정관념을 뛰어넘는다. 상선암 마애여래좌상은 돋을새김한 얼굴을 빼고는 나머지 부분이 선각에 가깝다. 깎아지른 벼랑을 불과 몇 미터 앞두고 마애불은 어찌 보면 바위 바깥으로 나오는 동작이고, 어찌 보면 바위 안으로 잦아드는 동작이다. 그러나 어찌 부분만 볼 것인가. 크게 보아 상선암 마애불은 남산의 다른 불상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내맡겨진 존재이다. 부처가 살던 시대의 수행자처럼 탁발을 하러 다니거나 숲 속에서 들어앉아 선정에 잠겼던 바로 그 자세이다. 뜨거운 햇볕과 세찬 비바람을 견디는 전정각산의 싯다르타처럼 상선암 마애불은 속세의 들판을 옆에 두고 반개한 눈으로 맞은편 산을 바라본다.

속세는 상선암 마애불에서보다 상선암에서 상선암 마애불로 오는 산길에서 더 잘 내려다보였다. 전망대까지 설치한 그곳에서는 형산강을 끼고 발달했을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 한눈에 들어왔다. 왕궁이 있던 월성(月城)도 오른쪽으로 보였다. 천 년의 도시 서라벌은 인구 백만에 육박하는 대도시였다고 삼국유사는 신라의 전성기를 전한다. 당나라 수도 장안과 맞먹는 인구다. 대부분 집이 기와를 얹었고 금으로 치장한 집인 금입택(金入宅)도 35채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도곡동 타워펠리스에 해당하는 호화주택이다. 이 집들 사이에 황룡사, 임천사, 천관사, 미탄사, 보림사 같은 큰절들이 그 규모에 어울리는 시주를 받았음이 틀림없다. 또한, 그 같은 세속의 절에 거주하는 스님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응당 공양을 받는데 별 곤궁함이 없었을 것이다. 말로만 토굴이지 호화 아파트에 살더라는 소문이 지금의 승가에 떠돌기도 하지만, 금은비단에 묻혀 사는 스님이 그때라고 왜 없었겠는가.

미스신라 마애관음보살

남산의 불상들은, 적어도 삼릉에서부터 상선암 뒤쪽 능선에서 내가 만난 불상들은 속세에서 비켜난 자세로 어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면으로 세속을 내려다보지도 등을 돌려 아예 외면하지도 않은 눈길이다.

우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나는 생각한다. 세속에 물들어 사는 삶도 곤란하지만, 세속을 등지고 혼자만 고고한 것도 수행자의 길이 아님을 암시하는 자세라고. 요컨대 남산의 불상들은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에게로 다가간 부처의 삶을 닮았다.

물론 지나친 의미 확산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생명이 없는 돌일지라도 성주궤공(成住潰空)하는 우주의 구성원이므로 알게 모르게, 보이게 보이지 않게 자연계의 다른 생명이나 무기물과 서로 끊임없이 작용·반작용한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돌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다만 사람보다 훨씬 늦게 마모될 뿐이다.

 

걷는길 : 삼릉 - 석조여래좌상 - 마애관음보살상 -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 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 -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 금오봉 - 용장사곡 삼층석탑 - 용장사곡 마애여래좌상 -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 신선암 관세음보살상 - 칠불암 - 남산동

거리와 시간 : 10km 정도, 8시간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