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말, 중국 절강(浙江)대학에서 열리는 국제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13년 만에 항저우를 다시 찾았다. 그런데 중국에 가기 일주일 전에는 유럽으로 2주간의 출장이 있었고, 돌아와서 여독을 풀 여유는커녕, 내 게으름으로 인해 마무리하지 못한 학회 발표 논문을 손질하느라 쉬지 못했다.

그렇게 학회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자 한 달간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옴을 느꼈다. 나는 다음날 늦게까지 잠에 취해있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학회가 ‘항저우’에서 열린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그리운 이를 찾듯이 꼭 들러야만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곳이 있었다. 결국 다음날 늦잠을 자겠다는 다짐은 버리고 호텔과 그리 멀지 않은 영은사(靈隱寺)로 향했다.

중국 선종 10대 사찰 중 하나인 영은사는 천년고찰답게 입구부터 시대를 달리하는 많은 불상들이 석벽에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긴 역사보다 내겐 처음으로 영은사를 찾았던 13년 전 기억이 더 소중한 ‘역사’로 자리 잡고 있다.

금강대학교 신입생 시절, 학교에서 상하이~항저우 일대로 신입생 수련회를 보내주었기에 영은사에 와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서른이 넘은 ‘늙은 신입생’인 내게는 스무 살의 동기들처럼 새로운 대학 생활에 대한 설렘이 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러한 내 선택에 대해, 나이를 먹으면서 짊어져야만 하는 의무로부터의 도피라는 주위의 질타를 부정할 수 없었기에 여행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복잡한 심경 탓인지 대웅보전에 모셔진 20m가 넘는 풍채 좋은 부처님을 뵙고는 가장 원초적인 ‘기복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이 선택이 잘못된 길이 되지 않게 해달라며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시작된 서른 살의 대학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불교학을 알게 되고 불교학과로 전과하면서 불안했던 마음은 안정을 얻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 여러 고마운 인연들을 만나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불교학은 그렇게 내 업이 되었다.

유학시절, 같은 지도 교수님 아래에서 함께 공부한 중국인 유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중국으로 돌아가 절강대학의 강단에 서게 되었고, 이번 학회는 그녀의 초정으로 오게 되었다. 그렇게 인연은 다시 나를 항저우로 오게 하였기에 영은사를 꼭 찾아가고 싶었다. ‘불교학’의 인연은 상상도 못했던 그때의 내 모습과 ‘불교학회’ 때문에 항저우를 다시 찾게 된 묘한 삶의 인연이 왠지 영은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웅보전에 들어서서 13년 만에 뵙는 부처님께 합장 드리며 여쭤보았다. 부처님께서는 그때 우울한 마음으로 소원 빌던, 수많은 관광객 중 한 명이던 나의 미래를 알고 계셨었는지…. 물론 부처님께서는 삶에 대한 운명론도, 숙명론도, 그리고 신의 의지도 단호히 거부하셨다. 인생은 그저 자신이 심은 행위의 씨앗이 싹을 터가며 만나는 여러 상호 작용들의 흐름일 뿐이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심을 인생의 씨앗들은 1년 뒤, 10년 뒤 또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갈 것이다. 가는 곳을 알 수 없다 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무명(無明)의 씨앗은 고통으로, 지혜의 씨앗은 즐거움으로 데려가리니, 늘 지혜를 탐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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