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세상과의 소통 16

에고로 인한 불편한 감정
우리는 살면서 잠시도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삶은 걱정과 근심의 과정’이라고 할 정도다. 잠시라도 걱정에서 벗어나면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생각이 바로 나의 에고(ego)를 키운다. 오쇼 라즈니쉬(1931~1990)는 그의 〈성의 미학〉이라는 책에서 에고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었다.

한 가난한 농부가 그를 찾아온 소꿉친구에게 임금이 하사한 좋은 옷을 입히고 다른 친구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옷을 입은 소꿉친구는 마치 왕같이 보였고, 농부 자신은 하인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걷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친구만을 보았으며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약간의 질투를 느꼈다. 그러나 자신은 그의 좋은 친구이고 신성한 인간이며, 옷이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애써 옷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옷은 그의 머릿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친구와 잡담을 하면서도 내내 그 옷만을 생각하였다. 드디어 한 친구 집에 도착하여 소꿉친구를 소개하였다.

“이 사람은 내 소꿉친구이고 매우 훌륭합니다. 그리고 그가 입은 옷은 제 것입니다.”

이 말에 농부의 친구는 놀라 어리벙벙하였으며, 그들을 맞이하던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하지 않아야 할 말을 무심결에 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농부는 친구에게 사과한 뒤 다시 다른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이번에는 절대로 옷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다시 한 번 그는 조심스럽게 친구를 소개했다.

“이 사람은 나의 친구이고 매우 훌륭한 신사입니다. 그리고 그가 입은 옷은 모두 그의 옷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도 역시 사람들 모두 놀랐다. 그런 소개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을 떠나면서 농부는 화가 난 친구에게 거듭 사과를 하였다. 그는 실수라고 말했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함께 가지 않겠다는 친구를 만류하여 다시 세 번째 친구 집에 갔다. 농부는 옷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고 자기를 억제하였다. 그는 온통 땀을 흘리고 있었고, 극도로 불안한 나머지 지쳐있었다. 그는 천천히 친구를 소개하였다.

“제 친구는 매우 좋은 사람이고….”

그는 말을 더듬거렸으며, 그의 내면에서는 옷에 대한 엄청난 욕구가 일어나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옷 말이죠? 실례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억제에 뒤따르는 긴장·욕망
잠재의식에서 더 큰 문제돼
주의 대상을 옮겨 멀어지고
감정 사라지도록 관찰해야

이 얼마나 무서운 에고란 말인가! 농부의 태도에서 보듯이 우리의 의식은 억압하면 할수록 잠재의식에서 더욱 내적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억제하면 할수록 해방되려는 충동이 강하게 반작용하기 때문이다. 단식하려고 하면 할수록 먹고 싶은 욕망이 더 일어나며, 금욕하려고 하면 할수록 성(性)을 구하려는 열망이 솟구친다. 억제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대단한 긴장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지속하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에고는 우리가 삶 속에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일어나는 내 생각이 만들어 낸 가짜 ‘나’이다. 예를 들면 ‘나는 춤을 잘 춰야 해’ ‘나는 노래를 잘 불러야 해’라든가 위의 농부처럼 ‘나 자신이 더 잘 보여야 해’ ‘저 옷은 내 것이야’와 같이 나의 참모습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낸 허상이다. 이처럼 진짜 내가 아닌 ‘나를 더 돋보이게 하려는 나’를 에고라고 부른다. 이러한 에고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흔히 나타나 나를 긴장하게 하거나 보호하려고 한다. 싫어하는 동료를 보면 피해서 다른 길로 가거나 운전 중 담배꽁초를 버리는 기사를 보면 욕을 하는 일, 수강생이 옆 사람과 잡담을 나누면 기분이 언짢아지는 강사 등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을 느끼는 감정들이 에고와 관련 있다.

내 감정부터 알아차려야
에고와 관련된 오래된 문제는 답을 찾기보다 문제 이면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 위 농부의 문제는 임금이 하사한 옷을 그가 입지 않고 소꿉친구가 입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신성한 인간’으로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에고에서 비롯되었다. 그러한 에고로 인해 질투심과 열등감, 후회하는 마음과 같은 감정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농부는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더욱 깊어졌다. 어떻게 하면 이런 감정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다음 두 가지를 보기로 한다.

하나는 불편한 감정을 만나지 않는다. 그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 감정을 회피하는 기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의 장수 관우의 예를 보자. 관우는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오른팔에 독화살을 맞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명의 화타는 관우의 팔을 치료하려고 그를 찾아온다. 화타는 관우의 팔을 진단한 뒤 수술을 위해서는 아픈 팔을 움직이지 않도록 기둥에 매도록 권한다. 하지만 관우는 “내 팔은 그대에게 맡겼으니 치료나 잘 해주시오”라며 팔을 화타에게 맡기고 부하장수와 바둑을 둔다. 살가죽을 벗기고 뼈를 긁어내는 소리에 소름이 끼치지만 관우는 태연하게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신다. 그리고 수술이 끝났다. 관우는 어떻게 이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뎌냈을까?

수술과정에서 관우의 1차 의식 대상은 아픈 팔이지만 그는 대상을 바둑이라는 2차 대상으로 옮긴다. 주의를 팔에서 바둑으로 옮긴 것이다. 의식이 팔에서 바둑판으로 옮기니 비록 팔이 아프다 할지라도 강한 고통의 정도가 줄게 되어 그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명상과정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명상을 할 경우, 집중상태가 되어야 하므로 1차로 주의를 보내야할 대상을 바둑에 둔다. 초기에는 아픈 팔로 주의가 자꾸 가지만 결국에는 1차 대상인 바둑에 집중하게 되고 2차 대상인 팔의 고통은 주의 대상에서 멀어진다. 이와 같은 방식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괴로울 때 다른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거나, TV를 보면서 괴로움에서 멀어진다거나, 산행을 하면서 원래의 고통보다 덜한 고통을 경험하는 등의 방법들이다.

다른 하나는 고통과 직면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보다 근원적인 진리를 통찰할 때 가능하다.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을 확연히 깨닫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떠한 것이든 일어난 것은 사라진다는 진리이다. 아무리 모진 고통이라도 결국은 지나간다. 이 방법이 성공하려면 의식의 탈동일시가 이루어져야 한다. 고통이라는 대상을 바라보되 그 대상과 동일시되어 고통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의식의 탈동일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방법은 고통이라는 감정을 피하지 않고, 힘들지만 직면하는 기제이다.

요컨대 판단을 멈추고 감정은 감정일 뿐임을 바라보는 것이다. 감정에 저항하고 싶은 욕구도 바라본다. 감정은 저항 때문에 지속된다. 감정에 저항하거나 바꾸려는 노력을 포기하면 감정 이면의 에너지가 사라지면서 감정의 강도가 약해진다. 감정이 사라질 때 관련되는 생각도 따라 사라진다. 생각이란 감정이 생기는 까닭을 설명하려는 마음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위 과정을 정리해 보면, 농부가 세 번째 친구를 방문할 때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또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그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더 이상 친구를 소개할 힘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감정을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린다’는 말은 매순간 일어나는 감정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농부의 경우 자신의 에고가 만들어낸 질투심과 열등감을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는다. 감정은 단지 감정일 뿐이므로 바라보기만 할 뿐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감정에 관련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도 바라본다. 잠시 후 그 감정이 사라졌는지 확인한다. 감정이 사라지면 에고도 사라진다. 감정은 오고 가지만 그 감정이 진정한 나는 아니다. 감정은 에고가 창조한 것에 불과하다. 농부가 행한 귀한 선행을 농부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더 많은 성취를 원하는 욕망을 부추기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더 많은 것을 성취하도록 그에게 압박을 가한다. 결국 그 에고가 농부를 지배할 때 그는 자신감을 잃고 마치 스스로 무능력한 것처럼 느낀다. 에고는 마음이 뭔가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내면의 심오한 평화의 느낌에서 벗어나도록 교란시킨다.

이 칼럼을 쓰면서 필자는 최근에 필자가 운영하는 명상센터의 이사장이라는 권위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직원이 하는 일이 못마땅하게 보이는데 그 마음을 전하려니 속 좁은 사람 같고, 말하지 않으려니 마음에 계속 그 직원이 남아있다.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이 상책이요, 꺼내서 상대를 알게 하는 방법이 하책이다. 이 생각이 드는 순간 명상에 들어갔고 곧 불편한 감정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직원이 매사에 완벽하게 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보였다. 못마땅한 감정이 서서히 사라졌고, 동시에 완벽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사라졌다.

칼럼을 끝내면서 필자의 마음은 매우 가볍고 기뻤다. 에고를 놓아버리니 이와 결부된 생각에서 해방되어 내면에 있던 행복이 밖으로 빛을 발한 것이다. 잠시나마 에고를 내려놓음으로 내안의 큰 나(self)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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