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와 목동 이야기 中-2

십우도송의 제5단계 ‘목우(牧牛, 소를 길들이다)’를 보면, “채찍과 고삐를 쉼 없이 사용해 곁에서 여의지 말라. 그대가 한 걸음씩 티끌 속세로 들어감이 두렵다”라고 나옵니다. 수행이 아주 조금 된 경지에서는 마음에서 의심이 많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가타부타 의심하고 헤아리고 핑계대면, 다시 티끌 먼지(埃塵, 속세) 속으로 다시 떨어질까 두렵다고 하네요.

그러니 더욱 고삐와 채찍을 몸에서 떼지 말고 쉴 새 없이 가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자가 애초서부터 손에 들고 있던 ‘고삐와 채찍’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수행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는 여러 가지 방편입니다. 이러한 방법들은 많은 수행자들에 의해 개발이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알아차림을 지속하느냐’, 어떻게 하면 ‘오온에 떨어지지 않느냐’, 이것이 관건이라고 하는군요.   

중반에 접어든 십우도 살피면
검은 소의 색깔이 희게 변화해
수행 통해 반야지혜 증득 표현
십우도, 화두 타파 전제한 지침


‘채찍과 고삐’는,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죽비이기도 하고, 선사들의 우레와 같은 사자후이기도 하며, 허를 찌르는 공안의 문구이기도 합니다. 또 경전의 부처님 말씀이자, 선지식의 가르침이며, 격려해주는 수행 도반이기도 합니다. 염불이자 명상이자 좌선입니다. 즉, 수행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든 방편들입니다. 곽암선사의 십우도에서는 소를 길들이는 ‘목우’가 단지 한 장면으로 묘사됩니다. 벽화의 해당 장면을 보면, 검은 소가 반 정도가 하얗게 변하여 있습니다.〈도판 참조〉

그리고 다음 장면은 ‘기우귀가(騎牛歸嫁)’로 동자가 완전히 모두 하얗게 된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광경입니다. 반면, 보명선사의 목우10송은, 제1 장면부터 제8 장면까지 소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10장면 중에 마지막 두 장면을 제외하고는, 무려 8장면이 모두 소를 길들이는 광경입니다. 그러니 제명(題名)이 소를 길들인다는 뜻의 ‘목우(牧牛)’임에 마땅하네요.

등불은 저절로 밝아지진 않는다 
보명선사의 목우송은 ‘번뇌와 무명’(소)을 타파하는 과정에 주안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생의 업장은 소멸시키기 어렵군요. 나를 생기게 한 업력의 힘은 세세생생 켜켜이 묵은 것이라, 깨닫지 못한다면, 아승지겁의 세월 만큼인 듯합니다. 미쳐 날뛰는 통제 불능의 소(중생의 마음)를 잡아, 유(有)에서 무(無)로, 색(色)에서 공(空)으로 가는 여정이 수행자로서의 인생인가 봅니다.

보명선사 목우송의 제3장면 ‘수제(受制, 차츰 길들여지다)’에서는 검은 소의 머리만 하얗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겨우 번뇌가 닦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의 한 켠에는 이 장면에부터 보름달 같은 지혜의 원상이, 목동을 지켜주는 등대처럼, 나타나 있답니다.

제4장면 ‘회수(回首, 머리를 돌리다)’에서는 더 이상 소가 가는 방향이 아니라, 목동이 이끄는 방향으로 소의 머리를 돌렸습니다. 욕망의 질주에 고삐가 채워지고, 이제는 그 마음이 전환하여 아예 방향을 돌렸네요. 속세로 개념으로 가치로 갈애로 향하지 않고, 깨달음을 향해 확실하게 몸을 틀었습니다.

제5장면 ‘순복(馴伏, 완전히 길들이다)’에는 소의 몸 색깔의 반 이상이 하얀 색입니다. 이제는 좀 안심해도 될까요. 더 이상 번뇌와 망상이 흔들어놓지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의 목동은 고삐를 더 이상 꿰고 있지 않습니다. 고삐와 채찍을 쓰지 않아도 소가 저절로 목동을 졸졸 따라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수제’의 내용은 “점점 조복되어 쉬었다가 달아나고/ 물을 건너고 구름을 뚫고 걸음걸음 따르네/ 손으로 고삐 줄잡고 조금도 늦추지 않으니/ 목동은 종일토록 스스로 피곤함도 잊었네”입니다. 수행이 되는 듯 싶다가도 다시 나락이었다가를 반복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수행이 골라지고 균형을 잡아갑니다. 목동이 잡은 고삐를 절대 늦추지 않는다 하니, 이때 중요한 것은 꾸준한 지구력으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목우(牧牛, 소를 길들이다)’를 표현한 순천 송광사 〈십우도〉 벽화. 검은 소가 반 정도 하얗게 변해 있다.

다음은 수행의 결정적인 진보가 있는 ‘회수’ 단계입니다. “날이 오래고 공력이 깊어 비로소 머리를 돌리니/ 넘어지고 미친 심력(心力)이 점점 골라져서 부드럽네/ 목동은 온전히 다스려 허여를 즐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고삐를 잡고 더욱 단단히 매어서 머물게 하네” 이 단계에 오면, 수행이 퇴보할 우려는 없는 듯합니다.

‘순복’은 “푸른 버들 그늘 아래 옛 시냇가에/ 놓아 가든 거두어 오든 저절로 그렇구나/ 해 저물고 푸른 구름 낀 향기로운 땅/ 목동은 돌아가며 굳이 이끌지 않는다”라는 내용입니다. 이제 의식적으로 애쓰지 않아도, 시간을 정해놓고 수행에 정진하지 않아도 저절로 지혜의 마음이 함께 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의 제6장면 무애(無碍)·제7장면 임운(任運)·제8장면 상망(相忘)에 이르기까지 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몸체에서 검은 색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 검은 기운이 엉덩이 부분에 남고, 다시 꼬리에 남고, 다시 꼬리 말단까지 남아서 점차적으로 사라지는 양상을 보입니다. 검은 기운이 완전하게 사라졌을 때는 소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깨어남’이란 무엇인가
십우도에 첫 장면부터 등장하는 동자는 무명(소)은 없애는 지혜(智慧)입니다. 즉, 중생 누구나 갖고 있다는 불성(佛性)입니다. 자각의 지혜는 누구에게나 있으나 이것을 개발하느냐 못하느냐, 개발하더라도 얼마만큼 강하고 성성하게 키워 나가느냐가 수행의 관건이라고 하는군요.

그런데 어째서 동자로 표현되었을까요. 지혜가 갓 깨어났기 때문일까요. 혹은 순수하고 깨끗하여 물들지 않은 지혜의 성품을 표현한 것일까요.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라는 책 제목이 떠오릅니다. ‘깨어남’에서 완전한 ‘깨달음’으로까지의 여정을 상세하게 도해한 것이 〈십우도〉라 하겠습니다. ‘깨어남’의 표현인 동자가 어떻게 ‘완전한 열반’을 성취해가, 그 여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의 저자 아디야 샨티는 ‘우리는 속이고 있는 것을 직시하는 용기’를 말합니다. 자아관념에서 진정한 우리의 본성으로의 전환은, 우리가 알고 지내던 모든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그동안 우리라고 여겨왔던 초라한 자아관념 따위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우리를 ‘지켜보는 그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라는 깨어남이 있은 뒤에는 ‘수행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그의 은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답니다. “그것(깨어남)은 이제 막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과 같다.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해서 등불이 저절로 환하게 밝아지진 않는다. 이제 막 깨어난 낯선 세상 속으로 향해 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

깨어남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켜보는 그것’에 대한 눈뜸입니다. 이를 ‘반야’ 또는 ‘반야지혜’라고 합니다. 대승불교는 이 반야를 완성해가는 것, 즉 ‘반야바라밀’이 궁극의 목표입니다. 이는 선정 체험을 통해 자각될 수 있기에, 참선이 중요합니다.

참선의 방법 중에 가장 빠른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으로, 역대 선사님들을 통해 검증된 것이, 간화선입니다. 화두 참구를 통해, ‘보는 놈’, ‘아는 놈’이라고도 말해지는, 반야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보는 그것이 궁극의 본성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한번 켜진 등불이 항상 켜져 있지는 않고 또 저절로 그 빛이 환하게 밝아지지는 않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갓 태어난 이 반야를 키워나가야 합니다. 갓 깨어난 반야는 십우도에서 동자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보명선사의  목우도에는 첫 장면 ‘미목’에서 동자와 소가 함께 등장합니다. 하지만 곽암선사의 십우도에는 ‘심우’와 ‘견적’, 첫 번째와 두 번째 장면까지 동자만 홀로 나타납니다. 동자가 먼저 나타나 두리번거리며 소를 찾고 그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십우도는 화두 타파를 전제로 한 수행지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자기 자신 속의 반야가 모습을 드러낸 시점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반야라는 불성은 중생 누구나에게 있고 만물 어디에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옷 속에 감춰진 보배일 뿐이요, 진흙 속의 진주일 뿐입니다.

반야가 이미 모습을 드러내어 주체로서 소를 찾고 있으니, 이는 돈오점수의 수행법을 암시합니다. 돈오점수란, 수행자가 진리를 문득 깨닫고(頓悟), 그것을 생활로 삼으려 하나 전생의 업력과 현생의 습관이 강하게 작용하여 단박에 실천이 되지 않기에 점차적으로 닦아 나아가는 것(漸修)을 말합니다. 바로 이 과정을 묘사한 것이 〈십우도〉입니다.

자기 자신 속의 반야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상태는 ‘검은 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두 참구나 좌선 등을 통해 한 번 잠시라도 자신 속의 반야지혜에 불을 밝히면 그것에 의지하여, 업의 습관을 녹이고 완전한 지혜(또는 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토막 불교상식- 반야란?

반야는 2반야·3반야·5종반야 등으로 분류된다. 공반야(共般若)와 불공반야(不共般若)로 구분되는 2반야는 〈지도론(智度論)〉에서 주장한 것으로, 천태종에서 이 설을 많이 따르고 있다.

공반야는 성문·연각·보살의 삼승(三乘)을 위하여 설한 반야의 법문으로, 〈반야경〉 등의 여러 대승경전이 이에 속한다. 불공반야는 일승(一乘)의 보살만을 위하여 말한 것으로, 〈화엄경〉이 이에 속한다.

3반야는 문자반야(文字般若)·관조반야(觀照般若)·실상반야(實相般若)이다. 반야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채택될 뿐 아니라, 우리나라 원효 등의 고승들은 이에 대해 깊이 있게 해석하고 있다. 문자반야는 부처님이 설하여 문자화된 경·율·논을 전부 통칭한 것. 관조반야는 경·율·논의 글자나 말에 의하여 진리를 알아내고 이 진리에 의해서 수행하고 실천하는 것. 실상반야는 관조반야를 통하여 체득되는 궁극으로, 신라의 원효는 여래가 감추어진 중생이 곧 이것이라 하여 실상반야가 곧 여래장(如來藏)이라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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