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힐링이 곧 웰빙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웰빙 열풍이 불더니 요즘에는 힐링이 트렌드다.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웰빙(Well-Being)과 힐링(Healing). 이는 곧 삶의 질과 행복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따라 생겨난 웰빙 또는 힐링 관련 상품 및 콘텐츠는 무언가 부족함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이 진짜 웰빙이고 참된 힐링일까? 그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웰빙, 인간 존재에 대한 것
좋은 무언가 얻는 것이 아닌
‘완전한’ 본래 존재 깨닫는 것
힐링, 관계에 바탕을 둔 것
두 존재 사이 ‘사랑’ ‘에너지’
상대 입장 고려해야 진짜 ‘힐링’


웰빙이란 ‘잘 있고, 잘 존재한다’는 뜻으로, 즉 ‘잘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인사를 하면서 늘 웰빙에 대해 묻고 답한다. 서로 만나고 헤어질 때 안녕함을 묻지 않는가? 만났을 때에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면서 그동안 ‘웰빙’했는지를 묻는다. 헤어질 때에는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면서 앞으로도 ‘웰빙’하라고 염원한다. ‘안녕하다’는 것은 평안한 상태이며 그것이 곧 ‘웰빙’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면서 잘 가꾸며,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곧 ‘웰빙’이다. 여기서 ‘잘 한다’는 것은 어떤 목표달성과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웰빙’은 무언가를 얻는 것이기 보다는 본래 존재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알아차리는 것이며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와 행위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만족감과 평온 그리고 행복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존재만으로 완전하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느껴보자. 그런데, 그것을 느끼고 우리가 완전한 존재임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감각이 깨어나야 한다. 그 깨어난 감각으로 들어오는 숨과 머무는 숨, 그리고 나가는 숨을 느끼고 알아차릴 수 있다. 또한 몸의 움직임과 피부의 촉감, 세세한 감정상태와 변화를 알고 느낄 수 있다. 그래야 존재 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탄생에서부터 완전한 존재였다. 우리의 몸은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엄마의 자궁 안에서 정자와 난자의 수정으로 하나의 생명체가 만들어 졌다. 쌍둥이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3~5억 중 하나의 정자가 하나의 난자와 만난다. 우리는 3~5억분의 1의 확률로 태어난 고귀한 존재이다. 특히, 나를 제외한 나머지 3~5억의 생명이 마지막 순간까지 협력하고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치 마라톤에서 함께하는 선수들처럼 말이다.

세상은 1등만 기억할지 몰라도 자연은 1등을 있게 한 그 모든 존재를 존중한다. 우리는 엄마 뱃속에 있는 10달 동안 완전한 존재로 진화하고 거듭나 탄생한다. 우주 자연의 이치 안에서 어긋남 없이 태어나며 생물학적으로 결함이 없는 완전한 존재가 된다. 내 한 존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역사와 과정을 알면 나 스스로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한 숭고한 가치를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다음으로 ‘힐링’에 대해 살펴보자. ‘웰빙’이 존재에 대한 것이라면 ‘힐링’은 관계를 바탕에 두고 일어나는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힐링’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두 존재 사이에서 사랑이나 에너지가 오간다.
‘힐링’은 해 주는 입장과 받는 입장 2가지로 나뉜다. 그렇다면 각자 어떤 입장에서 해주어야 할까?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철저히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

‘힐링’을 해주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무엇의 결핍이 있는지 어디가 아픈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일종의 봉사정신을 갖고 임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상대를 위하는 마음 가운데 나는 사라진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 충만한 생명력이 채워지며 그 에너지를 상대방에게 전해진다.

만일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나를 위한 방식으로 실행한다거나 이기심이 바탕에 깔려있다면 참된 ‘힐링’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비워진 상태에서 나는 그저 통로가 된다. 그 통로에 ‘힐링’의 에너지가 흐르며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힐링’을 받는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이 주는 치유의 에너지를 내가 온전히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사라지고 오직 에너지의 흐름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힐링’은 ‘웰빙’과 어떤 상관관계를 가질까? 존재를 떠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듯이 ‘웰빙’을 떠난 ‘힐링’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힐링’ 없이는 ‘웰빙’은 점차 힘을 잃어간다. 원만한 관계가 이뤄지지 않으면 존재하는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에베레스트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베이스캠프에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처럼, ‘힐링’이라는 등산을 위해서 ‘웰빙’이라는 베이스캠프가 필요하다.

진정한 ‘힐링’을 위한 ‘웰빙’의 상태는 비워짐이다. 비울수록 가득한 상태가 최상의 웰빙 상태이며 진정한 힐링을 가능케 한다. 비울수록 가득한 마음은 힐링여행을 떠날 때 느끼는 상쾌함과 비슷하다. 아직 특별한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닌데, 여행을 떠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힐링이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마음의 무거움과 집착을 떠나 새로운 길에 들어선 것이 곧 비움이다. 그리고 비움 그 자체만으로도 힐링이 이루어진다.

비움을 통해 일어나는 치유의 에너지는 에고로 꽉 채워져 있는 자기 자신을 비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과 에고로 고여서 썩는 우물이 되지 않도록 해준다. 남을 위하는 이타심으로 상대방에게 흐르며 스스로를 비운다. 그 자리에 새로운 에너지로 충만하게 된다. 상대방을 위하는 ‘힐링’이 자신을 온전하게 존재케 하는 ‘웰빙’의 에너지를 만들어 준다. 따라서 진정한 웰빙은 힐링이고, 힐링은 곧 웰빙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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