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정방문

마당가 연못에 수련 꽃이 피어 있던 한 여름이었다. 법정 스님께서 예고 없이 전화를 주셨다. 내일 내 산방으로 가정방문 갈 것이니 외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가정방문.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의 집을 방문하여 이런저런 속사정을 살피고 가는 게 가정방문이었던 것이다. 나의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은 어머니와 고향이 같아서 누님, 동생하고 친근하게 지냈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목포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수업시간인데도 뒷자리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남진에게 군밤을 먹인 일이 있다고 말씀하시던 김남규 선생님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오신다고 하면 집안은 잠시 긴장을 하게 마련이었다. 아버지는 마당을 쓸고 어머니는 음료수나 과일을 준비했다. 그러나 나는 담임선생님이 나의 수업태도나 성적 같은 것을 고자질하지 않을까 싶어 떨떠름해 있기 일쑤였다. 담임선생님이 가시고 나면 나의 처지는 늘 불리한 편이었다.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 것이 가정방문의 마무리였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의 방문은 비록 내가 불가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학창시절의 가정방문과는 달랐다. 스님은 내가 우린 차를 마시면서 나에게 주로 격려를 하셨다. 산중생활을 하면서 저절로 육식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씀드리자 ‘말할 수 없이 좋은 변화’라고 하셨고, 나를 서울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 건강하게 보인다고 하시며 “사람이 자연에서 멀어지면 병원이 가까워진다”고 덧붙이셨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연못에 물을 대는 고무호스를 보고는 “나무나 대나무로 바꾸시오”라고 즉석에서 지적하셨다. 스님은 내 산방을 떠나신 뒤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셨다.

‘남쪽에 내려간 김에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내려가 흙을 만지면서 새롭게 살아가는 한 친지를 방문했다. 소비와 소모의 땅,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혼자서 살아가는 그 의지와 결단에 우선 공감했다. 작가인 그는 새로운 터전에서 살고 싶어 새로 집을 지어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고 채소를 가꾸면서 작업을 한다. 보기에 아주 건강한 삶을 시도하고 있다.’

스님의 흔적은 또 있다. ‘무염(無染)’은 스님께서 주신 나의 법명인데, ‘무염산방(無染山房)’이란 현판 글씨이다. 스님은 낙관을 찍는 것은 자기 글씨 자랑하는 거라며 낙관을 찍어주지 않았다. 다만 방에 걸어둘 글씨라면 낙관을 찍어주시겠다며 한 점을 더 써주셨는데, 나는 지금도 스님의 친필 글씨 두 점을 보관하고 있다.

낙관이 없는 현판 글씨를 볼 때마다 나는 자기질서를 철저하게 지킨 생전의 스님을 대하는 것 같아 어영부영 흐트러지려는 나를 바로잡곤 한다. 사람들은 낙관이 있어야 글씨의 가치를 보장받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 반대다. 낙관이 없으므로 나에게는 더 보배가 된 것 같다. 내 산방을 찾아오셨던 스님의 가정방문이 오늘따라 사뭇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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