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기 때문에 우주 천하가 있고 모든 게 있는 겁니다

너를 먼저 알고 나면 둘이 아닌 도리를 아느니라.

둘이 아닌 도리를 알면은 너 하나마저도 없을 때 비로소

이 속에 있는 그 의식 자체가 전부 천백억화신으로 화하느니라.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를 했던 것이 두어 달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한마음으로서, 일체제불과 중생이 따로 없이 한마음을 내 주셔서 저는 부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또 여러분을 이끌어 주는 길잡이로서 이렇게 미국에 잘 다녀왔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아니었더라면 제가 어떻게 이 길을 걷겠습니까? 일체 만물만생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아마 이 뜻을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 대한 감사함과, 풀 한 포기도 버리지 않는 고마움을 가지고 삽니다.

미국에 갔던 일을 상세히는 얘기 못 하지만 아무튼 여러분이 한마음을 내 주셔서 그렇게 잘 다녀왔습니다. 한마음이라는 그 뜻은 열반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자유인이 되는 길이며, 해탈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한국이나 미국이나 물질세계로 치닫는 이 시점에서 앞으로는 역시 정신계로 앞장서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물론 한국에도 이렇게 위대한 여러분이 계시지만 미국에도, 미국 불자들도 정신계로 들어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요청도 많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기복으로써 목탁이나 치고 염불이나 하고 이론으로 얘기나 하고 그래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에 가서 절실히 더 느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발을 붙일 수가 없겠더군요.

그러니 거기 가서 느낀 것은 한마음으로 여러분이 공부를 잘하시기 때문에 제가 거기도 여러분 덕분에 간 것 같습니다. 나도 어리둥절하게 뭐가 뭔지 모르고 그냥 오라니깐 갔고, 가서 또 그렇게 해 주니깐 그냥 그렇게 하고, 또 가라니깐 왔습니다. 허허, 저는요, 뭐가 뭔지 모르는 것을 이렇게 길을 걸었고 또 여러분한테 뭐가 뭔지 모르는 것을 이렇게 이끌어 가고 있고, 뭐가 뭔지 모르게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여러분이 아주 잘 아시는 얘기를 한번 덧붙여 볼까 합니다.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사대(四大)에 대해서 말입니다. 색(色)은 사대라고 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바로 정신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정신 내용과, 수상행식 그 자체가 사대하고 같이 합쳐지니까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그 몸과 마음은 어디에 또 상대가 있느냐는 얘기죠. 눈이나 귀나 코나 혀나 몸이나 의식 자체, 여섯 가지가 거기에 대두되는 거죠. 요거를 말씀해 놓고 내가 얘기할 게 있습니다. 거기서 대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대두가 됩니다. 그다음에 뭐가 또 대두가 되느냐 하면, 즉 말하자면 육식(六識)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시각적이나 청각적이나 후각, 미각, 촉각, 의식 자체 여섯 가지가 대두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말로만, 이론적으로만 나누어서 생각하지 마시고 한번 제 얘길 들어 보시렵니까. 그게 네 가지입니다. 네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네 가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렇다면 우리가 개수가 없는 개수를 한번…, 숫자 없는 숫자요. “하나” 하면 몸과…, “몸” 그러면 “하나” 이렇게 합니다. 하나라고 치면 육근(六根), “둘” 이럽니다. 내용적으로는 사대(四大)의 그 물질과 사람의 마음이니깐요. “하나, 둘” 하면 이 하나는 과거로 벌써 돌아갔습니다. 예? “하나” 하는 게 벌써 이 몸과 마음은 벌써 과거로 돌아가서, 즉 말하자면 절대적인 요소가 되는 거죠, 이 육근의. 안 그럴까요? 대답을 해 주셔야 좀 편리하죠. 하하하.

그래서 “둘” 할 때 육근으로 와서, 벌써 이 하나는 여기 포함이 되니까 하나는 없어지고 이게 하나가 (오른손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차례로 잡아 보이시고) 되는 겁니다, 예? 아시겠습니까? “둘” 하는 게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상대성이 절대성으로 들어오니깐 말입니다. 그래서 이게 도로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육진(六塵)이라고도 하고 육경(六境)이라고도 합니다만 육진으로 다시 들면은 그냥 셋이 됩니다. 그런데 둘이 또 없어집니다. 둘이라는 언어가 없어지면서 셋으로 갑니다. 셋으로 가는데 이 셋은 또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아셔야 납득이 돼서 결정적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납니다. 육식(六識), 육식으로써 이것을 다시금 혼합을 한다면 십팔계가 되면서 이것도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게 한데 합쳐서 십팔계라고 했는데 십팔계는 무엇을 가지고 그러느냐 이런 겁니다. 십(十)은 언제나 여여하게 돌아가는 그대로를 말하는 겁니다. 팔(八)은 사무 사유(四無四有)를 한데 합친 것을 말하죠. 여러분이 다 마음이 있죠. 여러분이 있으니까 있는 거지요. 불성이라는 그 자체가. 불(佛)이라는 자체가. 그것은 항상 움죽거리지 않기 때문에 십팔(十八) 하면 벌써 십구(十九)가 되는 겁니다. 하나가 언제나 거기 우뚝 서는 거죠. 그래서 사무 사유가, 즉 말하자면 한데 합쳐서 팔로서, 팔법륜(八法輪)으로서 (양손 주먹을 바깥쪽으로 굴려 보이시며) 그냥 돌아갑니다. 그게 우리 생활입니다. 십이 진리라고 하면 우리가 응용하는 이 중용은 바로 팔이죠. 이걸 그냥 납득할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어서 그냥 내 의견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완전히 벗어난다면 바로 벗어나는 그 자체가, 하나 없는 하나가 그냥 한마음입니다, 한마음. 하나라는 것도 세울 게 없기 때문에 그냥 한마음입니다. 대략 짐작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요걸 비유하건대 만약에 몸과 마음이 솥이라면 바로 거기에는 쌀도 있고 물도 있고 불도 있습니다. 요 네 가지를 또 한번 표현해 보죠. 그런데 쌀을 씻어서 솥에 넣습니다. 물을 붓습니다. 불을 올립니다. 그러면 요것이 밥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밥을 먹게 되죠? 그렇죠? 그래서 그 육식(六識)의 깊은 속에까지도 우리가 들어가서 굴러 나와야 밥을 먹을 수가 있다 이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씻어 넣고 이거니 저거니 하고 이론으로 따져도 스위치를 꽂아서 밥을 다 익히지 않는다면 우리 입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묵조선이니 간화선이니 하는 것도 그게 둘이 아니건만 불 질러서 밥을 하는 과정과 딱 먹는 거와 혼합이 돼서 하나기 때문에 이것저것 따지지 말자 이겁니다, 싸우지 말고. 과정을 다해서 솥에 넣고 스위치 딱 누르면은 밥이 되는 그런 거하고 또 갖다 씻어 넣는 과정하고 뭐가 다릅니까, 예? 그러니까 지금 밥을 해서 먹는다, 불이다 그런다면 우리가 솥에 그냥 하나 갖다 넣으니깐 또 하나 줄어들고, 하나 갖다 넣으니까 또 하나 줄어들고 다 넣고는 불 꽂으니깐 다 먹는다, 이것을 지금 배우는 겁니다. 스위치 꽂아서 밥해서 그냥 먹는 걸 배우는 겁니다. 그 과정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라 모든 분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거기다 그냥 넣었으면, 한 솥 넣었으면 그냥 불 꽂아서 해 먹는 거를 우리가 배우자. 우린 시기가 있고 바쁘다. 우리 몸뚱이가 살아 있을 때에 이 뜻을 모른다면 천년만년 가도 이 윤회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겁니다. 고(苦)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하나 넣어도 하나요, 하나를 또 넣어도 하나요, 그래서 한 솥을 밥을 해 놓고 먹어도 그 하나마저도 없더라. 모두 나눠서 먹으니까 말입니다. 그 하나마저도 없더라. 그리고 또 갖다 넣은 것도 여러 가지 재료가 같이 들어갔는데 어떻게 불만이, 불만이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이 나다’ 할 수가 없이 그것이 바로 한마음이요, 그 한마음마저도 집착을 하지 말라. 이거 될 때에 너라고 할 수도 없고, 쌀이 될 때 너라고 할 수도 없고, 불이 될 때 너라고 할 수도 없고, 솥이 될 때 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한마음의 찰나 생활이 그대로 역력히 돌아가고 있으니 여러분이 그대로 자유스럽게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기르시라 이런 겁니다.

또 우리가 생각을 해 보십시다. 계향(戒香)·정향(定香)·혜향(慧香)·해탈향(解脫香)·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했습니다. 그러면 계향, 정향 할 때에 벌써 이건 하나 없어집니다, 자꾸. 절대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적 절대적” 하다 보니까 상대성 원리가 원형으로 모이면서 하나가 탁 일어서는 거죠. 그러니 이것을 비유해서 얘기하니까 참작해서 잘 들으시고요, 나를 무기력하고 무질서하게 얘기한다고 그러진 마시고요. 어떡합니까. 세상 사는 게 부처님 법이요, 그것이 진리니깐요. 그리고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으니까요. 우리가 알아듣기 쉬워야지 알아듣지 못한다면 열 마디 백 마디 해야 그건 쓸데없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해탈향까지 가서 해탈지견향, 즉 말하자면 소견으로 쓰지 않고 그때는 지혜로서의 지견으로 쓰게 된다 이겁니다. 깊은 속에서 굴러서 나와서 하나로 뭉쳐 돌아가니까. 그래서 “해탈지견향” 했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은 계율을 지키려고 안 해도 그게 포함된 그런 능력의 중용이기 때문에 계(戒)를 안 지킨다 지킨다도 없이 질서 정연하게 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유의 법에서만이 질서 정연하게 해 나가는 게 아니라 무의 법에서나 유의 법에서나 일체 사생(四生)의 그 뜻을, 생각이 없는 중생이나 생각이 있는 중생을 다 포함해서 리드해 나갈 수 있고 또 바로 나로 될 수 있고 그로 될 수 있어서 자유권을 그대로 상실하지 않고 자재한다 이 소립니다. 그것이 열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가 하나가 아니라 셋이 하나고, 셋이 하나인데 또 하나가 셋이 되고, 또 하나가 아홉이 되고 아홉이 셋이 되고 이러한 요소가 바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냥 한번 당겨서 극치적으로, 즉 절대성으로 놔두었다가 상대성으로 옮겨 놓고, 옮겨 놨다가 또 절대성으로 오고 상대성으로 가고, 이렇게 자유권을 자유자재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인간이라고 하는 거고 자유자재하는 자유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번에 미국에 가서 토론을 할 때도 이런 걸 느꼈습니다. 지금 내 몸뚱이 속에 수많은 중생들이 들어 있는데 이 중생들이 누구냐 하면 자기입니다. 그렇게 숫자가 많다고 그래서 숫자가 많은 게 아니라, 숫자가 많으면서도 의식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숫자 없는 숫자죠. 그래서 그 하나마저도 없다고 하는 그 도리를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겁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 도리를 모른다면 내 중심이 없는 것이고 내 주인을 모른다면 이 껍데기가 빈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전에 임제(臨濟) 스님이나 큰스님들이 “네 주장자가 있다면 내가 네게 주장자를 줄 것이로되, 네 주장자가 없다면 네 주장자를 뺏을 것이니라.”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자기가 뺏는다는 문제를 덧붙인 게 아니라 방편으로 그거를 가르치느라고 했습니다. 왜? 모든 생명들이, 즉 말하자면 거기에 주인이 없다면 모두 세균성이나 영계성, 유전성, 업보성이 무조건 하고 거기 들어가서 그냥 막 뒤집어 놓습니다. 웃게끔 만들어 주기도 하고 울게끔 만들어 주기도 하고, 성나게 하기도 하고 모든 일을 그르치게 만들기도 하고, 아프게 만들기도 하고…. 여러 가지 과거에서부터 자기가 지은 대로 나온 거니까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숙명통(宿命通)이라는 게 바로 모든 것이 입력된 컴퓨터거든요. 컴퓨터에 입력된 대로 나오기 때문에 여러분이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거를 팔자니 운명이니 하고 울고 야단법석들을 하는데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나온 거를 거기다 맡겨 놓으면 앞의 것이 다 무너질 텐데 왜 거기다 맡겨 놓지 않느냐 이겁니다. 이 고깃덩어리가 ‘나’가 아니라 바로 마음과 그 기관이 작용을 해서, 안에까지 들어가서 과거에 살던 그 의식까지도 다 하나로 뭉쳐져서 그냥 자동적으로, 거기다가 맡겨 놓으면 그냥 자동적으로 앞의 거는 없어집니다. 넣으면 넣는 대로 없어지고 또 넣으면 또 앞의 것이 없어지고 이러기 때문에 항상 그릇이 비어 있는 까닭이죠. 내가 지금 무슨 얘길 하다가 이리로 또 달아나갔죠? 생각났습니다, 이제.

그래서 집이 비면 들어와서 그렇게 하는데 이거를 어떻게 감당해 나가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너를 먼저 알고 나면 둘이 아닌 도리를 아느니라. 둘이 아닌 도리를 알면은 너 하나마저도 없을 때 비로소 이 속에 있는 그 의식 자체가 전부 천백억화신으로 화하느니라.” 내 마음이 그렇다면은 이 의식 자체들이 전부 아는 겁니다. 내 의식이 그렇다면은, 내가 그런 마음을 쓴다면 그런 마음대로 이 속에서 다 같이 따라 주고, 내 마음을 좋은 마음으로 쓴다면 좋은 대로 따라 줍니다.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이 좋으면 남한테 말하는 것도 부드럽고 좋고, 내 마음이 신경질이 나고 언짢으면 남한테 괜히 신경질을 내게 되고 말도 올바로 나가지 않습니다. 부드럽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나로부터 먼저, 내가 있기 때문에 우주 천하가 있고 모든 게 있는 겁니다. 부처님 불(佛) 자라는 것도 생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로부터 그렇게 내 주인을 완성해야만이 내가 주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집이 아주 튼튼하고 광이 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십이상(三十二相)이 구족하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것이 구족함으로써 행하고 나가는 것이 전부 중용으로서 부드럽고 아주 평등하고 그리고 모든 걸 안아서 응해 줄 수 있는 그런 아량과 지혜, 즉 해탈지견(解脫知見)으로서 그렇게 쓸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넓게 생각을 한다면, 사회도 반쪽만 가지고 운영하려니까 힘들죠. 즉 말하자면은 육근(六根)을 가지고 그냥 하려니까 안 되니까 육근으로 들어오는 그 모든 것을 놓으세요. 맡겨 놓으셔야 되는데 바깥에서 들어오는 경계를 여기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들여보낼 사이도 없이 바깥으로 그냥그냥 모두 내놓는다면 그게 마(魔)가 되는 거죠. 말 한마디가 꼬리에 꼬리를 붙이고 말입니다. 일하는 게 전부 새끼 꼬이듯 꼬이고 말입니다. 하나서부터 열까지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그렇게 나가니까 보이는 구석이 전부 걸리는 겁니다.

그것을 안으로 놓으랬는데 바깥으로 그냥 전부 그러니까 어떻게 육식(六識) 자체로 들어서 그 모든 것이 해탈로 들어갈 수 있는, 열반으로 들어가는 그런 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우리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치가 있죠. 그래서 나부터 알아서 내 주인이 완벽하다면 전자의 조사들도 “네가 크게 쓸 때는 내 주장자로 한데 모아 주고, 작게 쓸 때는 네 주장자로 그냥 쓰고….”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아주 더 크게 쓸 것 같으면, 우주와 인간 근본의 마음과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의 모든 살림살이는 가설이 돼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위도 하나, 아래의 모든 가설이 돼 있는 것도 근본은 하나입니다, 여기. 위로도 하나 아래로도 하나, 그러니 이게 중도(中道)입니다. 중심, 중도. 중심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거지만 “중도” 이런다면은 다 포함된 겁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집이 비면 ‘지구 집’도 빈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해가 안 갑니까, 갑니까? 내 집이 비었어요. 그러면 지구 집도 빈 겁니다. 지구라는 것이 뭡니까? 우리는 지금 한 버스를 타고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속에 있는 중생들은 우리가 지금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모르고 우리들은 지금 지구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이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중생들이 화(化)해서 천백억화신이 된다면 털구멍을 통해서, 눈구멍 귓구멍 콧구멍을, 입구멍을 통해서 다 들고 나면서 모든 것을 정확하게 마음에서 두뇌로 올라가서 대뇌로 해서, 사대로 통신이 되게끔 합니다. 이 대뇌라는 건 누진통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누진통은 지금 시쳇말로 용어를 붙인다면 레이더망이라고 해도 됩니다. 거기서 들어오고 나가는 걸 다 점검을 합니다. 점검을 해서 좋은 데로 방향을 다 이렇게 자동적으로 세워 줍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들고 나면서 우주로도 통하고 아래 세간에도 통하고 하니까, 그래서 이건 삼라만상입니다. 우주 삼라만상을 한마음에 한 주먹에 쥐고 자유스럽게 자재한다. 이런 것을 열반이라고도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도 하고 해탈이라고도 하고 이름은 많겠지요.

그러나 집주인이 첫째에 문제입니다. 내 몸을 지탱하려면 내 집주인이 레이더망을 통해서 영계성이나 또는 윤회성이나 또는 업보성이나 유전성이나, 그 영계로 인한 문제들, 인과로 인해서 납득할 수 없으리만큼 오는 그 문제들, 그런 것을 다 자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들일 건 들이고 버릴 건 버리고 이렇게 말입니다. 우리가 버릴 건 쓰레기통에 버리고 먹을 건 먹고 이러듯이, 그렇게 하는 요소가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는데, 우리가 지금 물질로써 서로 싸우면서 미생물에서부터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쫓기고 쫓기면서 이렇게 진화가 돼서 인간까지 올라왔는데 인간이 되어서도 또 쫓기고 쫓는 형국입니다. 지금 또 싸웁니다. 뭐, 칼로 찔러 죽이는 것만 죽이는 게 아니라 지금도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보이는 데서도 싸우고, 안 보이는 데서도 싸우고 안 보이는 데서 싸우니까 보이는 데로 나오는 거죠.

그런데 싸우다가 그냥 죽게 되는 일이 있다는 게 뭐냐? 우리가 그냥 빈껍데기로다가 마치 탤런트처럼 영화 하다가 막 내리면 그만이듯이 그런 이치를 알기만 하면 안 된다 이겁니다. 정작 내 집에 들어와서 연구하고 참 열심히 진실하게 해서 그 영화를 할 수 있는 탤런트가 돼야만이 그건 진실하게 방편으로서도 삶답게 살 수 있다. 모두가 그렇게 해 나가지 않아서 지금 물질화로 치닫는 시대에 우리가 빈껍데기만 남았다 한다면, 우주세계에서 또 이 혹성들 세계에서 의식들이 싸울 때는 어떻게 그걸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면 정말이지 부처님의 그 도리와 같이 일체제불이 한 찰나에 들어서 좋은 위치의 주장자를 주신다고 하는 게 바로, 아주 비밀스런 법문을 설하시고선 금방 나투신다 하는 뜻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다면 한데 뭉쳐서 쓸 일이면 뭉쳐서 쓰고, 둘로 쓰려면 둘로 쓰고 셋으로 쓰려면 셋으로 쓰는 그 무기가 무엇인가? 한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혹성과 더불어 가령, 지난번에도 그렇게 얘기했습니다만 우리가 120볼트의 전기라면 220볼트가 와서 만약에 같이 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잡아먹히죠? 인정사정도 없어요, 그거는. 여러분은 그냥 안이하게만 살지 마시고 ‘지금 내가 어떻게 해서 땅바닥을 이렇게 딛고 다니나’ 하는 거를 한번 연구해 보세요. 자력이나 광력 또는 전력, 통신력 이것이 여러분한테 재료로 다 주어져 있는 거는 이 사대(四大)가 바로 지수화풍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자력이 있고 우리도 자력이 있기 때문에 붙는 겁니다.

공기가 왜 있는 줄 아십니까? 생명체가 없다면 공기가 없을 겁니다. 내가 무슨 얘길 하려고 이렇게 하는지는 모르죠. 또 여러분한테 이렇게 해서 될는지 그것도 모르면서 그냥 덮어놓고 하는 거죠, 뭐.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지금 하고 가는 것대로. 여러분이 이것을 잘 생각해서 연구하고 실험하고 체험한다면 아마도 이익한 것뿐이지 해로운 건 하나도 없을 겁니다. 슬기롭게 자유자재할 겁니다.

그래서 이 우주 자체가 그렇게 혹성이나 별성이 개별적으로도 그렇고 뭐, 우리가 수로 셀 수 없으리만큼 돼 있는 건 사실입니다마는 그거 하나하나가 아니라 전체 뭉쳐 가지고도 나갈 수 있는 거는 전체 버렸기 때문에 전체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걸 아셔야 합니다. 전체 버려야 전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때는 항복을 스스로서 받았다는 얘깁니다. 전체 얻을 수 있어야 그냥 하나로 쓰고 둘로 쓰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태양이 지구를 집어먹는다 하더라도 그 복사 체제의 의식 자체가 전부 내가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된다면 통신도 잘해 줄 것이고, 그 부패되는 것도 막을 것이고, 줄어드는 것도 막을 것이고, 잡아먹히는 것도 서로 상응해서 둘이 아니니까, ‘나’니까 내가 그대로 생존할 거 아닙니까?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핼리 혜성이 와서 우리 지구를 갖다 친다 할 때 그 핼리 혜성이 바로 내가 된다면 내가 부딪치지 않게 저리로 끌어다 놓고 올 거 아닙니까? 안 그렇습니까? 한마디 한마디 그냥 납득하시게끔 이렇게 방편으로 지금 쓰는데요, 잘 들으세요. 그리고 잘해 보세요. 듣는 것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이거는.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0년 7월 15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 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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