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공덕을 맛보게 되면

有嘗功德味者得自在修福得他報恩勝氣味。夢中尙不己修福。況復覺時。以智能見過終不求有造福。悲心者終不解脫修福。智者棄求有業。悲者棄解脫業。所以者何。悲者利益他故。無勝智慧平等造作。因福一果福無與等者。從十力得智。己得樂捨利他樂名背恩者。唯我能知。從佛得知故一切生是我修福之伴。設當得果而獨受用名背恩者。極難得樂豈得獨受。其如是丈夫一切所棄。設得千涅槃樂不饒益。不如救一生苦勝得千涅槃樂。解脫樂尙不獨受。何以故。見世間生無歸無救故。尙不獨受解脫樂。況復無上菩提。

번역|공덕의 맛을 본 사람은 복 받는 것에 자유자재하며, 타인에게 은혜롭게 보답하는 수승한 기운의 맛을 얻습니다. 꿈에라도 오히려 자신의 복 닦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물며 다시 깨달았을 때도 지혜로 과오를 보며 끝내 복 짓는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비심이란 끝내 해탈을 바라서 복을 닦지 않기 때문이니 지혜란 구함을 버린 업이며, 자비란 해탈을 버린 업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자비란 타인을 이익케 하는 것이며, 위 없는 지혜는 평등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니 복의 인연과 한결 같은 복의 과보는 더불어 짝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십력(十力)을 따라 지혜를 얻되 자기를 위한 즐거움을 얻고 타인의 즐거움을 저버리는 것을 일러 배은(背恩)이라 합니다.
오직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 따르는 앎을 얻었기에 일체 중생은 내가 닦을 복의 짝이 됩니다. 설령 응당 과보를 얻어도 홀로 받아쓰면 배은자(背恩者)가 되거니와 심히 얻기 어려운 즐거움을 어찌 홀로 받겠습니까. 이러해야 대장부이며 일체를 버린 것이니, 설령 천 가지 열반락을 얻어도 이익 될 게 없습니다. 한 명의 중생을 고통에서 건지고 수승한 천 가지 열반락 얻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해탈락(解脫樂)은 늘 홀로 받지 않나니 어째서 그런가 하면, 세상의 중생은 돌아갈 것도 없고 구제할 것도 없다고 보기 때문에 오히려 홀로 해탈락을 받지 않나니, 하물며 다시 위 없는 보리(菩提)이겠습니까.

해설|십력(十力)은 부처님의 열 가지 전능한 힘을 상징한다. 첫째,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은 도리에 맞는 것과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을 변별하는 지혜다. 둘째,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은 업인과 업과를 아는 지혜다. 셋째,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은 사선(四禪), 팔해탈(八解脫), 삼삼매(三三?), 팔등지(八等地) 등의 선정을 아는 지혜다. 넷째,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은 중생의 근기를 아는 지혜다. 다섯째,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은 중생의 가지가지 희망을 아는 지혜다. 여섯째,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은 모든 중생계와 법계를 아는 지혜다. 일곱째, ‘편취행지력(遍趣行智力)’은 중생이 가는 곳을 아는 지혜다. 여덟 번째, ‘숙주수염지력(宿住隨念智力)’은 자타의 과거생을 아는 지혜다. 아홉 번째, ‘사생지력(死生智力)’은 중생의 죽음과 삶의 아는 지혜다. 열 번째, ‘누진지력(漏盡智力)’은 번뇌를 끊고 열반에 이르는 지혜다.
본문에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이러한 열 가지 얻어도 능력을 얻어도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는다면, 이는 부처님의 은혜에 배은망덕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중생도 한 생각 돌이키면 이미 열반이기 때문에 중생은 각자의 개인이 아니라 부처님 세계의 공동체이며, 일원이다. 나와 다름없는 불이(不二)의 구성원이다. 은혜를 같이 할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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