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타클라마칸 사막의 불교유적

모르불탑의 모습. 〈대당서역기〉에도 나오는 곳으로 불법이 매우 번창했다. 그러나 현재는 사원 등은 모두 사라졌고, 불탑만이 화려했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사막 체험. 나는 한 때 사막체험의 유무로 인간종류를 나누기도 했다. 그만큼 사막의 의미는 크고 무거웠다.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약간 체험해 보고 난 이후의 습관이었다. 1988년 베이징 공항에서 신강성의 우루무치로 가기 위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우리 승객은 무작정 기다리기만 했다. 아무런 안내방송도 없이 4시간을 기다렸다. 그 때 약간 명의 서양인 사이에 일본인이 보였다. 일본 노인들은 은퇴한 친구끼리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야영하기 위해 나선 여행이라고 소개했다.

카라코럼 지나 만난 타클라마칸
불교 東進 역사 고스란히 남아
수많은 석굴사원들 역사의 증거
화려했던 왕국들은 이제 흔적만


사막에서 야영을! 나는 너무 놀랐다. 당시 ‘중공’이라고 불리던 ‘죽의 장막’, 그런 나라에서의 사막 여행이라니, 경악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나는 ‘남조선’ 여권을 들고 대륙에 입국한 선두 주자 가운데 하나였다. 언감생심, 사막 여행? 그래도 나는 고비사막의 돈황석굴 같은 사막의 불교유적을 찾아다녔다. 사막에 핀 꽃, 그것은 석굴사원이었다. 거대한 타클라마칸 사막의 주위에는 여러 왕국이 있었고, 또 왕국마다 불교예술의 꽃을 활짝 피우기도 했다. 현재는 중국대륙으로 다 편입되었지만, 과거의 그들은 사막의 오아시스 왕국으로 역사적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사막은 폐허, 그렇지만 인간의 탐험을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세계이기도 했다.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Sven Hedin)은 한 겨울에 파밀고원을 답사하고 카슈카르에 도착했다. 그런 과정에서 절벽 아래로 타고 온 말을 떨어트려야 했고, 굶주린 늑대들도 만나야 했다. 사실 겨울 행군은 목숨을 거는 처절한 고난의 길이었다. 겨울 티베트를 행군할 때, 130마리의 동물을 데리고 라닥을 출발했던 헤딘은 겨우 일곱 마리만 살려 티베트에 도착하기도 했다. 사막은 탐험가의 무대로 부상되었다.

“그렇지 않다. 모래 바다는 내게 무한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그는 사막으로 출발하기 전, 꿈을 꾸듯 몽상에 젖어 이렇게 고백했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가장 광대한 이 사막으로 나를 끌어들인 마력이었다. 이곳엔 영광스러운 발견과 숨겨진 전설의 열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1895년 4월의 탐험에 대하여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낙타들은 무거운 짐을 가득 싣고 있었고, 낙타의 목에 걸린 종들은 마치 장례식장으로 가는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헤딘은 훗날 출발하던 날의 광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들을 전송하기 위해 거리와 지붕 위로 몰려든 마을 주민들은 그들의 뒤에 대고 ‘저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 한다’고 소리쳤다.” -브루노 바우만, 〈타클라마칸〉 참조

스벤 헤딘(1865~1952)의 묘비명이 인상적이다. “아시아의 광활한 미개척지는 그의 세계였고, 스웨덴은 그의 집이었다.”

타클라마칸 사막, 그 의미는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다. 정말 무서운 말이다. 타클라마칸, 이 사막 안으로 들어간 자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못 하리. 이 사막의 북쪽은 천산산맥으로, 남쪽은 곤륜산맥으로, 그리고 동쪽은 고비사막으로 연결된다. 거대한 산맥의 만년설이 여름에 녹아 오아시스를 만들어 준다. 고비사막은 아시아에서 가장 커다란 사막으로 알려졌다. 정말 타클라마칸 사막은 어떻게 생겼을까.

“전체 크기의 4분의 1 정도만 모래로 뒤덮여 있는 사하라 사막과는 달리 타클라마칸은 사막의 넓이만 총 33만8천 제곱미터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사막이다. 이 사막은 히말라야 산을 낳게 했던 대륙간 ‘충돌’의 결과물이다. 약 4천만제곱년 전에 인도 아대륙(亞大陸)이 아시아 대륙과 부딪칠 때 생긴 충돌의 결과, 거의 9천 미터 높이에 달하는 까마득한 히말라야가 형성되었다. 거대한 산맥으로 이루어진 장애물이 생성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의 기후와 물의 분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타클라마칸〉 참조

나는 사막을 걷는다. 습기가 없어 오히려 상큼하기도 하다. 하지만 뜨거운 모래는 열사(熱沙) 그 자체, 맨발로 걸을 수 없다. 지표 온도 70도 정도 되어 계란을 놓으면 그대로 반숙이 된다. 뜨거운 모래도 모래이지만 맨발은 모래 속으로 파묻혀 걸을 수 없게 한다. 낙타 발처럼 넓적해야 사막을 걸을 수 있다. 광활한 대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공간. 사구(砂丘) 풍경. 무엇을 더 이상 내려놓아야 한단 말인가. 사막은 고독한 자의 마당이다. 목숨 걸고 가야 할 사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사막에서의 물은 그야말로 생명수이다. 사막에서 물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한다. 예전 탐험가들은 물이 없어 낙타 오줌까지 받아 마시고 또 다른 고통을 겪기도 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불교 동진사의 중요한 배경이다. 교하고성의 흔적은 이런 역사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막의 모래바람은 무섭다. 폭풍은 마을 자체를 덮어버린다. 그래서 사막 속의 폐허를 만든다. 타클라마칸의 경우, 모래에 묻혀 있는 도시만 해도 300곳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한다. 모래 바람의 위력을 설명해주는 사례이다.

하기야 스벤 헤딘은 롭 노르 호수의 이동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강의 물줄기가 움직인다는 것. 그래서 물이 마른 강가의 왕국은 멸망했고, 모래 속의 폐허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누란 왕국의 폐허는 이 점을 말해준다.

사막하면 오아시스가 떠오른다. 우리 어렸을 때, 교과서에 소개된 오아시스는 사실 엉터리였다. 조그만 연못 옆에 야자수가 서 있고, 그 곁에 낙타 두어 마리가 물마시고 있는 삽화. 그게 오아시스라 했다. 하지만 사막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풍경은 볼 수 없다. 오아시스는 거대한 도시를 만들기도 해 상상 밖의 규모를 보이기도 한다.

사막하면 낙타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하기야 낙타 없는 사막은 있을 수 없다. 사막을 건너는 유용한 교통수단이 낙타이기 때문이다. 낙타는 어떻게 하여 사막에서 적응했을까. 카라반이라고 불리는 낙타 대열, 이 대상(隊商)은 원래 군대를 의미했지만 상업 목적의 낙타 행렬로 굳어졌다. 낙타야 말로 사막용이다. 커다란 덩치에 힘도 세고, 각질화된 둥근 발바닥은 모래에 빠지지 않고 잘 걷게 되어 있다. 치아도 튼튼해 가시가 있는 식물도 잘 먹는다. 무엇보다 고마운 일은 며칠씩 굶어도 잘 견딘다는 점이다.

등에 지고 다니는 커다란 혹은 지방(脂肪) 탱크이다. 게다가 물 마시지 않고 수분 절약하는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아라비안 낙타는 단봉(單峰)이지만 타클라마칸 낙타는 쌍봉이어서 더 좋다. 등의 혹이 빵빵하면 영양 상태가 양호하다는 의미이다. 낙타는 2백kg 이상의 짐을 싣고 매일 40km 정도를 걸을 수 있다. 낙타는 보통 일주일 걷고 하루를 쉰다. 덩치에 비하여 겁도 많아 야간 이동은 할 수 없다. 생쥐나 새들에게조차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낙타는 사막의 자가용이다. 낙타의 평균 수명은 30년 정도이다. 사막에서 타보는 낙타. 이런 낙타가 신라의 경주까지 왔다면 상상 가능할까. 사실 경주까지 낙타대열은 왔다. 그래서 토함산 석굴암의 의미를 더욱 높여주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카라코럼 하이웨이를 넘어 타클라마칸으로 진입하면 카슈카르에 도착한다. 불교 전래의 유적이 남아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우진국의 나라 호탄에 도착한다. 물론 호탄에서 더 동쪽으로 가면 누란 왕국과 만날 수 있다. 아무튼 호탄은 쿠차와 더불어 실크로드의 가장 화려한 왕국이었다. 실크로드 남로의 거점 지역,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끝 타림분지에 위치해 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와 연결되어 인도 문화를 먼저 받아들인 곳이다. 그러니까 불교 수용의 길목이기도 했다.

호탄 벽화에 남아 있는 중국에서 온 공주. 당나라에서 온 그는 비단 생산의 누에 알과 뽕나무 씨를 모자 속에 숨겨가지고 시집 왔다. 당나라의 독점사업이었던 비단생산의 대외 확산의 계기였다. 실크로드는 비단 교역의 상징성으로 이루어진 용어가 아닌가. 우진국 왕의 초상화는 돈황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한때 번성했던 영화를 일러주는 증거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서쪽 자락에 키질 석굴이 있다. 독특한 풍광을 자랑하는 지역이다. 그 부근 쿰트라 석굴도 있다. 쿠차 왕국은 음악으로 유명했다. 사막을 안고 북으로 올라가면 화염산의 베제클릭 석굴과 만날 수 있다. 물론 이 부근에서 고창왕국의 폐허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비사막으로 들어가면 돈황의 막고굴, 그 옆의 유림석굴 등으로 이어진다. 석굴사원 기행은 사막을 통과해야 문을 열어준다. 교통수단과 도로망이 발달된 오늘도 다니기가 쉽지 않은데, 그 옛날 구법승은 어떻게 이런 험로를 다녔을까. 정말 목숨을 건 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막에 꽃핀 석굴사원의 의미는 더욱 소중하다. 극과 극의 대비, 사막과 석굴사원, 묘한 조합이지 않을 수 없다. 석굴이 있어 사막을 간다, 이런 표현은 가능할까.

〈어린 왕자〉의 생텍쥐페리는 말했다. “모래언덕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사막은 그대에게 선물을 안겨 주고 그대를 변화시킨다. 그대 자신에 몰입하고, 좌절하고, 괴로워하고, 싸우며 갈증으로 들끓는 사막을 횡단하라. 눈물을 감추어라. 그러면 내 그대의 성숙을 도울지니.” ‘어린 왕자’는 말했다. “사막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슬픈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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