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뵤도인

호우도와 연꽃의 모습. 호우도는 정토사상에 입각해 조성됐다.

나라와 교토에 가본 적이 있는 외국인에게는 두 도시가 일본 고도(古都)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특색이 너무 다르다는 인상이 남아있을 것이다.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나라와 교토의 사찰을 다시 돌아다니는 나도 이러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이번에 소개할 뵤도인(平等院)에서는 나라 사찰 경내에 있는 느낌과 너무 다르고 사찰이라기보다 아름다운 정원 혹은 궁전에 있는 착각까지 든다.

日10엔 동전 뒷면에 있는 사찰
1025년 본당 건립, 역사 시작
정토 사상 입각해 봉황당 조성
아미타불상, 헤이안 시대 걸작


나라 사찰들은 천황의 발원으로 건립되어 황실 사람들의 건강을 기도하거나 호국 역할을 하는 사찰이 많았고 이미 소개한 교토 사찰 중에서도 국가와 관련된 사찰이 있었다. 이 점이 역사가 오래된 절부터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뵤도인 창건에 대해 살펴보는 과정에서 ‘천황의 발원’이라든가 ‘호국’이라는 말이 자료에 나오지 않는다. 그럼 뵤도인은 어떻게 창건되었을까? 지금부터 일본 역사 배경에도 주목하면서 보고자 한다.

일본 동전 10엔짜리 뒷면에도 그려져 있고 수학여행 필수 코스로도 알려져 있는 뵤도인은 교토부 남부에 위치한 우지시(宇治市)에 있다. 우지차(宇治茶)로 유명한 이곳은 교토와 나라를 잇는 중간에 위치하고, 수운(水運)과 육운(陸運) 교통의 요충지로 발달했다.

산으로 둘러싸이고 비와호(琵琶湖)에서 내려온 우지강의 맑은 강물이 흐르는 풍광명미(風光明媚)한 우지는 헤이안 귀족들이 별장을 짓는 곳이기도 했다. 뵤도인 시작도 9세기 중엽에 세워진 별장 우지인(宇治院)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로 황실 일족이 소유하던 우지인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998년에 물려받았다. 그는 이곳을 우지덴(宇治殿)이라고 부르고 경승을 즐겼다. 그것을 미치나가의 아들인 요리미치(賴通)가 물려받았다. 요리미치는 1052년에 본당을 건립했다. 이때부터 우지텐은 뵤도인이라는 사찰로 불리었다. 이것이 뵤도인의 시작이다.

헤이안 시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문화적으로, 특히 미술사적으로 ‘후지와라 시대’라고 부른다.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도 강한 힘이 있었던 귀족 후지와라 씨는 어떻게 힘을 갖게 되었는지, 또 문화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후지와라 씨는 고후쿠지를 소개할 때 말했듯이 후지와라 씨의 시조인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7세기 정변 때 공을 세우고 후지와라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그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된 것으로부터 역사를 시작한다. 가마타리 아들인 후히토 누나와 딸이 천황과 결혼하면서 황자와 황녀를 낳자 후히토는 정치적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되었다.

후히토 아들 4명이 후지와라씨 남(南), 북(北), 식(式), 경(京)의 4대 가문의 시조가 되어 후지와라 4가를 이루게 되었다. 이 가운데 북가가 가장 번성한 가문이었다.

북가는 9세기 중엽에 사가천황이 세상을 떠난 후 주로 섭정(攝政)이라는 정무 방식으로 급격히 세력이 강해졌다. 섭정을 없애고 정치적인 상황을 바꾸려고 한 천황도 있었지만 절대적인 힘을 갖춘 후지와라씨가 섭정 자리에 계속 올라갔다. 후지와라 북가 가운데 후지와라노 다다히라(藤原忠平)의 자손만 섭정에 취임했는데 섭관자리를 둘러싸고 다다히라의 자손들이 치열한 투쟁을 했고 마침내 미치나가가 승리했다. 

미치나가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후인 1052년, 마치 말법 시대가 시작한다고 하는 해에 미치나가 아들 요리미치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별장 우지덴을 사찰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본당이 있는 보통 사찰이었으나 다음해에 정토사상에 의하여 만들어진 정원인 서방정토를 구현한 정토식 정원을 만들고, 그 중심에 아미타당을 세워 아미타여래좌상을 봉안했다. 그것이 바로 현재 호오도(鳳凰堂)이다.

호오도 본래의 명칭이 아미타당이다. 지붕 위에 봉황상 한 쌍이 놓여 있기 때문에 에도시대부터 호오도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본 사찰 건축물이 비교적으로 직선적인 인상이 있는 것이 많은 가운데 호오도의 옆으로 펼쳐진 지붕이 곡선미로 너무 아름답고 부드러운 멋을 지니고 있어 호오도 자체가 마치 봉황이 날개를 좌우로 크게 펼쳐진 모습으로 보인다. 호오도 밖에서 은은히 보이는 아미타여래좌상이 헤이안 시대 불상 가운데 최고봉으로 꼽힌다.

뵤도인 안 있는 호오도(鳳凰堂)의 모습. 지붕 위에 봉황상 한 쌍이 놓여 있기 때문에 에도시대부터 호오도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안에는 아미타불좌상이 봉안돼 있는데 헤이안 시대 불상 가운데 최고봉으로 꼽힌다. 사진제공=최선일 문화재청 감정위원

후지와라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 조각가 조초(定朝) 스님이 제작한 불상이라는 것이 유일하게 밝혀진 불상이다. 조초는 헤이안 귀족들의 선호에 맞는 우아하고 세련된 일본적인 양식을 창조하고, 이것이 오랫동안 일본 불상의 전형이 되었다. 호오도에 들어와 아미타여래좌상을 가까이에서 보면 중국식이나 한국식을 떠나 일본화 된 특징을 느끼게 된다.

아미타여래좌상의 뒤에는 화려한 광배가 있고, 광배 위로는 화려하고 큰 닫집이 있다. 불상은 물론이지만 그 닫집 자체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가로 약 5미터인 방형(方形) 닫집 안에 또 직경 약 3미터인 동그란 닫집이 있는 이중 닫집이다. 나무를 투조(透彫)라는 조각법으로 섬세하게 깎고 거기에 옻칠, 나전, 금박을 가한 것인데 이렇게까지 크고 화려한 닫집이 정말 드물다.

아미타당 벽에는 운중공양보살상(雲中供養菩薩像)이 걸려 있다. 52구 있는 가운데 그중 26구는 봉상관(鳳翔館)에 전시되어 있어서 더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모두 다 구름을 타고 조용히 합장하기도 하고, 즐겁게 춤추기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등 아미타 정토의 다양한 보살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좌상의 높이 40~72cm, 입상의 높이 62~87cm인 운중공양보살상의 섬세하고 세련된 조각에서 조초가 목조 기법 발달이라는 측면에서도 큰 공을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목조 불상이 통나무로 만든 것이 기본이었는데, 여러 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이것을 극복한 기법이 목재를 결합함으로써 제작하는 ‘요세기 즈쿠리(寄木造)’라는 목조 기법이었다. 요세기 즈쿠리 기법은 7세기 목조상에도 이용되었으나 이것을 세련된 기법이라는 수준까지 높인 사람이 조초이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뵤도인 답사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운중공양보살상과의 만남이다. 방문하면 자세히 보고 가장 좋아하는 보살상을 골라보는 것도 좋겠다.

2001년에 개관한 뵤도인 보물관인 봉상관이 현대식 멋진 건물인데 뵤도인 주인공인 호오도 외관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호오도 뒷쪽으로 눈에 띄지 않게 세워져 있다. 거기서 운중공양보살상을 비롯한 국보 범종, 국보 금동 봉황상 등 뵤도인 대표적인 보물들을 상설전시로 만나볼 수 있다. 봉상관이라는 이름은 뵤도인의 상징인 봉황이 미래를 향해 비상할 것을 기도해 지어졌다. 과거, 현재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키는 책임을 지겠다는 뵤도인의 강한 의지를 봉상관이라는 명칭으로 알 수 있다.

뵤도인 답사 안내
뵤도인 입장료로 호오도 외관, 봉상관 내부 관람을 할 수 있지만 호오도 내부에 들어가려면 따로 요금을 내야 된다. 개별적으로 관람하지 못하고 안내원을 따라서 20분 간격으로 관람한다. 사람이 많을 때는 경내에 들어가자마자 신청하는 편이 좋다. 봄과 가을에는 단체객이나 개인 방문객도 많은데 특히 등나무 꽃이 피는 봄에 붐빈다. 게이한 우지역에서 뵤도인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이다. 오사카에서 우지에 갈 때는 먼저 요도야바시(淀屋橋)역에서 데마치야나기(出町柳)행을 타고, 게이한 주쇼지마(中書島)역에서 우지행으로 갈아타고 간다. JR우지역에서도 걸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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